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31화 (31/187)

<31화>

루인이 기다란 회랑을 지나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쟈이로벨의 재잘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흐음. 그렇지 않아도 인간 마법사들의 미욱한 수련 방식을 한번 구경하고 싶었는데 잘되었군. 게다가 기초 중의 기초부터 착실히 배우는 건 오히려 네 미래를 위해 옳은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닥치라고 했다.”

루인은 아직까지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백마법 체계를 경험하는 것이지 마법의 기초가 아니었다.

마법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마탑이라면 몰라도 고작 아카데미에서는 얻을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짧은 인간의 수명상 어차피 넌 곧 짝짓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 그곳에 가면 또래의 암컷 인간들을 원 없이 만날 터인데 굳이 그렇게 울상을 할 일이…… 큽!

썩어 문드러진 그 고약한 면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쟈이로벨이 눈에 선하다.

루인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것’을 벌써 활용하게 될 줄이야.

-또 어딜 가느냐?

뚜벅뚜벅.

거침없이 걸어간 루인은 곧바로 커다란 궤짝 앞에 멈춰 섰다.

쟈이로벨도 그 궤짝을 알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하인들이 낑낑거리며 루인의 방에 가져온 물건.

무엇이 담겼는지 쟈이로벨은 궁금했지만 루인은 열어 보지도 않고 구석에 방치해 둔 상태였다.

덜컥.

키를 맞추고 당기자 육중한 자물쇠가 구속하고 있는 궤짝이 열린다.

호기심이 치민 쟈이로벨이 루인의 시야로 궤짝 안을 확인했다.

-음?

기다란 족자 두루마리.

궤짝에 담긴 것치고는 조금 초라한 물건.

-그게 뭐지?

어둑한 밤, 루인의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빛난다.

촤르르르르륵-

망설임 없이 벽면에 족자를 거는 루인.

흐드러지게 드리운 달빛이 은은하게 족자를 비추자.

“호오, 과연 아길레군. 일 처리가 깔끔해.”

쟈이로벨이 자신을 향한 ‘관찰’을 멈추고 잠시 수면할 때.

루인은 집사 아길레를 비밀스럽게 불렀다.

금화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왕국 최고의 명화가에게 의뢰를 맡기라는 자신의 명령을, 아길레는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이어 들려오는 쟈이로벨의 날카로운 비명.

-크아아아아악! 다, 당장 치우지 못하겠느냐!

달빛 아래 드러난.

칠흑처럼 넘실거리는 마기.

그리고 강대한 대마신의 진마체(眞魔體).

온몸에 빼곡히 자리 잡은 강철보다 날카로운 비늘.

기다랗고 무시무시한 마수(魔手).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움켜쥐고 있는 것은 바로 한 쌍의 잘린 날개.

볼품없이 짓이겨진 날개를 양손에 들고 당당하게 서 있는 위대한 마계의 정복자.

루인은 그 위풍당당한 승자의 위용에 흡족해하며 웃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너, 너 이 새끼!

대마신 므드라.

마계의 서풍(西風) 지대를 절반 이상 정벌한 위대한 정복 군주.

쟈이로벨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장본인이자 그의 평생의 대적자였다.

그때.

갑자기 루인의 입에서 주술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ѝѯ њҧ ѩѥѯ…… ѫѩѣѳѷѹѹѯ…….”

-허윽!

루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다름 아닌 마계의 언어.

한없이 낮은 자세로 므드라의 위대한 위업을 칭송하고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을 경배하는 대서사시였다.

서풍 지대를 살아가는 마족들에게는 경전과 같은 내용!

당연히 그 서사시는 쟈이로벨의 처참한 패배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쟈이로벨은 당장이라도 루인의 내장을 갈아 마시고 싶은 살의로 가득했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수차례나 남용한 진마력!

강림은커녕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적어도 몇 달간은 꼼짝없이 마력만 회복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렇게 루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므드라의 대서사시는 새벽 어스름이 물러갈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   *   *

현자 일행이 떠나간 며칠 후.

카젠은 여러 충직한 가신들과 함께 영지를 순찰하며 숙청의 후폭풍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문은 표면적으로는 고요했으나 실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소에느와 그 휘하 기사들이 가문에 끼쳐 온 영향력이 그만큼 거대했던 것이다.

그들이 지위를 잃고 물러갔다고 해서 그들의 사람들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기득권이 사라진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카젠이 그들 모두를 가율로 엄히 다스리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죄송합니다. 가주.”

영지를 바라보던 유카인이 갑자기 음울한 안색으로 고개를 떨구자 카젠이 물었다.

“유카인. 내게 무엇이 미안한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무는 유카인.

“저는 베른이…… 이 위대한 검가의 상태가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더 이상 하이베른은 기사의 순수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었다.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그야말로 욕망을 지닌 자들의 세상.

작든 크든 이권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기사들이 얽혀 있었다.

“그것이 어디 자네 탓이겠나. 이번 일을 겪으며 나는 생각한다네. 어쩌면 너무나도 드높은 영광이 우리 베른가의 앞길을 막아 온 것은 아닌지를 말이네.”

“…….”

“애초부터 막는다고 제어될 욕망이 아니었던 게지. 거세한다고 해서 종마의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쉼 없이 달리고픈 욕망을 종마는 멈추지 않을 테지.”

유카인의 시선을 좇아 함께 영지를 바라보는 카젠.

