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하이베른가를 상징하는 청동 사자상.
그런 사자상만큼이나 거대한 기수의 권좌.
왕국의 기수 카젠.
그가 육중한 금린사자기를 거머쥔 채 기사들을 오연히 굽어보고 있었다.
강철 갑주와 붉은 휘장, 사홀의 용맹으로 중무장한 하이베른가의 사자왕.
과거의 권위를 모두 회복한 그의 모습에 봉신가와 방계의 기사들이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데인.
‘형님……?’
권좌의 오른편.
청동 사자상을 매만지고 있는 루인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 형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데인은 알 수 없었다.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웃고 있다니.
그런 형이 천천히 걸어와 어느덧 자신의 곁에 섰다.
조용히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꽤 괜찮구나.”
데인이 형의 시선을 좇아 봉신가들과 방계들을 응시한다.
하지만 형이 무엇을 기꺼워하는지 끝내 읽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충성인지 시위인지 모를 강렬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각자의 가문기를 손에 들고 시종들을 거느린 채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온갖 치장으로 화려한 전마들.
최고의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
아버지도 분명 저들의 선명한 의도를 느꼈기에 침묵하고 계실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형님? 무슨…….”
루인이 봉신가들을 훑었다.
“깃발 두 개가 비지 않느냐.”
잠시 가문의 대열을 훑어보던 데인이 그제야 알아차린 듯 탄성을 터뜨렸다.
“아!”
봉화(烽火)와 법전(法典)을 상징하는 깃발이 없다.
르데오의 봉화, 소뷔에르가.
비스문트의 율령, 아를샤이어가.
오대봉신가(五大封臣家)들 중 둘의 깃발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기 기사 브리제가 있구나.”
이제는 외팔이가 된 기사, 브리제 소뷔에르.
커다란 검을 등에 인 채 말고삐를 쥐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데인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브리제 삼촌?”
처음에 데인은 그가 말을 몰고 온 종자인 줄 알았다.
그는 무장이랄 것도 없었다.
그에겐 수의처럼 하얗게 바래진 튜닉 한 벌이 다였다.
“저자는 베울하든 경.”
베울하든 경도 마찬가지.
폭풍 수호자라는 이명이 무색할 만큼, 그 역시 낡고 바래진 종군(從軍)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데인이 집결한 기사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결국 그도 시종처럼 보이던 자들 중에 쟁쟁한 기사들이 숨어 있음을 파악했다.
“저들은 가문의 깃발을 내세우지 않았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흩어져 대열에 속한 것이다.”
다시 동생을 바라보는 루인.
“저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혈족대연회를 경험한 기사들입니다.”
“그렇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하 감옥에 갇히지 않고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즉 비교적 죄가 가벼웠던 기사들이지.”
그제야 데인은 왜 두 가문이 종군의 복식으로 대열에 합류했는지를 이해했다.
“적어도 두 가문은 아버지의 건재함을 전해 들은 것이군요.”
“그래. 정보의 격차 때문에 일어난 진풍경이지. 서광의 심판자라 불리는 오르테가 공이 저렇게 눈알을 굴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귀한 풍경이구나.”
루인의 말대로 포돔의 철혈, 가스토가를 이끌고 있는 가주 오르테가 공은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당황한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역시 왕국의 기수, 사자왕의 이명은 대단하구나.”
십 년은 긴 시간.
그럼에도 저들은 사자왕의 권위를 잊지 못했다.
뼛속까지 새겨진 공포, 자신들의 의식을 거머쥐고 있던 지배자의 권능 앞에 그들은 다시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데인은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봉신가들 중 일부라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주인이 약해졌다는 것.
고작 그것이 천 년 이상 이어진 봉신가의 맹약을 저버릴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저들은 감히 자신들의 주인 하이베른가를 상대로 발톱을 드러냈다.
데인의 표정에서 강렬한 적개심을 읽은 루인이 그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저들을 단지 주인을 따르게 만들고 싶은 것이냐?”
“예?”
“개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싱긋 웃어 보이는 루인.
“저들에게 개의 길을 강요하지 마라. 데인.”
데인이 그렇게 웃다가 멀어지는 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저벅.
워낙 고요한 탓에 대공자의 발소리는 크게 들렸다.
