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41화 (41/187)

<41화>

전령이 건넨 서찰을 묵묵히 읽어 내려가고 있는 카젠.

‘허허.’

전황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결판이 나 있었다.

야간에 벌어졌던 소규모 국지전만 몇 차례 있었을 뿐.

선두의 금린사자기를 보는 순간 적들은 모든 전투 의지를 깔끔하게 접어 버렸다.

금린사자기를 눈앞에 두고도 전투를 재개한다면 그것은 곧 왕국에 대한 반역의 의지이기에.

광산 길드와 상인 연합들이 가장 먼저 복종의 의사를 표시해 왔다.

그들은 약자였기에 처세술에 밝았다.

오랜 세월 왕국의 은자처럼 지냈던 하이베른가의 숨은 의도를 모르는 이상, 일단은 몸을 숙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리오네가와 세헬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왕국의 대공작가가 무력을 투사한 시점부터 남작가들 따위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

이채로운 것은 세헬가와 상인 연합을 은밀히 지원했던 하이렌시아가 철저하게 이들을 외면했다는 것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관여한 바 없다는 듯, 그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되돌아가 버렸다.

“역시나 약삭빠른 자들이군.”

“이미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렌시아라고 해도 금린사자기의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유카인의 대답에 카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의 시선이 강렬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전령에게로 다시 향했다.

“그럼 평정되었군. 원정대의 복귀는 언제쯤인가?”

“충! 사령관님은 죄인 보웬 공과 그의 장자 보미오르의 신변까지 모두 확보한 후에 복귀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다리오네가의 가주인(家主印)은 확보했습니다.”

“세헬가의 반발은 없었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척후병을 내주어 저희를 도왔습니다.”

“척후병을 내주었다고?”

“예 가주님. 기수가의 행사인데 돕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카젠은 새삼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엄청난 기수가의 힘을 그저 안주하는 데만 써 왔다니…….

대공자의 말대로 하이베른은 그저 보기 좋은 사자였단 말인가.

“오랜 여정에 고생이 많았다. 돌아가도 좋다. 그대의 헌신을 높이 사 50리랑을 하사하겠다.”

“충! 감사합니다!”

전령이 돌아가자 유카인이 더욱 화색이 된 표정으로 카젠을 바라봤다.

“한 달 만에 모두 평정할 줄이야! 아무리 금린사자기가 있었다지만 니젠 사령관의 속도전이 정말 대단합니다!”

“니젠의 병력 운용은 원래부터 빠르기로 명성이 자자했지. 녀석의 전술은 제압보다는 언제나 시간에 치중되어 있었어.”

“빠른 섬멸을 우선하는 것이 그의 오랜 지론이 아닙니까.”

“그 문제로 항상 나와 격론했지.”

“하긴…… 아, 정말 오래된 일입니다.”

옛 추억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유카인.

카젠이 피식 웃었다.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더니 자네도 제법 나이를 먹은 모양이군.”

유카인이 얼굴을 찡그리다 문득 화제를 돌렸다.

“니젠 사령관이 보웬 공의 신변을 확보한다면 그를 곧바로 왕성으로 압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실의 조사관들이 그의 진술을 확보한다면 틀림없이 렌시아 놈들이 저질렀던 행위가 왕국 전역에 드러날 겁니다. 이대로 놈들을 보내는 것이 영 찝찝합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카젠.

“보웬 공의 신변은 세헬가를 압박하는 수단에서 끝내야 하네.”

“예?”

“렌시아가는 분명 본 가의 영역을 침범한 자신들의 행위를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굳이 미리 밝혀 그들이 경계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네.”

유카인이 그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더욱이 왕실 조사관들까지 렌시아 놈들에게 포섭된 상황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오히려 중요한 패만 내어 주고 되치기만 당하는 꼴이 되겠지. 패란 숨길수록 위력이 더해진다네.”

렌시아가.

왕실의 권력까지 넘보는 사실상의 섭정 체재.

카젠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패를 내어 줄 수가 없었던 것.

“이제 렌시아의 지략가들은 본 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겠지.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로선 이득이라네.”

“오……!”

유카인이 놀랍다는 듯, 미심쩍은 눈초리로 자신의 위아래를 훑자 카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공자가 그렇게 말하더군.”

순간 유카인은 소름이 돋았다.

대공자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전령의 서찰을 읽어 보기도 전에 이미 전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란 걸 예상했다는 말.

하긴 가문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야 할 대공자였다.

그런 그가 원정대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건 그만한 확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갑작스런 카젠의 질문에 유카인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에느의 주장 말일세.”

“음…….”

유카인이 한 달 전의 그때를 떠올린다.

<저는 데인이 대공자가 되었으면 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대공자는 모든 면이 너무 압도적이에요. 도저히 그 나이를 믿기 힘들 지경이죠. 그 옛날의 오라버니처럼…….>

서글픈 눈으로 사자왕을 바라보던 소에느.

<두려워요.>

그렇게 말하며 한참이나 입술을 짓씹던 그녀의 힘겨운 목소리.

<정말로 루인이 대공자의 자리에 미련이 없다면 데인에게 주세요. 수많은 혈족들, 방계와 봉신가들…… 그들을 압도하는 것만으로는 또 다른 소에느가 나타날 뿐이에요. 베른의 역사가 증명하죠.>

<대공자는 다르다.>

<맞아요. 인정해요 그가 다르다는 걸.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예요. 단지 두려워서 마음을 숨길 뿐이죠. 그런 건 변화가 아니에요.>

<변화?>

<오라버니께서 진정 본 가의 변화를 이끌고 싶다면…… 데인이어야 해요.>

<저는 찬성!>

손을 번쩍 들며 소에느의 의견을 동조하고 나서던 대공자가 떠올라 유카인은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하하.”

