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루인의 지난 생.
쟈이로벨과의 계약을 마치고 가문을 나왔을 당시 다리오네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세헬가.
새롭게 파네옴 광산 일대를 장악하고 수많은 유랑민을 받아들여 더욱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한 가문.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왕국의 기수가인 하이베른가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의 세헬가는 완벽한 하이렌시아가의 전초 기지.
왕국의 동북부 상권을 팔 할 이상 장악한 후 하이베른가를 지척에서 압박하던 그들 때문에 검술왕 데인은 늘 술을 달고 살았었다.
‘그래. 애초부터 무리였다.’
루인은 하이베른가의 달라진 면모가 조금이라도 늦게 드러나길 바랐다.
렌시아가 놈들의 눈을 피해서 조금씩, 하지만 철저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바람이었을 뿐.
‘하하!’
자신의 가문은 추적의 개념도 여타의 가문들과는 달랐다.
추적이란 은밀함과 기동성이 생명.
한데 무슨 전장으로 출정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정예 기사 삼백이라니.
애초부터 하이베른가는 은밀히 술수를 부리고 계략을 펼칠 수 있는 가문이 아니었던 것.
그것은 루인이 예측했던 범위를 넘어선 결과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하이베른가가 지닌 강점만을 철저하게 활용해야 했다.
“너…….”
카젠은 렌시아가를 언급하다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루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작은 머리가 얼마나 엄청난 생각을 품고 사는지 이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카젠은 루인이 속도를 강조한 이유를 단숨에 이해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음흉한 의도를 위장한 채 다리오네가의 가주인을 확보했다면 그 이후의 행보는 명확했다.
완벽하게 위조될 서류들!
다리오네가가 보유하고 있던 광산의 운영권은 물론 상인 연합, 길드 조합과 맺었던 온갖 이권들이 그들에게 송두리째 넘어갈 것이다.
그것은 왕국의 동북부 상권 대부분이 그들에게 귀속됨을 의미했다.
그들이 다리오네가의 가주인으로 술수를 부리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하는 것이다.
“……상인 연합에 병력을 보내자는 것도 같은 이유겠구나.”
“전부는 아니겠지만 꽤 많은 자들이 렌시아 놈들에게 포섭되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암암리에 세헬가를 지원하고 있겠죠. 왕국의 상인들 중 렌시아가의 회유를 거부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
“음…….”
루인의 치밀한 논리.
분명 머리로는 완벽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왕국의 기수가인 하이베른이 영지전을 벌인다라.
그것은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결단하시죠.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카젠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영지전이란 곧 왕국의 내전(內戰)이다. 그것도 르마델의 기수가인 우리 하이베른이…….”
루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과연 전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뭐?”
루인이 가주실 한편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는 금린사자기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출정할 기사들이 드높일 깃대에는 가문의 깃발이 아닌 금린사자기가 걸려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금린(錦鱗)?
카젠의 눈빛에 의아함이 번져 나갈 때 루인이 더욱 기이하게 웃는다.
“제가 아버지께 이미 선물을 드렸을 텐데요.”
“허어?”
루인이 일궈 낸 1왕자와의 협상!
이미 하이베른가는 왕실과 광산의 운영권에 관한 협상을 끝마친 상태!
‘그렇다는 것은!’
카젠의 온몸에 활력이 돋았다.
자신들은 지금 영지전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왕실의 재가, 그러므로 지극히 적법하고 정당한 권리 행사.
“아직 1왕자가 왕성에 당도하기 전입니다. 렌시아 놈들이 술수를 부리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그제야 카젠은 루인이 말했던 속도가 위조 서류 따위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로드. 출정을 준비한다.”
“충!”
카젠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루인은 어느덧 강렬한 눈빛을 발산하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전장에 한정한다면 이 가문은 그 어떤 가문보다 강력하다. 병력을 다루는 일만큼은 아버지의 전문 분야.
루인은 안심하고 다음 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지하 감옥의 열쇠를 제게 주십시오.”
그 말에 카젠의 곁에 서 있던 유카인의 몸이 꿈틀거렸다.
지금 그곳에는 사사로이 욕망을 탐하여 가문을 병들게 만든 기사들로 꽉 차 있었다.
“그곳은 위험합니다 대공자님!”
죄인 신분으로 강등된 소에느와 그녀의 휘하들은 누구보다 대공자를 증오하고 있을 것이었다.
“유카인. 그만.”
유카인은 카젠을 바라보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그의 눈가가 조금씩 젖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자에게 지하 감옥의 출입을 허한다.”
“감사합니다.”
루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아길레와 함께 가주실 밖으로 사라져 갔다.
유카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가주! 아직 그들은 가주님의 뜻에 모두 감화(感化)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유카인.”
카젠의 시선은 창밖의 성곽, 도도하게 펄럭이고 있는 하이베른가의 깃발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비록 욕망에 물든 타락한 자들이지만 가문의 중추이자 절대 다수이네.”
소에느.
카젠의 부재, 그 십 년 동안 하이베른가의 기사들 중 팔 할이 그녀의 영향력 아래 거두어졌다.
“그러나 베른은 그들을 가율로 다스릴 수밖에 없지. 그것이 사자의 법도이며 가주의 숙명이라네.”