사자상을 넓게 돌아 권좌 앞에 다가서는 대공자 루인.
그를 알아본 몇몇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갑주에 부딪혀 소리로 경례를 해 왔다.
루인이 사자전(獅子殿)을 가득 메운 기사들의 대열을 한 차례 훑더니 권좌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이제 모두 도착한 것 같습니다. 만찬을 베풀어 격려하면 좋겠지만 출정이 급한 만큼 서둘러 편제를 나누시고 사령관을 임명하시지요.”
시선을 내리깔며 무심하게 루인을 쳐다보는 카젠.
그가 곧 슬며시 입가를 말아 올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루인이 다짜고짜 사령관부터 임명하자는 제안을 해 올 땐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
분명 저 음흉한 아들에게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이다.
“대공자는 가까이 오라.”
루인이 붉은 계단을 올라와 기사들의 시야를 가렸을 때 카젠의 입술이 더욱 기이하게 비틀렸다.
곧 그의 굵은 중지에서 커다란 반지가 떨어져 나왔다.
“대공(大公)의 인장을 대공자에게 잠시 위임하겠다. 대공자는 소신껏 기사단을 편제하고 사령관을 임명하라.”
웅성웅성.
한순간에 군기가 흐트러질 정도로 동요하는 기사들.
모든 봉신가와 방계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껏 권위를 드러낸 왕국의 기수가 갑자기 가주의 권한을 위임한다?
개중에는 대공자를 처음 보는 기사들도 있었다.
안 좋은 소문으로만 들어 왔던 이름뿐인 대공자.
그런 허수아비 대공자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그들의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대공자는 아무런 위업도 권위도 없는 존재였다.
얼굴을 와락 구긴 루인.
곧 그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아버지처럼 입매를 비틀었다.
“후회하실 텐데요.”
“가주란 자가 언제까지고 대공자에게 놀아날 수는 없지 않느냐?”
루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계획했던 그림을 갑작스럽게 틀어 버린 아버지.
아버지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가문의 모두에게 큰아들을 내보이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도 달라진 대공자를 가문에 납득 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인정해 마지않는 대공자로 못 박고 싶은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결국 루인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공의 인장을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순간 깜짝 놀라며 의자를 움켜쥐는 카젠.
대공의 인을 취하자마자 루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 상상할 수 없는 권위가 내려앉는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서 버릴 정도로.
천 년 대공가, 그 무거운 권좌를 순식간에 짊어진 것이다.
그런 루인이 어느덧 대열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주를 걸치지 않은 기사들은 모두 앞으로 나오라.”
서슬 푸른 목소리, 그야말로 압도적인 시선이 자신들을 훑어 온다.
종군의 복식을 한 기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서며 부복했다.
“충! 하이베른가에 영광을!”
“명을 받듭니다!”
그들은 기사의 신념을 파고들던 대공자의 칼날 같은 논리와 정의를 기억하고 있었다.
혈족대연회를 압도하던 대공자의 모습.
기사로서의 수모, 그런 부끄러움은 어쩌면 그들에게 피의 숙청보다 더한 절망이었다.
“기사 브리제.”
루인의 호명을 받은 브리제가 몸을 낮추며 예를 표했다.
“브리제, 하명을 기다립니다.”
“누가 그대에게 개죽음을 허락한 것인가.”
해부할 듯이 조여 오는 루인의 시선.
브리제는 루인의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계속 허리만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이베른은 그대에게 죽음을 종용한 바 없다.”
“그 말씀은…….”
그제야 깨달은 듯 경악하는 브리제.
“이 브리제에게 전투를 허락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이베른가는 결코 살가운 검가가 아니었다.
반역을 꾀했던 자신이 다시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보지 않았다.
그렇게 기사로서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해 온 브리제에게 루인의 말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이베른가는 나약한 기사에게 소집을 명하진 않는다. 그대들에게 베른가의 무구 창고를 개방할 것이며 그대들은 출정 전에 충분한 무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반역자였던 자신들.
허드렛일이나 하며 전장을 지원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다시 전장을 누빌 수 있다니!
브리제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제…… 제가…… 아직 기사란 말입니까?”
“그대가 등에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부들부들.
“검……입니다.”
