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40화 (40/187)

<40화>

짹짹.

희미한 눈빛으로 창살을 응시하는 루인.

가볍게 몸을 추스른 루인이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이렇게 개운한 숙면이 대체 얼마 만인지.

루인이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슴을 어루만진다.

두근.

초인 연합을 이끌었던 그때 이후, 군세의 열기에 취해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오히려 더 좋은 결과였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기사들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묶었다.

하이베른가의 가주와 직계들이 보여 준 대속 의식.

그것은 순혈주의자들에게는 사자의 결의를 보여 주는 것이었고, 배덕자들에게는 사자의 포용력을 드러낸 것이었다.

성을 가득 메웠던 병장기들의 박자.

이어 울려 퍼진 거대한 함성 소리.

그들은 굳이 기사의 예법으로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선 채로 각자의 무기를 통해 참회했으며 또 순응할 뿐이었다.

기사들은 그렇게 온 마음으로 울며 검으로 충성을 맹세해 왔다.

어떤 맹약보다도 더욱 가슴을 울려 오는 그들의 화답에 루인은 비로소 하이베른가가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아버지…… 나의 하이베른가여…….’

그 옛날, 검술왕 데인의 반역 사건 이후.

폐허가 된 가문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성터.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이베른가는 그렇게 추억 한 자락 남기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얼마나 후회했던가.

얼마나 울고 울었던가.

초인을 초월한 강대한 대마도사의 힘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문을 증오해 왔다고 생각해 온 지난날의 편린들.

그러나 폐허가 된 가문을 보는 순간, 자신이 아버지를, 그리고 이 하이베른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절절히 깨달았다.

생명력이 말라 가며 고통에 신음했던 추억밖에 없었지만.

베른의 치욕을 바라보는 혈족들의 따가운 시선밖에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문은 자신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아버지가 계셨던 곳이었다.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당신께서 지키고자 했던 가문.

살아 계셨다면 가문의 멸망을 누구보다 슬퍼했을 아버지임을 알기에, 이 하이베른가를 어떤 가문보다도 강대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 흑암의 공포가.

달라진 검술왕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똑똑.

이른 아침이면 늘 들려오는 노크 소리.

적응이 될 법도 하건만, 한 치의 빈틈도 주지 않는 녀석의 방문이 이제는 조금 버거워질 지경이었다.

“일어났다.”

방문이 열리더니 시종이 다가와서 황급히 허리를 숙인다.

“대공자님. 데인 도련님께서 방문…….”

“들어오라고 해.”

“형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오고 있는 데인.

그가 얼굴에 잔뜩 흥분을 머금은 채로 루인 앞에 서더니 그대로 꾸벅 허리를 숙인다.

“존경드립니다 형님!”

“응?”

뭔가 데인의 태도가 달라졌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루인이 이내 그의 눈빛을 바라보고는 기겁했다.

“뭐, 뭐냐?”

데인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열정, 열의, 존경, 선망 뭐 그런 것들로.

곧 그가 가슴을 어루만지며 활짝 웃었다.

“저는 아직도 어제의 전율이 가시지가 않습니다! 단언컨대 태어나서 그토록 장엄한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루인이 피식 웃으며 동생을 이해했다.

산전수전을 겪어 온 이 흑암의 공포조차 이렇게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하물며 녀석에게는 생애 최초로 겪는 뜨거운 전율일 터.

군세의 열기란 때로는 어떤 술보다도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법이다.

한데, 데인의 옷매무새가 조금 묘했다.

“너 설마? 잠을 자지 않은 것이냐?”

어제 입었던 그의 복장이 그대로였던 것.

“어떻게 제가 잠을 자겠습니까? 원정대의 출정을 배웅하고 오는 길입니다.”

설마 군세의 열기에 취해 출정길까지 따라나섰다가 아침에서야 돌아왔단 말인가?

과연 그의 옷과 신발이 여기저기 더러워져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헤레타 언덕에서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루인.

“그 먼 길을 어떻게? 몸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어서 가서 쉬거라.”

“괜찮습니다. 형님이 하셨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데인은 지금도 형의 모든 목소리가 생생했다.

봉신가들을 향한 분노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들.

지금까지 경험했던 형의 초월적인 지혜와 무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제의 형은 자신이 막연히 상상해 온 가장 이상적인 군주(君主).

권위적이었지만 그것은 포용이었다.

충성을 강요했지만 그 과정은 희생이었다.

대속의 의식으로 모든 기사들의 마음을 움켜쥐고 흔들어 버린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한낱 죄인을 위해 고결한 명예를 초개처럼 버렸던 형.

그의 행동은 순혈주의자와 배덕자들의 모든 마음을 하나로 묶기에 충분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형을 신뢰하는지 이제야 데인은 절절하게 깨달았다.

“형님.”

루인의 두 눈에 이채가 흐른다.

갑자기 데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말하거라.”

“이제는 제가 거부하겠습니다. 하이베른의 대공자는 형님이셔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장 형님에게 가주직을 이어받으라고 명하신다 해도 저는 찬성할 겁니다.”

당돌한 데인의 행동.

“기사가 쟁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왕국의 기수다. 넌 욕심도 나지 않는 것이냐?”

그때, 막내 위폰이 루인의 방에 들어오더니 이내 쪼르르 달려왔다.

“나도 찬성이야 형!”

터질 듯이 귀여운 볼로 각오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위폰을 바라보고 있자니 루인은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하하하! 너마저 왜 이러는 것이냐?”

“마치 아버지 같았어. 아, 아니 아버지보다 더…….”

어제의 감상을 차마 모두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는지 꾹 하고 입을 닫고 마는 위폰.