“기사들의 욕망을 기수가의 영광으로 막아 온 세월이 천 년. 그사이에 가문의 봉토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가문의 기사도는 오히려 더 퇴보하였네. 대공자의 말대로 어쩌면 벌써 귀족 사회의 웃음거리일지도 모르지. 이 빠진 사자, 이름뿐인 공작가로 말이네.”

“당치 않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배덕한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자네의 말에 정답이 있군.”

그런 카젠의 말에 유카인이 이를 깨물었다.

겉으로 내색만 하지 많을 뿐, 하이베른은 이미 많은 귀족들에게 과거의 영광이었다.

뛰어난 무력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가문.

“반면 렌시아가는 어떤가.”

“가주!”

철두철미한 계략과 음모로 귀족 사회를 통합하여 거대한 이권 집단을 이룬 가문.

오랜 세월 하이베른이 르마델의 깃발을 움켜쥐고 있었다면 왕가의 핸드(Hand), 국왕의 옆자리는 늘 렌시아가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이베른가는 그들에게 기수의 영광까지 몇 차례 내어 주기도 했다.

당연히 국왕조차도 결코 렌시아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얼마 전 나는 까마귀들을 불렀네.”

그 말에 유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천박한 자들을 어찌…….”

더러운 정보상들.

금화만 건네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정보를 가져다주는 왕국의 기생충 같은 자들이었다.

“난 그들을 통해 왕실과 귀족 사회의 권력 지형을 알고 싶었지. 그들은 그저 웃더군. 그들은 앉은 자리에서 바로 이걸 써 주었네. 금화도 받지 않았어.”

유카인이 카젠이 건넨 서찰을 묵묵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곧바로 우악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런……!”

왕실의 의지는 렌시아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표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왕가가 지니고 있었던 거대한 권력과 이권은 이미 절반 넘게 렌시아가로 넘어간 상태.

왕가의 통제력도 렌시아가의 신권보다 약했다.

심지어 군권, 기사단들을 움직이는 힘까지 렌시아가 움켜쥐고 있었다.

사실상의 섭정 체제였다.

“자네는 까마귀들이 왜 금화를 받지 않았는지 짐작하겠는가?”

서찰을 구기며 이를 깨무는 유카인.

“정보랄 것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카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유카인. 왕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나만 몰랐던 게지. 미천한 까마귀들의 비웃음이나 사는 것이 자네가 모셔 온 자의 실체라네.”

“가주!”

“하하, 알았네 알았어 유카인.”

문득 카젠의 눈빛이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결국 나는 깨달았네. 1왕자를 보내어 우리 가문의 의중을 떠보는 것도 파네옴 광산의 운영권을 허락하는 것도 더 이상 왕실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가주! 설마 그 정도까지!”

“유카인.”

카젠의 엄숙한 표정에 유카인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가주.”

“나는, 아니 하이베른은 이제 더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진창에 구를 것이네.”

“가주!”

씨익 웃는 카젠.

“하지만 난 그런 삶을 살아 보지도 살 수도 없는 놈이지.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가주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곰곰이 곱씹던 유카인이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그 말씀은!”

“그래 유카인. 그런 일에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녀석이 있지.”

단 며칠 만에 특권과 오만에 찌든 동생들의 성품을 개조시킨 후 장악해 버린 자.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무수한 배덕자들을 솎아 내며 가문의 우매함을 일깨운 자.

강력한 추진력과 결단으로 벌써부터 사실상의 가주 대행을 하고 있는 괘씸한 녀석.

“미욱한 소년이 진정한 남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리겠는가.”

유카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 저도 제가 진정한 사내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호탕하게 웃던 카젠이 저 멀리 거대한 하이베른의 성을 응시했다.

“녀석은 단 며칠 만에 데인을 사내로, 아니 기사로 만들었네. 난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저도 요즘 데인 님을 보면 늘 놀랍고 새롭습니다.”

“더구나 얼마 전 자네의 보고 말이네.”

“아…….”

루인과 1왕자와의 독대를 떠올리면 유카인은 아직도 가슴이 떨려왔다.

“치밀한 임기응변과 대담한 대응. 칼날 같은 논리. 상대를 허물어뜨리는 그 철저한 장악력. 난 녀석이 이제는 두려울 지경이라네.”

“…….”

“녀석은 가문의 어떤 것도 내주지 않았네. 베른의 재산, 군권 어느 하나 1왕자에게 약속하지 않았지. 내민 조건은 단 하나,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녀석은 1왕자라는 강력한 끈을 만들어 버렸네.”

어쩌면 그 충격은 보고로 접한 카젠보다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유카인이 더할 것이다.

유카인이 상대의 무력이 아닌, 단지 사람의 언변만으로 공포를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체 왕실에서 1왕자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그리도 정확하게 알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국왕의 심기는 또 어떻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카젠이 유카인을 쳐다봤다.

“자네는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을 알고 있나?”

유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네. 나 역시 왕실의 명망 높은 현자들을 오랫동안 경험했지만 그런 빼어난 지혜는 접한 적이 없네. 심지어 얼마 전엔 현자를 마음껏 요리하는 녀석을 직접 보기까지 했지.”

그 드높은 지혜의 현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현자 에기오스가 그토록 위엄을 잃은 채로 욕망에 휩싸인 모습이라니.

카젠으로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희귀한 광경이었다.

다시 성을 응시하며 웃는 카젠.

“대공자를 포기하겠다고? 실없는 소리. 이미 저 성(城)은 녀석의 베른이네. 포기하고 싶어도 도망치고 싶어도 결국 저 성곽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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