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대공자님. 아니 도련님.”
집사 아길레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
유모의 보살핌을 받던 시절에나 들었던 그의 다정한 목소리.
루인은 지하 감옥으로 향하던 발길을 멈추었다.
“오랜만이군. 자네의 그런 눈은.”
루인은 그 옛날의 아길레가 떠올라 반가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다급히 제지할 뿐이었다.
“……갑주를 걸치세요. 죄인 소에느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죄인들을 선동해 도련님께 위해를 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덤덤한 루인의 표정.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간 여자입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소에느와 삼촌 니젠을 가율대로 처결하지 않았다.
그들의 타락이란 결국 당신의 책임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청하여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는 것.
그건 휘하의 기사들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내비칠 수 있었다.
아길레의 염려가 무리는 아닌 것이다.
“아니야. 아길레.”
“네?”
위험천만한 상황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대공자는 분명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아길레는 희미한 루인의 미소를 끝내 해석하지 못했다.
‘소에느…….’
루인은 혈족대연회에서 보았던 소에느의 음울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왕국의 기수가 지닌 거대한 사자의 권위에 굴복했다.
또한 그런 그녀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던 것.
바로 오랜 세월 화초처럼 정성스럽게 가꾸었던 하이베른가의 아이들.
그런 그들이 자신의 통제 밖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희망을 완전하게 앗아 갔다.
니젠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구보다도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끝내 루인은 소에느의 마음을 이해하며 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후일을 위해 기사들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끝까지 책임지고 있다.
고통을 함께 나누려 하고 있다.
희망 없이 사라져 간 꿈, 다시는 기사의 명예를 꿈꿀 수 없는 그들의 절망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으려는 것이다. 외면한다면 베른가의 혈족으로 남아 안락함을 누릴 수 있음에도.
적어도 그녀의 마지막만큼은 ‘베른’다웠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그제야 루인은 왜 아버지가 저들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지 않는지를 이해했다.
함께 순장(殉葬)을 결심한 자들.
그런 끈질긴 결의로 뭉친 자들에게 다시 충성을 허락할 순 없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 아길레.”
철컥.
저벅저벅.
루인이 육중한 철문을 열어 재끼고는 새까만 지하 계단으로 사라져 갔다.
아길레가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가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자님…….”
* * *
사실 베른가의 성 아래 지하가 처음부터 감옥은 아니었다.
초대 가주 ‘사홀 르마델 비셰리스마 베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역 드래곤 비셰리스마와 함께 이곳에서 안식에 들었다고 전해졌다.
때문에 베른가의 후손들은 시조 사홀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성의 지하를 샅샅이 조사한 것이다.
하지만 발굴에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남은 것은 탐험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대하고 복잡한 미로뿐.
그런 쓸모없어진 미로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죄인들을 가두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정말 엄청나군.’
루인은 그 상상할 수도 없는 규모에 숙연해졌다.
온갖 방향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미로가 그야말로 아득하다.
시조의 유산을 갈망해 온 선조들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찬란했던 대공국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국가가 아니라면 이런 규모의 발굴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여기가 끝인가.’
미로의 곳곳을 밝히고 있던 횃불 대열이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
사방으로 뻗어 얽힌 미로들이 아직 시꺼멓게 많았지만 감옥으로 활용하는 건 미로의 초입까지가 전부였다.
그런 감옥의 끝자락에서, 대공자의 복식을 확인한 간수와 병사들이 자신을 향해 일제히 경례를 해 왔다.
“충!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충! 베른가에 경의를!”
어두컴컴한 감옥 전체가 인기척으로 부산해졌다.
정적을 깬 간수의 목소리가 죄인들의 귀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대공자 루인.
자신들의 계획을 철저하게 부순 원흉.
“죄인 소에느를 만나겠다.”
루인의 차가운 음성.
간수는 함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어떤 명령도 전달받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는 한없이 드높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대공자의 명령이십니까?”
루인이 한심하다는 듯 간수를 쳐다봤다.
“베른의 가율은 그녀에게 투옥(投獄)과 형기(刑期)를 결정한 바가 없다. 때문에 나의 요청은 사사로운 것. 두려워하지 말고 그녀에게 안내하라.”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죄인 소에느는 가문으로부터 형기를 부여받은 적이 없는 자, 즉 간수의 책임이 닿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
안도한 표정의 간수가 곧장 루인을 이끌고서 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대공자님.”
철컥, 쿵.
철문이 감옥의 벽면에 부딪히며 이내 어두컴컴한 내부가 드러났다.
소에느.
흔들리는 횃불에 의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얼굴.
마치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은 그녀 앞에서 비로소 루인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그녀는 더 이상 야망을 꿈꿀 수 없는 영혼이 되어 순순히 절망을 감내하고 있었다.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이내 루인을 응시했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까.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이곳 지하 감옥에는 극형으로 폐인이 된 자들도 있었으나 아직 투기를 잃지 않은 기사들도 수두룩하다.
그런 위험한 자들의 정적인 자가 단신으로 찾아오다니.
루인이 웃었다.
“뭐,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아 보이진 않는군.”
“능욕을 즐기나 보네. 대단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결국은 어린애인가.”
가늘게 좁힌 미간, 좀 더 또렷해진 눈빛으로 소에느도 마주 웃고 있었다.
