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39화 (39/187)

<39화>

루인이 건넨 대공의 인장을 무심한 얼굴로 취하는 카젠.

멍하니 눈만 껌뻑이고 있던 오르테가 공이 황급히 몸을 숙인다.

“대, 대공!”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두려움.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

내내 외면해 온, 그 옛날 자신의 영혼을 거머쥐었던 그 공포는 십 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무저갱처럼 가라앉은 무심한 눈빛.

사자왕의 그런 눈을 보는 순간, 마치 오랜 봉인에서 깨어나듯 굴종(屈從)이 피어오른 것이다.

“꿇어라.”

오르테가의 동공이 폭풍을 만난 듯 흔들린다.

자신을 향한 사자왕의 첫마디는 저 건방진 대공자와 똑같았다.

허나 마음을 먹기도 전에 몸부터 허물어졌다.

털썩.

이 빌어먹을 약자의 영혼은 허탈하리만치 제 자존감을 허물며 본래의 정체성을 되찾아 갔다.

천 년의 맹약.

뼛속까지 각인된 굴종의 굴레.

‘끝났다…….’

결국 오르테가는 자신의 모든 계획이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협상이란 대등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

한데 자신은 모든 봉신가들을 품지도 못했고, 저 사자왕, 아니 그의 어린 새끼조차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게 오르테가는 치가 떨리는 굴욕감을 억지로 삼키며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설마 가주께서는 대공자의 말을 모두 믿으십니까?”

이제는 협상 따위를 노릴 단계가 아니었다.

대공자의 언변에 카젠의 마음이 동한다면 자칫 베른가의 가율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결코 제 마음에 품어 본 적 없는 불경입니다. 저는 그런 저열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누그러진 사자왕의 표정.

이래서 명성이 중요했다.

악을 심판해 온 정의의 수호자, 서광의 심판자라는 이명은 왕국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칭송해 온 이름.

오르테가는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더욱 몸을 숙였다.

“봉신가들의 병력과 무장은 헌신에서 비롯된 충심이었을 뿐, 결코 삿된 마음이 아닙니다 가주.”

“그래야겠지.”

카젠의 묘한 어감에 오르테가는 핏물이 배어날 만큼 이를 깨물었다.

굳이 들춰내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 저 사자왕은 이미 대공자의 주장에 마음이 기울었다.

이것을 약점으로 삼아 어떤 엄청난 압박을 해 올지 오르테가는 벌써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대공자를 대했던 그대의 태도, 그 불경까지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허물어진 채 몸을 떨고 있는 오르테가를 향해 사자왕의 명이 떨어졌다.

“포돔의 철혈, 가스토가를 이번 출정에서 제외한다. 또한 가스토가의 영주에게 반년간의 근신을 명령한다. 동시에 사자성의 출입도 함께 제한될 것이다.”

부들부들.

전장을 앞에 두고 되돌아간다는 것은 기사에게 있어 더없는 불명예.

더욱이 사자성에 출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이베른가의 권력 지형에서 완벽히 멀어진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오르테가는 감히 반박하거나 거부할 수 없었다.

“충. 가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더 이상 시선을 맞댈 가치도 없다는 듯 오르테가를 외면하는 카젠.

어느덧 그의 시선은 집사 아길레를 향해 있었다.

“집사.”

“예. 가주님.”

“대공자의 뜻대로 가문의 무구 창고를 개방하라. 하이베른의 기사들을 최고의 무기와 갑주로 무장시킬 것이다.”

종군의 복식을 한 기사들 몇몇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하사될 무장보다는 다시 자신들을 ‘하이베른의 기사들’이라고 인정한 사자왕의 자비에 감동한 것이었다.

“또한 죄인 니젠을 데려오라. 대공자의 뜻대로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이다.”

“예……?”

“가주!”

한껏 당황해하는 집사 아길레와 친위 기사 유카인.

이를 모두 지켜보고 있던 루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아버지의 반응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었던 것.

그때.

끝까지 하이베른가를 향한 의리를 지켰던 순혈주의자 측이 크게 반발했다.