가문의 누구보다도 카젠과 가깝다고 자부하는 유카인이었으나 그의 고뇌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
왕국의 기수, 사자의 권좌에 올라 보지 못했기에 그의 결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율대로 처벌을 끝마친다면 본 가는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겠지. 그들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네. 그렇다고 베른가의 가주가 가율의 행사를 번복할 수 있겠는가?”
가주의 검, 사홀의 용맹으로 행사한 베른의 가율을 번복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가주의 권위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
“녀석은 지금 나와 싸울 작정이라네. 죄인들의 석방을 내게 강변할 것이야. 대공자는 그럴 권한이 있으니 말이네.”
“예……?”
유카인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대공자의 얼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모의 죄를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묻고는 끝까지 그녀의 죽음을 종용하던 그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다.
“그 일에, 얼마나 대범한 용서가 필요한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설마 그렇게까지…….”
“아니. 대공자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야. 녀석은 나보다도 더 베른(Baron)을 사랑하고 있지.”
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베른, 이 위대한 사자의 가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그랬기에 카젠은 루인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이 아비를 이리도 부끄럽게 만들다니.”
눈은 울고 있었으나 카젠의 입은 웃고 있었다.
유카인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 감옥에 들어가겠다는 단순한 요청에 이토록 많은 것을 헤아리는 카젠이나 대공자나 하나같이 괴물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공자를 향한 유카인의 마음은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카젠.”
카젠이 반갑다는 듯 빙긋 웃었다.
유카인이 자신을 친근하게 불렀다면 그건 더 이상 신하의 조언이 아니었다.
“말하게. 친구여.”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게.”
카젠은 그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루인이 지니고 있는 대공자의 위계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뜻.
문득 카젠은 그런 유카인을 놀리고 싶어졌다.
“데인의 검을 그토록 칭찬한 건 자네이지 않은가. 그를 새로운 대공자로 삼으라고 조언하던 자네의 목소리가 어제처럼 선명하건만.”
데인이 지닌 검의 재능을 알아본 유카인은 사상 최고의 천재가 났다며 날듯이 기뻐했었다.
그를 가장 옹호하고 후원했던 기사가 바로 유카인.
“이건 검의 재능과는 상관없는 문제네. 카젠.”
카젠은 기가 찼다.
누구보다도 검을 숭배하는 기사의 입에서 저런 말이 흘러나올 줄이야.
“대공자가 검을 익히지 않아도 상관없네. 허울뿐인 기수라도 좋네. 그에게 가문의 경영을 맡길 수만 있다면……!”
카젠이 크게 웃었다.
“핫하! 렌시아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겠지!”
“나는 대공자가 그 옛날 대공국의 영광을 되찾을 것만 같다네.”
확신으로 가득한 유카인의 목소리.
그는 아직도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방금까지 가주실에 울려 퍼지던 대공자의 냉랭한 목소리가 내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나는 대공자가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네 카젠.”
유카인의 두 눈에 얽혀 있는 감정.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힘의 공백이 생기면 새로운 권력이 자리 잡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
하지만 자신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모든 정보들이 그에게만큼은 달랐다.
복잡한 정보들을 취합하고 변수를 제거하며 가정을 도출해 나가는 치밀한 과정들.
이를 통해 단숨에 세헬가의 음모와 렌시아가의 의도를 꿰뚫는다.
물론 유카인이 이토록 동요하는 것은 루인의 그런 지략가적인 면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자신이 도저히 살필 수 없는 미지의 혜안이 있었다.
1왕자를 다뤘던 과정, 그리고 다리오네가의 공략을 설파하는 그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난 후에야 그런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하! 아비인 내게 녀석을 괴물이라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런 말이 아니네 카젠.”
더없이 진지한 유카인의 태도에 카젠 역시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웠다.
“가슴에 있는 말을 모두 해 보게.”
침을 꿀꺽 삼키는 유카인.
“나는 매끈하게 잘려 나간 대공자의 동맥을 직접 보았네. 심지어 심장이 지척이었어. 그런데도 대공자는 살아났네.”
“그랬지.”
“그 참혹한 저주를 이기고 몸을 회복한 것만 해도 불가사의한 판국에 그런 치명상을 입고도 어찌 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회의장에 나타났을 때도…….”
“그래.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에 녀석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지.”
유카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대공자의 눈은 자신의 죽음을 의심하는 눈이 아니었네.”
“동맥을 자르고도 죽지 않음을 미리 알았던 게지.”
그것이 유카인이 경험한 루인의 첫 번째 불가사의.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살아난 건 그렇다 치세. 그 후의 행보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네. 죄인 소에느의 음모를 어떻게 미리 알고 그녀를 솎아 냈단 말인가? 자네에게 건넨 변절한 기사들의 명단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결코 지략의 영역이 아니었다.
결론을 도출하려면 과정이 필요한 법인데 대공자의 행동에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빙긋.
“나도 모르네.”
웃고 있는 카젠을 바라보며 유카인은 허탈했다.
정작 아버지란 작자가 이런 신비하고 이상한 일에 무감각하다니.
카젠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카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회가 되면 녀석과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게. 그럼 지금의 내 반응이 이해가 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