“음? 갑자기 왜 웃는 건가?”

유카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대공자는 정말 이상한 분입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대공자의 자리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왕국의 기수.

한창 꿈 많은 검가의 소년, 그런 열혈의 마음이라면 반드시 쟁취하고 싶은 열망이었어야 했다.

“녀석은 뭔가를 초월한 느낌이야. 아비인 나조차도 그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가 없으니. 게다가 요즘은 말이네.”

“예?”

“녀석의 무심한 눈을 볼 때면 무슨 돌아가신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든다네. 자꾸만 부끄럽고 또 숨고 싶은 심정이야.”

“무, 무슨 그런 말씀을!”

“저길 보게.”

가주실의 책상 위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입꼬리를 파르르 떨던 카젠이 이를 꽉 깨물었다.

“매번 이상한 서류들을 가져오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만 날 가르치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단 말이지. 마치 가주 수업을 받는 느낌이랄까?”

“제가 잠시 봐도 되겠습니까?”

“후회할 텐데.”

서류 더미들을 가볍게 훑어보던 유카인이 그 아득한 활자의 향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게 다…….”

“농업학, 상업학, 수리학, 경제학, 군왕학…… 아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군.”

“어허! 대공자님의 무례가 도를 지나쳤습니다! 무시하십시오!”

“허허. 무시?”

어느덧 카젠의 얼굴에는 새하얀 탈력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직도 그 녀석을 모르겠나? 녀석은 내게 한 번도 저 무시무시한 것들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네.”

“그럼……?”

유카인의 얼굴에 가득 떠오른 의문.

곧 카젠이 이를 바득 갈며 울분을 토해 냈다.

“녀석은 기사의 승부욕을 너무 잘 알아.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줄 아는가?”

“어떤…….”

“녀석을 한 번이라도 이겨 보고 싶네! 언젠가는 소름 돋을 만큼 무감각한 녀석의 얼굴을 보기 좋게 일그러뜨리고 싶단 말일세!”

“예? 그, 그게 무슨?”

그때, 가주실의 문이 열리며 호위 기사 네하릴이 들어왔다.

“충! 대공자님의 접견 요청입니다.”

카젠이 거칠게 콧김을 뿜었다.

“오냐! 오너라! 내 오늘은 기필코 네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무심한 얼굴로 가주실에 들어온 루인.

그가 곧 공손한 예법으로 허리를 숙이다 중간에 씨익 웃는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거 잘 알고 계시죠?”

폭풍을 만난 듯 세차게 흔들리는 카젠의 동공.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예 아버지. 오늘도 토론에서 지게 되신다면 제게 ‘그것’을 내놓으셔야만 합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부들부들.

익살로 가득한 루인의 눈을 바라보던 카젠이 허탈하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매번 답안지나 다름없는 서류를 건네받았으면서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49번을 내리 지기만 했는데 오늘이라고 결과가 다를 리 없는 것이다.

저 괴물 같은 아들놈이 지닌 지혜는 현자의 그것을 아득히 상회하는 것이니까.

“흠흠.”

유카인이 억지로 웃음을 참아 가며 그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어쩐지 퀭한 눈, 이제 보니 살이 좀 빠진 것 같은 카젠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가주님. 대공자님이 원하시는 그게 뭐든 그냥 내어 주시는 게…….”

“……그렇겠지?”

“자식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쓰게 입맛을 다시는 카젠.

곧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서랍을 열었다.

카젠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은 빨간 스크롤.

스크롤의 봉인에는 르마델 왕실을 상징하는 청록색 드래곤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가주님 이건?”

“보름 전, 대공자 앞으로 도착한 것이네.”

“아,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 추천서군요.”

루인이 냉랭한 눈으로 입학 추천서를 한 차례 훑더니 다시 아버지를 바라봤다.

“승부 없이 주시는 겁니까?”

“가져가거라.”

혹시라도 무를까 싶어 전광석화처럼 입학 추천서를 낚아챈 루인이 이내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루인이 예를 표하며 가주실을 나서려고 할 때, 유카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꼭 가셔야만 합니까 대공자님?”

척.

뒤돌아선 루인이 카젠과 유카인을 번갈아 응시한다.

“아버지, 유카인 삼촌.”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바로잡는 카젠.

“말해 보거라.”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더없이 강렬해진 눈빛.

“우리 하이베른가가 멸족의 위기에 닥친다면, 그래서 혈족들 중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뭐?”

“어떤 위협과 죽음의 난관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베른의 의지를 이을 수 있는 자. 적들의 더럽고 저열한 음모에 맞서 최후의 최후까지 남아 기어코 복수를 완성할 수 있는 자.”

“…….”

“적어도 그만 살아 있다면 모두가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가문의 모든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자.”

갑작스럽게 꺼낸 루인의 화두 앞에, 카젠과 유카인은 동시에 한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너…….”

“대공자님…….”

루인이 보기 좋게 웃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죠.”

어쩌면 오만하게 들리는 말.

하지만 카젠과 유카인은 결코 그의 말이 철없는 귀족 소년의 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이베른가의 숨은 검. 저는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게 저의 길입니다.”

다시 멋들어지게 인사를 올리며 멀어져 가는 루인.

카젠의 침잠한 눈빛이 허공을 갈랐다.

“허허…….”

대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이 마음을.

“하이베른가의 숨은 검(劒)이라.”

힘없이 웃고 있는 카젠에게로 유카인의 자조 섞인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미 그는 완성되어 있군. 카젠.”

끄덕끄덕.

“그래. 녀석은 누구보다 완전한 이 하이베른의 기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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