“그는 반역을 도모했던 수괴입니다! 하이베른가의 합당한 가율로 징치된 죄인입니다!”

“죄인을 사령관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원로들께서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가주!”

“재고해 주십시오 가주!”

루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순혈주의자들의 반발과 가율을 번복했다는 오명은 아버지가 가져가게 된다.

‘젠장.’

아버지는 데인이 준비될 때까지 가문에 남아 하이베른을 경영해야 했다.

곧 가문을 떠날 자신이 짊어지는 편이 효율적이고 합당한 일.

아버지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굳이 나서서 오명을 뒤집어쓴단 말인가?

대공의 인장을 자신에게 건넸을 땐 이런 자신의 마음을 헤아린 것으로 생각했다.

대공자가 죄인들의 석방을 두고 가주와 싸워야 했다.

아버지는 가주의 권위로 이를 끝까지 거부해야 했다.

분명 그게 가장 좋은 그림이었다.

“…….”

순혈주의자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끝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카젠.

루인이 착잡한 심정으로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을 때 지하 감옥의 간수가 니젠과 함께 도착했다.

“충! 죄인 니젠을 데려왔습니다!”

순간 으스러지게 주먹을 말아 쥐는 루인.

자신의 삼촌, 니젠의 눈빛 역시 아버지와 소에느처럼 텅 비어 있었다.

대체 이 하이베른이 무엇이길래 저 못난 형제들의 영혼을 이토록 망가뜨린단 말인가.

“니젠 아이올 비셀 베른.”

나직이 울려 퍼지는 카젠의 목소리.

니젠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우뚝 서 있는 형을 바라본다.

카젠 사홀 몽델리아 진 베른.

오로지 하이베른가의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미들네임 ‘사홀.’

이 땅의 지배자, 공국의 봉토를 다스리는 자의 미들네임 ‘몽델리아.’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모든 영광과 오롯함은 여전히 저기, 저곳에 있었다.

저벅저벅.

그런 영광스런 존재가 육중한 갑주를 출렁이며 걸어오고 있다.

니젠은 떨려 오는 가슴, 한없이 무거운 심정으로 거대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인 니젠이 가주를 뵙습니다.”

가늘게 어깨를 떠는 니젠을 향해 사자왕의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그대가 좋아하는 전장이다 니젠. 가문의 금린사자기를 그대에게 맡기니. 반드시 승리로 가문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가주! 차라리 저희에게 죽음을 명하십시오!”

“절대로 그를 사령관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순혈주의자들의 반발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던 니젠은 다시 고개를 들어 형을 올려다보았다.

“가주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 그대로다 니젠. 저들의 사령관이 되어 승리를 쟁취하고 돌아오라.”

그때.

순혈주의자들 몇몇이 갑주를 벗기 시작했다.

그들은 엄숙한 얼굴로 갑주와 무기들을 차곡차곡 개더니 그대로 엎드려 목을 길게 뺐다.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시려거든 저희의 목숨부터 먼저 거둬 가십시오 가주.”

“반역자들의 수괴를 따르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기사의 명예를 지키겠습니다.”

그때.

저벅저벅.

대공자 루인이 말없이 걸어온다.

어느덧 예복의 품에서 단검을 빼 든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모두에게 내보였다.

뚝뚝.

얼굴을 적셔 오는 피.

니젠이 자신을 향해 움켜쥐고 있는 루인의 주먹을 뿌리치며 그대로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대공자!”

“보시다시피.”

싱긋.

모두가 멍하니 천연덕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대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의 대속(代贖).

그것은 기사의 결투만큼이나 성스럽고 고결한 하이베른가의 의식.

상대의 모든 죄와 행위를 함께 짊어진다는 뜻.

이제 니젠이 다시 반역을 꾀하거나 가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시에는 모든 책임을 루인이 함께 져야 했다.

대공자가 자신의 명예로 니젠의 보증인으로 나선 것이었다.

