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가주님! 보웬 공의 은신처를 찾았습니다!”
가주실에 도착한 기사 소로드가 충직한 예법으로 지도를 건네 왔다.
묵묵히 지도를 받아 드는 카젠.
“음…….”
보웬 다리오네 남작.
수만에 달하는 유랑민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자 하이베른가의 영지 일대를 혼란에 빠뜨린 원흉.
루인의 조언대로 추적대를 편성하여 그의 은신처를 찾긴 했으나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기만 했다.
‘파네옴 광산이라…….’
막상 광산을 수습하고 광맥을 개발하자니 어디서부터 무엇을 손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혈족들은 평생 동안 전장의 기술만을 배워 왔다.
정신과 육체를 갈고닦아 적을 이기기 위해, 왕국을 지키기 위해 예비된 기사들.
광산의 경영을 맡기고 싶어도 맡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재물을 일구는 자질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이라면 소에느와 그녀의 일파들.
그들은 탐욕을 배웠다.
재물이 주는 쾌락을, 권력의 짜릿함을 이미 알아 버린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처벌한 마당에 다시 등용하여 중책을 맡긴다는 것은 모양이 우스웠다. 게다가 순혈파들의 반발도 엄청날 것이다.
“그가 다리오네가의 가주인(家主印)을 지니고 있는 것은 확인했는가?”
카젠의 물음에 기사 소로드가 난색을 표했다.
“보웬 공의 은신처는 본 가의 봉토 밖입니다. 더욱이 아직 왕실에서는 아무런 공표도 없습니다. 르마델의 왕법이 그를 죄인으로 확정 짓지 않는 이상 저희가 그를 구금하거나 몸을 수색할 수는 없습니다.”
카젠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했다는 듯이 흡족한 얼굴로 소로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유카인.
소로드 역시 자신의 허탈한 웃음에 담긴 의미를 읽지 못했는지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과거였다면 사심에 치우치지 않은 소로드의 일 처리를 칭찬했을 것이다.
왕국의 법도와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하이베른가의 본분이니까.
하나 공작가의 위세를 활용해 광산의 병합을 왕실에 통보하고 다리오네가의 이권을 반강제로 탈취하려는 마당.
이런 험악한 판국에도 기사도를 올곧게 내세우는 소로드야말로 이 가문의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귀족 세계에 발을 담그기로 한 이상 하이베른가의 정의는 이제 달라져야만 했다.
“후우…….”
기다란 한숨.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녀석이 짠 판이니 결국 그를 불러 해결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를 불러오라.”
“충!”
잠시 후, 루인이 가주실에 도착했다.
카젠은 현재 가문이 처한 권력의 공백과 보웬 공 문제 등 모든 상황을 루인에게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다.
루인이 다소 지친 기색의 아버지를 담담히 응시하고 있었다.
투기를 발휘하여 기사들을 압도할 때는 왕국의 절대적인 패자(霸者)의 면모를 보여 주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귀족 사회의 이권, 그 아귀다툼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시기만 했다.
그렇게 안타까운 눈으로 카젠을 바라보던 루인이 별안간 기사 소로드를 힐난했다.
“바보세요?”
소로드가 당황해하며 루인을 쳐다봤다.
“……무슨 말씀이신지?”
“추적대의 인원은 몇 명이었습니까?”
“삼백입니다.”
굳건한 자부심, 당당하게 외치는 소로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아버지의 순진한 의문에 루인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대로 된 기사 병단 하나 없이 백 년 이상 상인 연합을 상대해 온 다리오네가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리오네가의 초대 가주는 상인 연합 출신.
거리의 밑바닥에서부터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성장한 그는 상인들의 신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마침내 엄청난 재산을 일구어 귀족의 작위까지 거머쥔 입지전적인 가문.
“유랑민들의 영지 유입을 막지 않는 하이베른가. 기사들의 대숙청. 삼백에 달하는 추적대. 갑작스러운 1왕자의 방문. 이 모든 정보를 접한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하이베른가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저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주인은 보웬 공에게 없으니 지금 당장 모든 추적 활동을 멈추세요. 시간 낭비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영지전을 펼친 적이 없는 본 가다!”
카젠의 말대로 하이베른가는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야심을 떨친 적이 없었다.
르마델의 왕명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하이베른가를 움직일 수가 없는 법.