“경쟁이란 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할 수 있죠. 형님은 그냥…… 아 더 말하기 싫습니다. 저만 비참해집니다.”

치욕스러운지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데인.

압도적인 무력.

미지의 마법.

사람 같지도 않은 초월적인 지혜.

왕국의 1왕자와 마탑의 현자까지 구워삶아 버린 협상가의 자질.

수천 명 기사들의 마음을 움켜쥐는 군주의 능력까지.

이건 뭐 어느 하나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규격 외의 인간이 바로 자신의 형, 루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아버지를 만날 참이었다.”

어제의 아버지의 행동.

분명 그것은 결단코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는 몸.

좀 더 명확한 입장 정리가 필요했다.

몸을 정갈히 씻은 루인이 예복을 입고 유폐지를 나서자 동생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   *   *

하이베른가의 가주실.

“고모?”

쪼르르 달려가는 위폰.

자신의 고모가 가문의 죄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직 위폰은 가문의 정치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

소에느가 달려와 자신의 품에 안긴 위폰을 어색하게 안았다.

“위폰…….”

“응! 잘 지냈어 고모?”

“…….”

위폰에게 소에느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

데인이 그런 위폰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루인이 허리를 숙이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손님이 먼저 와 계셨군요. 그럼 저희는 나중에 찾아오겠습니다.”

“아니다. 모두 이리 앉거라.”

데인이 안색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굳이 포효의 씨앗을 쓰셔야 했던 겁니까?”

“신경 쓸 거 없다. 대공자는 뭐 하고 있느냐? 이리 와서 앉으라 하였다.”

이내 한숨을 쉬며 의자를 빼고 앉은 루인.

가족끼리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유카인과 소에느가 함께 있는 이상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동생들을 데려온 것을 보니 가족의 일을 상의하려고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가주님.”

카젠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의 가율과 예법을 풀겠다. 상의하려고 했던 일을 말해 보거라.”

인상을 찡그리는 루인.

굳이 소에느가 있는 자리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하라니.

아버지의 명령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유카인 삼촌도 앉으시죠.”

모두의 시선이 루인에게 모였을 때, 그의 결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전 이미 베른헤네움 홀의 수많은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대공자의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이 아버지께서도 분명 데인을 대공자로 키우겠다는 제 뜻을 허락하셨고요.”

“그런데?”

카젠이 연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화답하자 루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 저 지금 진지합니다.”

“알고 있다. 계속해 보거라.”

“이미 아카데미행까지 허락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피식 웃는 카젠.

“무슨 아카데미에서 수십 년 동안 구를 작정이냐? 몇 년만 지나면 되돌아올 것이 아니냐? 그 정도 세상 경험은 가문의 누구라도 하는 것이다.”

“아니. 아버지.”

“게다가 뭐? 선언? 웃기는 녀석이구나. 데인. 네가 말해 보거라.”

데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의 형 루인을 쳐다봤다.

“대속의 의식 하나로 가율마저 뒤집어 버린 형님입니다. 고작 선언 하나 무른다고 해서 누가 동요하겠습니까? 그냥 원래 그런 분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죠.”

“데인!”

루인이 노려보고 있었으나 데인은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그때 루인은 보았다.

아버지가 데인을 향해 잘했다는 듯 윙크하는 모습을.

그제야 모든 일의 전후를 알게 된 루인이 이를 꽉 깨물었다.

“오호라. 네놈이 아침부터 찾아와서 대공자를 못하겠다고 드러누운 것이 다 아버지가 시킨 것이렷다?”

“접니다. 대공자님.”

유카인을 향해 홱 하고 돌아보는 루인.

“아니 유카인 삼촌은 또 왜요? 이 일이 저 녀석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인지 정말 모른단 말입니까?”

이내 유카인이 눈을 부라린다.

“무슨 그런 말씀을! 이제껏 저를 형제들을 이간질하는 그런 자로 보셨습니까?”

“아니……!”

“말도 마십시오. 어제 데인 도련님이 저와 밤새 걸으면서 대공자님을 얼마나 칭송하셨는지 아십니까?”

“……녀석과 함께 다녀온 겁니까?”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슬며시 미소 짓는 유카인.

“이미 데인 도련님께 대공자님은 선망의 대상, 아니 영웅입니다. 아예 하이베른가의 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밤새도록 열변을 토하시더군요.”

“뭣이?”

카젠이 데인을 노려보며 어이가 없다는 투로 웃었다.

“하하, 이 녀석이? 그래도 이 아비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거늘!”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하하! 녀석!”

그런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소에느.

어느덧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눈가를 적셨다.

그녀는 지금의 감정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저 어처구니없는 가족은 대공자의 위계, 왕국의 기수 자리를 장난처럼 양보하고 있었다.

형님이 대공자, 아니 아예 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바락바락 우기고 있는 데인.

그걸 또 끝까지 싫다고 뿌리치는 대공자.

저 터무니없는 형제가 장난처럼 저울질하고 있는 위계.

자신은 평생 그 하나만을 쟁취하기 위해 살아왔다.

‘대체…… 난…….’

지금까지의 삶, 그렇게 아귀처럼 갈구해 온 모든 탐욕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져 버렸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

그때.

“고모, 고모는 어떻게 생각해? 고모도 우리처럼 루인 형이 계속 대공자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

위폰의 깨끗한 눈망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소에느.

그녀는 위폰의 순수한 영혼 앞에 가슴이 저미었다.

자신이 저지른 배덕의 세월, 그 악착같은 욕망의 시절이 덧없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곧 힘겹게 웃는다.

“아니.”

“응?”

“고모는 데인이 대공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루인이 이내 환한 얼굴이 되어 소에느를 바라본다.

그것은 소에느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대공자의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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