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유폐지로 돌아온 루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마법사인 이상 갑자기 맞닥뜨린 변수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것도 사소한 변수가 아닌, 자신의 정신 체계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큰 ‘사념의 침범’이라니.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런 엄청난 위험성을 감당할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도 있다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득한 전설과는 달리 자신의 시조에게서 관찰되는 것은 오직 자아의 혼란뿐이었다.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그저 온갖 기억으로 뒤죽박죽된 사념의 편린들.
그런 파편 같은 선조의 사념에서 유산을 바란다는 것은 차라리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그의 검술이라도 가문에 전달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싸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으아아아! 젠장! 빌어먹을!
또 하나의 부작용은 쟈이로벨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충격.
견딜 수 없다는 듯, 쉴 새 없이 비명과 욕설을 내뱉고 있는 쟈이로벨 때문에 루인은 머리가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그만 좀 해. 벌어진 일을 이제 와서 어쩔 거야.”
-으으으으! 넌 이 빌어먹을 놈이 내게 무슨 짓을 한지 제대로 알긴 아는 것이냐?
“궁금하지도 않아.”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사홀의 사념이 별다른 반응 없이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
루인은 최대한 그가 오래 잠들어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계획을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때, 데인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날카롭게 신경이 서 있던 루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형제라 하나 엄연히 가문의 예법이 있다. 매번 이렇게 날 놀라게 할 작정이냐?”
루인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시종에게 알리지도 않고 대뜸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가주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행동.
하지만 데인은 가문의 예법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형님의 뜻입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냐?”
데인이 차가운 얼굴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밖으로 드러난 풍경.
기사와 군마들, 그리고 깃발들이 끝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영지 전쟁 말입니다.”
대답 없이 창밖의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는 루인.
최정예 기사들과 가문의 방계들, 그리고 하이베른가의 가신 집단, 봉신가(封臣家)들이 위세를 드리우며 가문으로 입성하고 있었다.
리타의 파수꾼 자칸가(家).
포돔의 철혈 가스토가(家).
보리스의 수호자 에올리타가(家).
그 옛날의 가언과 맹약에 따라 베른가를 향해 충성을 맹세한 가문들.
하지만 공작령 아래 속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왕국의 쟁쟁한 이름에 속할 수 있는 가문들이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 저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오직 가주의 인장뿐이다.”
형의 말에 진득하게 입술을 깨무는 데인.
형이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바보 취급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하이베른가의 천 년 역사.
단 한 번도 영지전을 벌여 본 적이 없는 옹골찬 신념의 가문.
그런 베른가의 가주가 영지전을 각오할 리가 없다.
아버지의 가주인을 움직인 힘은 분명 자신의 형, 대공자의 의지다.
“절 바보로 여기십니까. 형님의 뜻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루인의 입매가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날이 갈수록 가파르게 성장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네 생각도 아버지와 같은 것이냐?”
“영지전은 곧 왕국의 내전. 왕명 없이 본 가의 힘을 함부로 투사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하이베른가의 기사다운 그의 대답.
아버지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동생을 루인은 굳이 어리석다 힐난하지 않았다.
그에게 베른가의 신념은 당연한 것이고 또 그것이 자신과는 다른 그의 길.
루인은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데인에게도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다리오네가가 처한 상황.
파네옴 광산에 얽힌 이권의 공백.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세헬가의 계획.
그런 세헬가를 암중으로 조종하는 가문의 정체까지.
단편적인 정보들을 조합하고 추론하여 결론에 이르는 그 모든 자신의 생각을 아버지에게 했던 것보다 더욱 상세하게 설명했다.
“…….”
데인이 멍하니 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과연 인간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인 건가?
간단한 설명만 한 번 들었을 뿐인데 렌시아 놈들을 향한 적의로 들끓는다.
영지전은 필연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속도’.
1왕자가 왕성에 입궁하는 순간 왕실의 의지를 대리한다는 베른가의 명분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상대는 그만큼 치밀했으며 권력 또한 드높았다.
문득 데인은 전율이 일어났다.
“설마 이 모든 걸 처음부터 계획한 겁니까?”
자신의 형은 가주의 권한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1왕자와의 협상에 임했다.
그를 통해 얻은 왕실의 재가.
그 협상 결과가 없었더라면 영지전은 반드시 피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베른가는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은 상태.
분명 형은 1왕자를 만나기 전부터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아는 형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할 위인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
“아…….”
솔직담백한 형의 대답에 데인은 질문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형의 지혜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아득해지기만 했다.
멍한 얼굴로 굳어져 버린 동생을 향해 루인이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흘렸다.
“매일매일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가능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사기꾼이지.”
데인을 바라보는 루인의 눈빛은 어느덧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계절을 예측하여 경작을 한다. 달라진 습도, 강수량의 변화, 방향을 바꾼 바람, 대지의 냄새…… 그 모든 정보로 계절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동생이 자신의 말에 놀랍도록 집중하자 루인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이상하지 않느냐? 그날의 날씨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이 계절을 예측한다?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가 뛰는 격이지. 학문적인 인과만을 따진다면 농담같이 들릴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아.”
루인의 두 눈.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혜안, 형의 그런 아득함에 데인은 끝없이 빠져드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습도가 달라졌다. 축축하군. 바람이 북풍으로 바뀌었다. 옷을 두껍게 입어야겠군. 흙냄새가 진해졌다. 어제 비가 왔겠군.”