그게 하이베른, 기사들의 정도(正道)였다.
“맞습니다. 그렇게 계속 귀족들을 방심하게 만들었어야죠. 그런데 추적대를 삼백이나 편성하셨네요?”
“그건!”
“본 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덕지덕지 그려져 있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본 가의 사자기(獅子旗)를 펄럭이며 위풍당당하게 온 영지를 들쑤시고 다녔겠죠.”
“…….”
사실 루인은 벌써 보웬 공의 추적을 끝마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쎄했다.
그러나 기사들을 무식하게 삼백 명이나 동원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리오네가는 물론 본 가의 봉토 근처의 귀족가들도 이미 동요하고 있을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습니다.”
냉혹한 루인의 두 눈.
하이베른가에는 뛰어난 정보력도 연합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어떤 귀족가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것이 있었다.
“가용 가능한 병력의 절반 이상을 투입하십시오. 일진은 세헬가, 이진은 다리오네가, 나머지는 모두 상인 연합을 포위합니다. 가장 많은 병력을 배치해야 할 곳은 세헬가입니다.”
“……!”
루인의 대담한 계획에 카젠은 기가 차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이베른가가 지닌 병력의 절반이라니?
어지간한 소국의 병력과 맞먹는 전력을?
게다가 다리오네가를 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헬가와 상인 연합이라니?
“도대체 세헬가와 상인 연합은 왜? 아, 아니지! 고작 광산 하나를 위해 영지전을 벌이다니! 그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루인의 두 눈이 더욱 냉정한 빛을 발했다.
“광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파네옴 광산을 쟁취하기 위해 1왕자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도박까지 일삼은 놈이 이제 와서 딴소리라니?
“광산을 경영함으로써 얻는 이득은 그리 큰 것이 아닙니다. 본 가가 진정으로 탐내야 할 것은 사람입니다. 터전을 잃고 직업을 잃은 자들의 마음입니다. 파네옴 광산은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본 가로 모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광산의 경영은 위험하고 힘든 사업이다.
루인의 입장에서 광산은 그리 탐이 나는 이권이 아니었다.
루인의 관심은 광산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던 무수한 유랑민들.
그들은 대대로 파네옴 광산의 경영자를 숭배하고 흠모해 왔다.
유랑민들의 고향과도 같은 광산을 온전히 베른가로 귀속시키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광산을 수습하고 경영하는 것은 그들의 정서를 안정케 할 것이다.
“유랑민들을 완전한 영지민으로 받아들이려면 파네옴 광산의 수습은 필수 불가결합니다.”
“…….”
카젠의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문의 영역 절반 이상이 미개척지처럼 변해 버린 것은 녀석의 말대로 영지민의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
카젠도 알고 있었다.
고된 삶에 지쳐 희망을 잃은 영지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무수히 떠나갔다는 것을.
“……꼭 그 방법밖에 없겠느냐?”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귀족들이 본 가의 의도를 읽어 낸 이상, 남은 것은 속도입니다. 또한 영지전이 본 가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기사 전력만 비대하게 유지하고 있는 하이베른가.
그나마 막강한 군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봉토가 웬만한 소국에 비견될 만큼 넓었기에 가능했던 것.
지금 루인은 그 넓은 봉토에 다시 사람을 채우자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글거리는 루인의 눈빛.
그런 아들의 욕망에 점차 동화되어 가는 자신.
베른가의 성을 이고 살아가는 혈족이라면, 대공국(大公國)의 영광, 그 찬란했던 과거에 가슴 뛰지 않을 이는 없었다.
카젠은 루인의 계획을 좀 더 듣고 싶어졌다.
“나를 설득시켜 보거라.”
“아버지가 궁금해하시는 부분은 세헬가와 상인 연합을 치는 것이겠죠.”
“그렇다.”
루인은 아버지에게 건네받았던 지도를 펼쳐 상인 연합의 근거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분명 보웬 공과 채무 관계로 얼룩지기 이전의 상인 연합은 다리오네가와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다리오네가의 초대 가주가 상인들의 신으로 불렸던 존재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좋다마다. 지금까지 다리오네가는 상인 연합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루인이 웃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냐?”
이번엔 다리오네가의 영지를 가리키는 루인.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떵떵거리며 살아야죠. 보웬 공이 아무리 무능한 자라고 해도 그는 상인들의 신, 부르노아 공의 장자입니다. 한데 어째서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까요.”
