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감옥을 빠져나와 다시 지하 미로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
루인의 뇌리에서 쟈이로벨의 다급한 영언이 울려 퍼졌다.
-잠깐! 기다려라!
순간 발길을 멈추는 루인.
당혹감마저 느껴지는 그의 반응에서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
쟈이로벨은 웬만한 일로는 결코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말해 봐 쟈이로벨.”
-저기 아득히 깊숙한 곳. 미약하지만 이질적인 영혼이 느껴진다.
“이질적인 영혼?”
쟈이로벨이 이런 모호한 표현을 쓸 때는 그 대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
그렇다면 최소한 인간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영혼의 격(格)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모른다. 끝없이 모호하고 이질적이다. 이건 마치 존재해선 안 될…… 혹시 이건 착각인가?
루인은 그런 쟈이로벨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쟈이로벨은 고고한 자의식이 하늘에 닿아 있는 마신.
그런 존재가 자신의 판단을 착각이라 말할 정도라니.
녀석의 엄청난 지식과 경험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
“음…….”
마신조차 살필 수 없는 영혼의 기질이라.
이건 거창하게 대마도사로서의 마인딩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지하 감옥에 얽힌 역사, 일의 전후를 살핀다면 경우의 수는 단 하나.
루인은 떠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선조들께서 허탈하시겠군.”
대공국의 역량을 모두 동원하고도 끝내 찾지 못한 시조의 유산.
자신은 지금 그런 엄청난 유산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었다.
“거리는?”
-아직은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방향은 저쪽이다.
쟈이로벨의 의지가 가리키고 있는 곳.
그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 끝도 없이 이어진 미로의 초입이었다.
우우우웅-
루인의 주위로 핏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망설임 없이 생명력을 치환해 마신의 역량, 혈주마공을 일으킨 것이다.
-네놈! 또 그 짓을?
아랑곳하지 않고 미로로 진입하는 루인.
지금은 수명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혈주마공으로 잃은 생명력은 전생의 경지를 회복하면 대부분 상쇄된다.
초인을 초월하는 순간 수명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때문.
지금으로선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과거의 경지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베른의 시조 ‘사홀’의 유산이 확실하다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과 가문에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스스스스스-
루인의 신체가 핏빛 아지랑이와 함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허공을 부유하는 유령처럼 부드럽게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 속도란 가공 그 자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물 흐르듯 나아가는 그의 모습에 쟈이로벨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능숙함이 자신 못지않았기 때문.
-왼쪽에서 세 번째.
-오른쪽에서 두 번째.
-첫 번째 미로다.
수도 없이 나타나는 갈림길.
거꾸로 지상으로 나가려면 지나온 모든 길을 외워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루인은 머릿속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아직도 멀었어?”
-남은 거리의 절반도 이르지 않았다.
대마도사의 뛰어난 의식 체계로도 더 이상은 연산이 힘들 정도.
애초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지하 미로를 모두 외우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루인은 혈주마공의 운용을 포기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암기가 힘들었기에 표식을 새기며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화르르르르르-
허공에 소환된 마나홀.
아직은 체계가 없어 마법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마나에 담긴 독특한 잔향, 마력흔(魔力痕)을 남길 정도는 충분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언제부턴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루인은 자신의 인지 체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희박한 공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루인은 한계에 이른 자신의 호흡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허억! 허억! 미친!”
공기가 희박해질 정도의 깊이까지 이어진 미로라니!
지하 미로의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거대했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
이대로 계속 나아간다면 자신의 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안 돼. 포기다.’
아직 쟈이로벨은 진마력을 회복 중인 상태.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여기서 끝장이었다.
어떻게 얻은 삶인데 고작 시조의 유산 하나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루인!
‘말해.’
루인은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았다.
최대한 호흡을 아껴야만 하는 상황.
말을 하는 것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그것이 오고 있다! 미로의 지형을 모두 무시하며 직선으로 오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속도! 위험……!
지형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오고 있다고?
루인이 경악하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아무런 소음도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넌 뭐야?>
찢어질 듯이 떠진 루인의 두 눈이 전방을 응시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말을 건넨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리적인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타오르고 있는 마나홀로 아무리 사방을 비춰 봐도 도저히 상대의 정체를 살필 수가 없었다.
<……인간이야? 하지만 인간이라기엔 너무 복잡한데?>
이건 영언도 아니다.
의식을 가르고 침범해 오는 어떤 ‘의지.’
순간 쟈이로벨이 경악했다.
-영혼이 아니라고?
나타난 상대에겐 영혼의 기질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이라면 반드시 고유의 울림, 향이 존재했다.
-루인! 이것은!
‘알아. 사념(思念)이다.’
루인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인식계(認識界)에 사념을 남길 수 있는 힘.
초인을 초월했던 자신조차 닿지 못한 미증유의 경지.
대마도사 루인이 결코 도달해 보지 못한 이 아득한 형태는 과거의 ‘그’가 자신을 자주 조롱하던 방식이었다.
하나 ‘그’는 아니었다.
의식을 침범해 오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형태의 악의도 없음을.
느껴지는 것은 오직 순수한 호기심 그 자체였다.
<영혼이 둘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 ‘존재’들 중 하나야?>
놀람은 루인 쪽이 더했다.
마신 쟈이로벨이 영혼이라 착각할 정도로 강력한 사념이라면 본체의 경지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기 때문.