“…….”
“이렇듯 정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가치가 별로 없지. 하지만 이 모든 걸 귀납한다면?”
데인이 눈을 반짝인다.
“귀납(歸納)이요?”
“그래 데인. 이 모든 정보들을 멀리서, 보다 깊게 관찰하고 끈질기게 추적하여 거시적인 현상, 즉 실체를 유도한다. 그것이 계절을 예측할 수 있는 힘, 귀납의 지혜다.”
“아……!”
루인의 두 눈이 저 멀리 성곽 너머 푸르른 영지를 훑고 있었다.
“귀납의 지혜로 인간들이 한 일들을 보아라. 경작을 하여 부(富)를 일구었다. 그 부는 가문으로 왕국으로 이어져 역사에 존재해 온 어떤 종족도 꿈꾸지 못했던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다. 그것이 인간이 지닌 무서운 힘, 지혜다.”
데인은 형의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해하고 있었다.
사람임이 의심되던 형의 아득한 지혜.
한데 그런 현명함이 한낱 계절을 가늠하는 농부의 감각과 동일한 것이라니.
“아직도 어려운 것이냐?”
형의 웃음 섞인 질문에 데인이 서둘러 허탈한 감정을 지워 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니요. 오히려 너무 간결해서 더 복잡해지는 느낌입니다.”
씨익.
“그것이 앎의 속성, 지혜란 놈의 마성(魔性)이지. 알지 못할 때는 안개를 헤매는 것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정작 알게 되면 너무 간단하여 왜 이걸 몰랐을까 싶거든.”
문득 루인이 창밖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다시 데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배웠으니 써먹어야지. 너는 저기 물밀듯이 밀려오는 방계와 봉신가들의 행렬을 보고 어떤 귀납의 지혜를 발휘하겠느냐.”
형의 시선을 좇아 끈질기게 창밖을 살피는 데인.
하지만 그 풍경은 그저 기사들의 기다란 행렬일 뿐이었다.
대 하이베른가의 용맹한 봉신가들답게 깃발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입장하고 있는 기사들.
병참을 옮기느라 정신없는 하인들과 간간히 들려오는 기합 소리, 절도 있는 경례, 병장기들의 마찰음.
아무리 살펴봐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저 출정을 준비하는 평범한 기사들의 광경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또 가늠하라는 건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도 형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하. 녀석.”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입을 열지 못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예상이라도 한 듯 미소 짓는 루인.
“저들의 말을 봐라. 최고로 날랜 전마들이다. 무구들 역시 모두 새 가죽으로 덧대어 빠짐없이 기름칠을 했구나. 병장기들도 모두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출정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은 기사의 기본.
데인은 도대체 그것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형님. 출정에 앞서 무구와 말, 병기를 다듬는 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루인의 투명한 눈빛이 그들의 펄럭이고 있는 깃발을 향했다.
“그래 데인. 네 말대로 기사의 본분으로 끝냈어야 했다. 허나 저들은 굳이 각자의 가문기(家門旗)를 깃대에 걸었다. 자신들의 가언을 덕지덕지 새겨 넣은 예복을 입고, 필요 이상의 종자들을 데려왔다. 굳이 베른가가 요구한 병력보다 더 많이, 더 화려하게 자신들을 드높였다.”
데인의 시선이 형의 날카로운 표정을 훑었다.
입매에 걸린 비틀린 미소, 읽을 수 없는 형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거렸으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저들은 하이베른가의 봉신가입니다. 가문의 위세를 떨칠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을 흠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습니까?”
“평소라면 상관없겠지.”
“예?”
순간, 루인의 얼굴에 스산한 감정이 스친다.
“문제는 바로 저들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지금 지하 감옥에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데인은 형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느덧 루인처럼 차갑게 변하고 있었다.
“가문은 배덕자들을 단죄했다. 한데 저들은 근신하기는커녕 위세를 드높이고 있구나. 가문의 자비에 감사하지도 허리를 숙이지도 않고 있다. 지금 저들의 행동이 뭐라고 생각되느냐.”
데인이 이를 깨문다.
“시위입니다.”
“그렇다. 힘을 잃은 너희들과는 달리 우리는 건재하다. 십 년 이상 우리가 쌓은 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야말로 우리가 주류.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아들들을 석방하라.”
터질 듯이 주먹을 말아 쥐는 데인.
삽시간에 타오른 그의 분노가 눈앞의 모든 봉신가들을 집어삼킬 듯 거대해졌다.
한데 루인, 그가 피식 웃으며 동생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넌 화낼 자격이 없다. 저들의 괘씸한 생각을 읽지도 못하지 않았느냐.”
툭툭.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멀어져 가는 루인.
“지금의 분노는 내 것이다 데인.”
저벅저벅.
멀어져 가는 등, 참으로 거대하게 느껴지는 형의 뒷모습에 데인은 헛웃음이 나왔다.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의 지혜를 흉내 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은 차가운 북풍 앞에서 옷을 여밀 뿐이다.
잦은 비에 몸을 추스를 뿐이다.
그런 현상들이 계절의 변화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가장 중요한 ‘안목’이 자신에겐 없었다.
“제길.”
데인이 죽어라 입술을 깨물며 형의 뒤를 밟았다.
더욱 바짝 붙어 그의 모든 것을 배워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