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38화 (38/187)

<38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굳어져 버린 각 가문의 영주들.

허나 그런 그들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자 오르테가만은 차갑게 냉정을 유지하며 루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대봉신가.

하이베른가가 몽델리아 산맥에 터를 잡기 전부터 이 땅을 지배해 온 귀족들.

한데 대공자는 그 유서 깊은 권위와 명예를 단숨에 짓밟고 있었다.

니젠 아이올 비셀 베른.

그는 이미 가율로 단죄한 반역자였다.

오대봉신가의 가주들을 제치고 그런 죄인을 사령관에 임명한다는 것.

그것은 사자의 가문이 천 년 이상 지켜 온 강직한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였다.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

곧 오르테가의 굵직한 음성이 숨 막히는 적막을 뚫고 흘러나왔다.

“가주.”

어느새 저 멀리 솟아 있는 권좌를 응시하고 있는 오르테가.

“내가 아는 가주는 이렇게 술수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오.”

사자왕 카젠은 군림하는 자.

이런 뻔히 보이는 계책으로 가신들을 옭아매는 존재가 아니었다.

“술수라.”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 카젠.

저 오르테가가 사석에서나 할 법한 말투로 고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삼 십 년의 세월, 그런 자신의 공백이 절절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의 무엇이 그대에게 술수로 느껴졌단 말인가?”

“모든 것이오. 대공자로 하여금 이 포돔의 영주에게 굴욕감을 줬던 것. 대공자의 공표를 통해 가신들을 시험하려는 것 또한 그렇소.”

대공자가 자신의 무릎을 꿇리는 것을 보고도 카젠은 철저하게 방관했다.

더욱이 이번 반역 사건의 핵심 주동자를 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가율상 있을 수 없는 일.

그들과 사실상 협력 관계였던 오대봉신가의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가 너무 뻔했다.

“시험?”

“이건 너무 뻔히 보이는 술수가 아니오? 니젠 공이 사령관으로 추대되는 것을 옹호한다면 우리를 반역의 무리와 함께 엮을 것이오. 반대한다면 그 또한 대공의 권위를 부정한 반역자가 될 것이오. 이 오르테가는 이런 외통수에 당할 생각이 없소이다.”

이를 지켜보던 루인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회귀 후 처음이었다.

자신의 의도를 일부라도 읽을 수 있는 인간을 만난 것은.

봉신가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하이베른가의 권위를 각인시키려는 자신의 숨은 의도를 꿰뚫은 것이었다.

‘오르테가 공이라…….’

그는 르마델 왕국이 전란에 휩싸일 무렵 허무하게 전사했다.

그러므로 루인의 기억에서 포돔의 철혈, 오르테가 공의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처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오로지 오르테가의 반응에 즉흥적으로 기민하게 대응해야 했다.

“차라리 취조를 하시겠다면 내 기꺼이 응하겠소. 이런 건 사자의 방식이 아니외다.”

문득 루인을 응시하는 오르테가.

“이건 대공자에게도 너무 가혹한 일이지 않소?”

“가혹?”

카젠의 물음에 오르테가는 더욱 얼굴이 굳어졌다.

“대역죄인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소. 그것도 대공의 인장으로 말이오. 그는 이제 하이베른의 가율을 부정하고 번복했다는 불명예를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오. 자신의 아들을 버리는 패로 쓰는 것은 너무 잔인하오. 이건 정말 가주답지 않소.”

“하하하하!”

오르테가의 교활한 대응에 루인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실로 교묘한 언변.

사자전의 모든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베른의 명예를 부정한 대공자로 만든다.

게다가 마치 그런 자신을 아버지가 조종했다는 듯한 묘한 뉘앙스까지.

대공자를 가율의 권위도 모르는 병신으로 몰아가고, 가주는 아들의 명예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냉혈한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루인은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무식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가문의 기사들 중에서 처음으로 교활한 정치꾼을 만난 것.

지금 이 가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저런 교묘한 잔머리를 지닌 지략가였다.