“그래. 승자는 누릴 자격이 있으니까. 짓밟고 싶은 욕망을 굳이 참을 필요는 없겠지.”
소에느가 수의처럼 새하얀 상의를 벗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길이 위태롭게 걸쳐 있는 속옷으로 다가갈 때 루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 하자는 거지?”
“내 비명을 듣고 싶었으면 칼을 들고 왔어야 하지 않을까? 즐기려거든 제대로 준비했어야지.”
그녀는 웃고 있었으나 아버지처럼 감정이 비어 있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모 역시 더 이상 닳을 수도 없는 마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이 여인이 꿈꾸던 열망이 얼마나 거대했길래 이토록 스스로를 저주하게 되었단 말인가.
“……뭘 하고자 했지?”
“뭐?”
소에느의 두 눈에 의문이 번져 갈 무렵 루인의 냉랭한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만약 계획대로 모든 것을 이뤘다면, 그 후에는? 데인을 꼭두각시로 만들고서 무얼 하고자 했지?”
과거의 삶, 소에느가 죽기 직전에 했던 마지막 선택.
루인이 그런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까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알고 있었다.
이 여인이 모든 것을 이루고 난 후에 얼마나 피폐한 영혼으로 살았는지를.
내내 꿈꾸던 열망, 마침내 목적을 달성한 후에야 찾아온 공허.
그녀의 입은 쉼 없는 증오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지만 그 끝을 조여 오는 감정은 결국 그리움이던 것.
죽은 오빠를, 누구보다 거대했던 자신들의 사자왕을 소에느는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만으로 살아온 영혼.
그런 소에느의 갈망이 모두 채워졌을 때 그녀의 삶은 무가치해졌다.
그녀는 가문을 제대로 경영하지 못했다. 그저 견디며 살았을 뿐이었다.
막연하게 상상해 온 꿈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이후를 그녀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게 당신의 한계지. 죽도록 사자의 권력을 갈망했지만 정작 그 권력을 이용해 무슨 가치를 꿈꿀지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그래서 당신은 이 가문에 끔찍한 재앙이다.”
충격으로 굳어진 소에느.
“당신의 꿈은 그저 가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다였다. 무수한 기사들을 품어 왔던 그 엄청난 재능으로 고작 그런 걸 위해 달려온 것이지.”
소에느는 입을 열어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꿈은 사자의 권위, 하이베른가의 정점만이 다였다. 정말로 자신은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깨달음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루인의 차가운 눈빛 앞에서 모두 벌거벗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을 따랐던 수많은 기사들이 당신의 실체를 알았다면 어떤 기분일까. 과연 당신은 그들의 신념을 짊어진 주군으로서 합당한 베른인가.”
베른(Baron).
그 무거운 이름 앞에 결국 소에느는 주저앉고 말았다.
지난날이 모두 부정되는 듯한 그 처참한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흐느꼈다.
어째서 지금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었을까.
자신이 지나온 삶이란 한낱 오빠와 가문을 향한 어리광일 뿐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범벅이 된 소에느의 두 눈이 느릿하게 간수의 허리춤을 향한다.
간수의 날카로운 검.
자신의 이상(理想)이 무가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인간은 늘 그렇듯 스스로 죽음을 종용하기에.
루인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정말 끝까지 식상하군. 고작 그런 결말을 떠올리다니.”
소에느의 힘없는 얼굴이 루인을 올려다본다.
“가문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속죄나 참회 같은 식상한 것이 아니야.”
“…….”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표정의 소에느.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아가는 것이 베른의 신념. 과정이 미욱하든 결과가 초라하든 상관하지 않아. 기사의 기사도란 본래 완성의 개념이 아니지.”
“……기사?”
피식.
“결혼을 포기할 정도로 베른의 성을 버리지 못한 것은 그 마음에 기사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조금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베른가의 혈족 지위를 포기하기엔 자신의 야망이 너무 컸다.
분명 대공자도 자신이 지나온 야망의 세월을 모르지 않을 텐데 갑자기 왜 저런 말을 쏟아 내는 거지?
“진짜 속죄하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당신의 가치를 찾아.”
고작 비참한 자살 따위가 그녀의 마침표라면 아버지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증오를 삼키며 버텨 온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게 무가치하게 변하도록 루인은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대공자…….’
소에느는 붉어진 루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힘겹게 집어삼키고 있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녀는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대공자는 이 나를…… 이 소에느를…….”
“개소리하지 마. 난 당신을 용서한 적이 없어.”
어느새 돌아선 채로 어깨를 떨고 있는 루인.
“다만 배덕자들이라도 고쳐 써야 하는 이 상황이 엿같을 뿐이지.”
‘오빠……?’
소에느는 무심하고 차가운 루인의 목소리에서 문득 오래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대공자 카젠.
이제 보니 저 뒷모습, 저 목소리는 그 옛날 자신의 오빠와 참으로 많이 닮아 있었다.
‘이 두 손으로…….’
벌벌 떨리는 손.
자신은 그런 오빠의 가장 소중한 여자를 직접 죽였다.
소에느의 처연한 목소리, 끓는 듯한 그녀의 참회가 마침내 터져 나왔다.
“루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이 나는…….”
루인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진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끝내 증오가 흘러나오진 않았다.
회귀 후, 그가 겪는 중요한 내적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