“그거야…….”
방만한 광산 경영.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사치.
마르지 않은 샘처럼 골드를 뿌려 대던 보웬 공은 그 막대한 재산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그 사실을 루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브루노아 공이 왕국에 헌납한 재산의 규모를 생각해 보시죠. 재물만으로 귀족이 된 가문입니다. 르마델 왕국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 엄청난 재산을 일군 가문이 얼마나 많은 귀족가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음.”
“지금의 상황은 그런 끈끈한 관계가 모조리 떨어져 나가야만이 가능한 상황이죠.”
카젠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다리오네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귀족가는 많았다.
그들 중 몇몇은 충분히 상인 엽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한 큰 가문이었다.
채무 관계를 중재하거나 광산의 경영을 지원할 역량이 있는 곳만 추린다 해도 서너 가문은 쉽게 떠올랐다.
“모두 다리오네가에 등을 돌렸을 겁니다. 채무 관계 역시 정상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닐 테죠. 그토록 엄청난 재산을 일군 가문을 한순간에 알거지로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카젠의 동공이 흔들렸다.
“허면 네 말은 이 모든 상황이 어떤 음모란 말이냐?”
루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는 세헬가의 영역을 가리키며 강렬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힘을 잃은 다리오네가와는 달리 최근 들어 상인 연합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가문. 급격하게 몸집을 불리는 영지 규모와 늘어만 가는 병력. 다리오네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운 가문은 세헬가가 확실합니다.”
“뭐라?”
지금까지 루인을 지켜본 카젠은 그의 이성과 논리가 얼마나 치밀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단지 몇몇 현상만으로 한 가문의 명예를 함부로 재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단정 짓기엔 루인의 논리에는 구멍이 너무 많았다.
“대공자답지 않구나. 그런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함부로 한 귀족가의 명예를 험담할 수는 없다. 그건 협잡이다.”
루인이 음침하게 웃는다.
“글쎄요.”
대공자의 눈빛이 일변한다.
한없이 차가운 동공. 어쩌면 무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눈빛에서 카젠은 순간적으로 서늘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이십 년 전 다리오네가와 세헬가가 맺은 혼약 동맹. 막다른 골목에 몰린 다리오네가가 믿을 수 있는 마지막 안가(安家).”
“…….”
“아버지가 보웬 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 것 같습니까. 가문의 희망인 가주인을 누구에게 맡기며 또 녀석을 어디로 보내겠습니까.”
순간 카젠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가주인을 품에 안고 자신의 고모가 있는 세헬가로 달려가는 보웬 공의 아들이 떠올랐다.
씨익.
“귀족가를 떠도는 오래된 격언이 있죠.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
“적(敵)이 있다.”
카젠은 등줄기로부터 전율이 일어났다.
루인의 냉철한 안목이 그만큼 놀라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젠은 굳이 내색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모자라다. 그것만으로는 세헬가에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내자는 네 제안이 모두 설명되진 않는다.”
세헬가를 가리키던 루인의 손이 지도의 영역 밖으로 뻗어 나갔다.
르마델 왕국의 지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루인과 카젠에게는 굳이 완전한 지도가 필요하진 않았다.
머나먼 광야를 지나 대구릉 지대 밖으로 뻗어 간다.
그의 손길이 마침내 도착한 곳.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남녘의 평야. 르마델 왕국의 축복이라 일컬어지는 비옥한 대지.
“2만에 달하는 영지민을 한순간에 부랑자로 전락시킨 왕국의 문제아. 엄청난 채무로 시장을 교란시킨 자. 명예를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을 일삼는 귀족. 왕실은 그런 자를 왜 왕국의 적(敵)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습니까?”
루인의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빛난다.
“보웬 공이 왕성의 지하 감옥에 갇히길 원하지 않는 겁니다. 그가 입을 여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단 소리죠.”
루인의 손이 비옥함으로 가득한 곳, 렌시아의 영역을 가리켰다.
“왕실의 의지를 뜻대로 주무를 수 있는 가문. 그동안 세헬가를 노골적으로 비호해 온 가문.”
“렌시아…….”
하이렌시아가(家).
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처음으로 상대해야 할 대상은 다리오네나 세헬 따위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