루인은 마치 재롱을 부리는 손자를 보는 듯한 흡족한 얼굴이었으나, 막상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칼날에 다름이 아니었다.

“먼저 술수를 부렸던 건 그대다 오르테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대공자?”

“무리하게 동원한 병력, 효율을 무시한 화려한 무장, 수많은 시종.”

씨익.

“더욱이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위해 모인 자들이 감히 각자의 가문기를 손에 들고 있는 것까지. 그대들의 모든 행색과 행태가 본 가의 권위를 능멸하는 저급한 술수다.”

가신들의 의도를 꿰뚫는 지적이었으나 과연 루인이 예상했던 대로 오르테가는 흔들리지 않았다.

“가당치도 않소. 최고의 기사들과 무장으로 하이베른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봉신가의 헌신에 합당한 일. 가문의 깃발 또한 그런 우리의 신념을 나타내는 결의에 불과하오. 맹약을 수호하고자 하는 우리의 올곧은 마음을 오도하지 마시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꿀 발린 혓바닥을 놀려 대는 늙은이가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 거지?

그런 루인의 푸근한 미소에 오르테가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 찰나.

“그래. 그게 그대의 한계군.”

“내 한계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대열로 시선을 옮긴 루인.

“첫 번째, 그대의 술수는 명분을 벗어나지 않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빠져나갈 곳을 미리 만들어 두고 싶은 나약한 마음이지.”

“그게 무슨…….”

루인이 자칸가와 에올리타가의 깃발을 웃으며 바라본다.

“급한 소집령에 시간이 없었겠지. 결국 그대의 의지를 봉신가들에게 파발로 전했을 것이다.”

“…….”

“반역자들의 처단. 그런 베른가의 강력한 명분과 가율을 뛰어넘으려면 달라진 봉신가들의 힘을 과시할 수밖에 없다. 반드시 모두가 동참해야만 함께 살 수 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결코 지하 감옥에 갇힌 가문의 혈족들을 구할 길이 없다.”

“억측이오! 나는 결코……!”

루인이 오르테가가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그의 말을 잘랐다.

“한데 사자전에 도착해 대열에 합류하는 순간까지도 소뷔에르와 아를샤이어의 가문기가 보이지 않았지. 이상했을 거야. 분명 그들도 절박했을 텐데 말이지.”

루인의 시선이 종군의 복식을 한 기사들을 훑는다.

“결국 그대는 소뷔에르가와 아를샤이어가의 중추적인 기사들 몇몇을 발견했다. 그들이 종군(從軍)의 복식을 하고 있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거야. 이가 모두 빠져 사냥조차 할 수 없는 늙은 사자의 가문.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텐데 굳이 맹약에 얽매이다니. 그들이 한심했겠지.”

서광의 심판자, 오르테가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마치 자신의 본질이 꿰뚫린 듯한 그 더러운 기분에 오르테가는 참을 수 없는 열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그대의 한계를 모르겠나?”

오르테가는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그저 묵묵히 루인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이런 무력시위 따위가 아니라 그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사자성(獅子城)을 에워싸고 공성전에 임해야 했다. 사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면 적어도 늑대 정도는 되었어야지. 아무리 하이베른이 이 빠진 사자라지만 공작새 따위에게 먹힐 리가 없잖나?”

공작새.

화려한 날개를 펼쳐 자신의 몸집을 과장하는 동물.

하지만.

그래 봤자 사자의 눈에는 그냥 깃털이 조금 긴 새일 뿐이었다.

그런 위장술은 사자에겐 결코 통하지 않았다.

더없이 완벽한 루인의 비유에 멀리서 듣고 있던 데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오르테가 공.

오대봉신가들을 이끄는 실질적인 수장.

서광의 심판자라는 그의 이명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왕국의 자랑거리였다.

한데 형은 그런 엄청난 기사를 단지 언변만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 무지막지한 언변에는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런 나약한 각오로는 가족을 구할 수 없다네 오르테가.”