“그래 검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이내 피식 웃는 루인.
“설마 팔이 하나가 됐다고 해서 붉은 눈의 기사, 전장의 사신으로 불리는 자가 나약해진 건 아니겠지?”
어느덧 브리제의 붉은 눈이 강렬한 기사의 의지로 타올랐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명하신다면 상대가 신들이라고 해도 모조리 베어 넘기겠습니다.”
“훌륭하다. 전장에서 그대의 검은 또 한 번 나아갈 것이다.”
대공자의 그 말에 브리제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혹시 그것마저 잊어버렸나? 정신이 함께 성장하지 않는 기사의 검이란 결국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가슴속에 알알이 박혀 있던 대공자의 목소리.
그랬던 그가 이제 자신의 검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있다.
어떤 축원보다도 가슴을 적셔 오는 그의 음성.
자신을 일깨워 준 그 고마운 감정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 오른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휙.
허나 이미 저만치 멀어진 대공자의 뒷모습.
어느덧 루인은 값비싼 갑주와 보검으로 중무장한 채, 가문의 깃발을 손에 들고 있는 오르테가 공에게 도착해 있었다.
“포돔의 철혈영주 오르테가 공.”
오르테가가 한껏 부드럽게 웃으며 루인을 바라봤다.
“실로 오랜만에 뵈는군요 대공자님. 그 옛날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신 것을 이 오르테가는…….”
“꿇어라.”
“예……?”
멍해진 오르테가.
아무리 맹약에 따라 종속 관계로 묶여 있다 한들, 사석에서는 저 사자왕조차 자신에게 공대(恭待)를 한다.
또한 하이베른가의 위계 체계상, 오대봉신가의 가주는 대공자와 동격.
게다가 아무런 위업도 명성도 없는 대공자와는 달리 자신은 전장에서 명성을 떨쳐 온 세월만 사십 년이었다.
서광의 심판자라는 이명으로 왕국에 명성이 자자한 자신에게 감히 무릎을 꿇으라니!
오르테가의 기억 속에 있는 대공자는 그저 작고 병약한 아이일 뿐이었다.
지금 그런 핏덩이가 자신의 명예를 짓밟으려는 것이다.
“허허, 이거야 원 다짜고짜 꿇으라니. 대공자께서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대공자?”
루인이 무저갱 같은 눈으로 대공의 인장을 드러냈다.
“다시 말해 보라. 대공자?”
오르테가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
한시적이지만 대공의 인장을 취한 이상, 지금의 대공자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이다.
“본 가의 가율 어디에 감히 대공을 내려다볼 수 있는 권한이 적혀 있는가.”
결국 오르테가는 진득하게 입술을 깨물며 무릎을 꿇었다.
이어 검을 양손에 들어 기사의 예로 바치는 오르테가.
“포돔의 영주 오르테가. 하이베른가의 대공을 뵙습니다.”
루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그대의 가스토가에게 무례를 물을 수 있으나 첫 만남이니 자비를 베풀겠다.”
이윽고 가스토가의 기사들을 훑어보는 루인.
“또한 하이베른가가 명한 것보다 훨씬 많은 물자와 병력으로 소집에 응했으니 가스토가의 충성심을 높이 산다. 가스토가의 기사들을 빠짐없이 편제하여 그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예……?”
오르테가는 이 많은 가문의 기사들을 모두 전장으로 내몰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가스토가의 건재함, 십 년 동안 달라진 가문의 위상을 통해 하이베른가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생사도 알 수 없는 큰아들의 석방을 반드시 얻어 내야만 다음을 얘기할 수 있다.
한데 그 모든 협상 과정을 건너뛰고는 가스토가의 기사 전력 전부를 편제에 넣겠다니?
당황한 오르테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저만치 나아간 대공자.
그가 곧 다시 대열을 훑으며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고 있었다.
“편제에 앞서 사령관을 임명하겠다.”
모두의 머릿속에 오대봉신가의 가주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면 이 엄청난 병력을 하나로 이끌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그러나.
“니젠 아이올 비셀 베른. 지하 감옥에 있는 그를 이곳으로 데려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데인.
카젠의 왼편에 서 있던 친위 기사 유카인.
왕국의 기수 카젠까지.
사자전의 모두가 경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