“대공자! 아니 루인! 나 같은 죄인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대공자의 명예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다! 엇?”

뚝뚝.

다시 니젠의 얼굴을 적셔 가는 피.

“혀, 형님?”

어느덧 카젠 역시 사홀의 용맹의 칼날을 움켜쥔 채로 니젠에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결국 루인은 그런 아버지를 향해 불같은 외침을 토해 냈다.

“도대체! 왜 한 번을 져 주지 않습니까? 그냥 좀 가만히 계시면 안 돼요? 가만히 계시면 다 알아서 하는데 왜 자꾸 훼방을 놓습니까?”

“제 혼자만 더러워지겠다고 똥밭을 구르려는 아들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아비는 없다.”

“아니 아버지…….”

뭐라 항변하려다 결국은 꾹 하고 입을 닫고 마는 루인.

뚝뚝.

루인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마저 왜 나서는 것이냐?”

어느덧 다가와 함께 주먹을 움켜쥔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이는 데인이었다.

씨익.

“이런 일에 빠진다면 어머니가 꾸짖으실 겁니다.”

“하, 정말.”

사자왕과 그의 직계가 모두 피를 흘리고 있다.

신성한 베른의 피.

사자전을 지배하는 그 엄숙한 의식에 더 이상은 순혈주의자들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뚝뚝.

“유, 유카인?”

친위 기사 유카인이 검을 움켜쥔 채로 니젠을 응시한다.

“참으로 대단한 가족들이오 니젠 성주. 이 유카인이 평생을 바쳐 온 신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

유카인이 카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목숨을 바쳐 지켜 온 하이베른가가 오늘만큼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소.”

뚝뚝.

르데오의 봉화, 아이작 소뷔에르 공이 주먹을 움켜쥔 채로 희게 웃었다.

“니젠 성주의 지휘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전술만큼은 가주님보다도 뛰어난 분이 아닙니까?”

인상을 찡그리는 카젠.

“안 본 사이에 더 건방져졌군 아이작. 자네도 근신하고 싶나?”

“보시다시피 지금도 근신 중입니다. 아니면 저들처럼 목이라도 빼 드릴……?”

아이작이 걸치고 있는 종군의 복식을 힐끗 거리더니 이내 크게 웃는 카젠.

“크하하하! 그 꼴 한번 보기 좋군! 그러게 의리 좀 지키지 그랬나? 이 카젠이 한 십 년쯤 골골거렸다고 해서 고양이로 변하겠냐 이 말이지.”

“……죄송합니다.”

“내가 더 미안하네 아이작.”

아이작이 카젠의 음울한 시선을 좇았다.

외팔이가 된 자신의 아들 브리제를 바라보며 아이작이 힘겹게 웃었다.

“자업자득이지요. 설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씁쓸하게 웃던 카젠이 다시 자신의 동생 니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니젠 성주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이만큼이나 많구나.”

“형님…….”

축축이 젖어 가는 눈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내렸지만 니젠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가 곧 서둘러 일어나 자신의 해진 옷을 찢었다.

찌이이익.

“어서 닦으십시오. 형님.”

“나는 상관 말고 어서 받아라. 모두가 지켜보고 있지 않느냐.”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거대한 깃발.

평생을 탐해 왔던 금린사자기, 그런 왕국의 영광 앞에서 니젠은 자신의 모든 세월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거늘…….’

대체 그동안 자신은 무엇을 탐해 왔단 말인가.

텁.

니젠이 자신이 건넨 금린사자기를 받아 들자 카젠이 사홀의 용맹을 치켜들어 그의 어깨에 얹었다.

“나 카젠, 르마델의 기수가 몽델리아 산맥의 정령들 앞에 말하노니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은 모두 귀를 기울이라.”

충-!

“나 카젠은 아이올 성의 성주, 니젠 아이올 비셀 베른을 이번 원정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노니, 기수의 권위가 그의 금린사자기에 이어질 것이다.”

쿵-

쿠쿵-

사자전의 모든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하이베른가의 사자성(獅子城)이 거친 울음소리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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