왠지 흐뭇하게 웃고 있는 듯한 루인의 미소를 바라보며 오르테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 마음을 악착같이 참아 내는 오르테가.

곧 그의 악다문 잇새에서 신음 비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공자는 참으로 상상력이 풍부하시구려.”

“글쎄. 그저 내 상상이라기엔 그대의 눈빛에 담긴 욕망이 너무 번들거려서.”

“욕망이라니 그건 또 무슨!”

씨익.

“반역자들이 처단되었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엔 반드시 커다란 권력의 공백이 피어나지. 그대 같은 자가 그걸 참는다고? 개소리.”

루인이 더없이 단호하게, 마치 선언하듯 오르테가를 직시하며 말했다.

“본 가와 협상하여 죄인들의 석방을 타결했다면 모든 일을 설계하고 추진한 그대의 입지는 더욱 강력해질 터. 오대봉신가의 후원을 등에 업은 그 힘으로 죄인 소에느의 공백을 차지하려 들겠지.”

부들부들.

루인은 연신 몸을 떨고 있는 오르테가가 마음에 들어서 견딜 수 없었다.

틀림없는 원석.

조금만 다듬으면 반드시 가문에 도움이 될 자.

‘시, 실로 무서운!’

‘저 어린 나이에 어찌 저런 엄청난 심계를……?’

어렴풋이 들려오는 대공자와 오르테가 공의 언쟁을 멀리서 듣고 있던 봉신가의 가주들.

그들은 핼쑥해진 얼굴로 그저 멍하니 루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주고받은 서찰을 보기라도 한 듯 모든 일을 알고 있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이제 막 성년이 지난 소년.

하지만 그런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에는 마치 왕궁에서 구를 대로 구른 정치인보다도 더한 노련함이 묻어 나왔다.

대공자의 추론이 두려울 정도로 치밀해서 도저히 그 나이를 믿기가 힘든 것이었다.

대공자의 음성이 또다시 차갑게 울려 퍼졌다.

“지금쯤 그대의 머릿속을 강렬하게 지배하는 의문은 단 하나일 거다. 예로부터 르데오의 봉화는 충직한 가문. 소뷔에르가가 그대의 응답에 화답하지 않은 것은 인정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야를샤이어가는 다르지.”

루인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자 아를샤이어가의 가주, 커틀라스 공은 더욱 허리를 숙여 극진한 예법을 표했다.

“비스문트의 율령. 냉철한 커틀라스 공. 확신이 없다면 결코 함부로 대세를 판단하지 않는 그가 대체 하이베른가의 무엇을 보았길래 저리도 몸을 숙인단 말인가.”

불안하게 떨리는 오르테가의 눈빛.

“그대의 두 번째 실수는 이 루인, 대공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는 것.”

심장을 조여 오는 듯한 대공자의 냉랭한 목소리에 오르테가는 처절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른가의 대공자, 카젠의 아들이 이토록 영민하고 교활한 천재인 줄 알았다면 모든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수립했을 터.

그때.

쿠구구구구구-

사자전의 바닥을 울려오는 나직한 진동.

점차 그 진동은 사자전을 모두 집어삼킨 후 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스피리츄얼 파워(Spiritual Power), 혹은 사자의 혼(魂)이라 불리는 고유한 투기의 파장.

순수한 투기만으로 물질계를 압도하는 그 경지는 이 거대한 성을 지배하는 왕(王)만이 가능한 것.

사자왕의 투기, 그의 압도적인 포효는 기사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었다.

오르테가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려 몽델리아 산맥의 지배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가 붉은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심장이 옥죄어 드는 것만 같은 심정.

반개한 눈으로 대열을 오시하고 있는 사자왕.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루인의 서슬 푸른 목소리.

“오르테가 공.”

무릎을 꿇은 채로 카젠에게 대공의 인장을 바치는 루인.

곧 그의 입매가 소름 돋게 뒤틀린다.

“사냥을 시작한 사자는 더 이상 포악함을 숨기지 않아. 사냥의 시작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그대의 세 번째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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