<아니야? 하긴 네가 ‘존재’라면 이렇게 약할 리가 없어. 하지만 참 특이해. 이렇게 쓸쓸하고 슬픈 느낌이라니. 말해 봐.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마계 냄새 잔뜩 풍기는 너 말고, 바로 너!>
그때.
스스스스스-
자줏빛 기운과 함께 쟈이로벨이 현신했다.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루인의 영혼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었다.
<우와! 너처럼 개같이 생긴 마족은 처음 봐! 이쪽 세계에서 이만한 존재감을 떨칠 정도면 꽤 수준이 높은 놈이겠네? 혹시 마왕? 그런데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알지? 너 그러다 ‘존재’들한테 들키면 맞아 죽는다?>
안 그래도 섬뜩한 쟈이로벨의 얼굴이 더욱 잔혹하게 구겨진다.
<찌, 찢어 죽일!>
쟈이로벨은 자신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는 상대의 말투를 통해 확신하고 있었다.
묘하게 성질을 긁어 오는 저 가벼움.
찢어발기고 싶은 저 이죽거림.
<확실하구나! 네놈!>
쟈이로벨이 치를 떨며 두리번거렸다.
<네놈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 개같은 드래곤 놈은 어디 있느냐? 오늘 내 본체를 소환해서라도 네놈들을 갈아 마실 것이다!>
드디어 루인은 사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고고한 마신에게 치욕을 안긴 최초의 인간.
쟈이로벨로 하여금 베른가에 숨어들어 후손을 괴롭히도록 만든 진정한 원흉.
최초의 사자(獅子).
인류 역사상 가장 강했던 기사(Knight).
‘존재’들의 위상에 근접했던 자.
사홀 르마델 비셰리스마 베른.
다름 아닌 그 위대한 기사의 사념인 것이었다.
<나를 알아? 그런데 드래곤이 뭐지? 또 어째서 화를 내는 거야? 다 널 위해 해 준 말인데.>
<크하하하하! 바보 흉내를 낸다고 살 수 있을 성싶으냐? 사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네놈의 육체와 영혼을 찾는 것쯤은 이 마신에겐 식후 소일거리……!>
흉포한 쟈이로벨의 웃음이 순식간에 멎었다.
<뭐, 뭐야! 네놈은 이미!>
사념과 이어진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죽었다고?>
쟈이로벨은 사홀이 죽는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수명은 놈에겐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다.
놈은 ‘존재’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 엄청난 경지를 이룩한 인간.
루인이 말하고 있는 과거의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한 인간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는 바로 사홀이었다.
베른가를 괴롭혀 온 이유 역시 언젠가는 그가 후손들을 외면하지 않고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를 쟈이로벨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세계의 주시자이며 존재들의 비호를 받는 종족, 드래곤보다도 훨씬 강했으니까.
<……어떻게 사념이 유지될 수가 있지?>
사홀이 죽었다는 충격보다도 더 놀라운 것.
그것은 영혼이 사라진 존재의 사념이 소멸이 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쟈이로벨의 어떤 지식과 경험으로도 눈앞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놈의 사념 사념! 도대체 사념이 뭐야? 난 그냥 비셰리스마를 찾고 싶을 뿐이라구! 음? 그런데 비셰리스마는 누구였지? 아! 너무 어지러워! 자고 싶어!>
루인의 진중한 눈빛.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사홀의 사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조차 모르고 있었고 기억은 더욱 뒤죽박죽인 듯 보였다.
‘사홀…….’
쟈이로벨이 이렇게 빨리 그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것은 저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이 생전의 성향이라는 뜻.
가문의 초상화.
세상을 뒤덮을 만큼의 강렬한 눈빛으로 고고하게 대지를 굽어보던 하이베른가의 위대한 시조.
아득한 전설로 가득한 그의 생애나 위상을 고려했을 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족! 넌 저리 가! 이제 그 불결한 얼굴은 꼴도 보기도 싫어! 난 이 아이와 친해지고 싶거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쟈이로벨.
하는 수 없이 그는 현신했던 강림체를 회수하며 루인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 되돌아갔다.
허탈하고 공허했는지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울지 마. 나까지 눈물이 나려고 한단 말이야. 넌 왜 그렇게 슬프기만 하니.>
인상을 찡그리는 루인.
사홀의 사념이 자신의 뭘 보고 저러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 지금 너무 잠이 오거든? 혹시 네게 몸을 뉘여도 될까? 너라면 편할 것 같아.>
본능적으로 섬찟함을 느낀 루인이 거칠게 소리쳤다.
“안 돼!”
<미안해.>
인간의 영혼엔 한계가 있었다.
쟈이로벨 하나만으로 벅찬 마당에 다른 의식까지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칫 정신이 붕괴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의식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가 않았다.
루인이 황급히 자신의 정신계를 점검하기 시작할 무렵.
-이, 이런 미친 새끼!
눈 깜짝할 사이에 루인의 정신에 뿌리처럼 자리 잡아 버린 사홀의 사념.
곧장 쟈이로벨이 피를 토하듯 절규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 도대체 너란 인간은 천 년이 지나서도 나한테 왜 이런단 말이냐!
사홀과 함께 지낸다는 것.
그것은 쟈이로벨에게 죽음의 고통과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형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