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30화 (30/187)

<30화>

루인의 무례한 행동에 여러 따질 말을 준비해 온 에기오스.

하지만 오묘한 파동과 함께 신비한 빛깔로 둥실거리는 루인의 마나홀을 보는 순간 그간의 상념이 모조리 흩어져 버렸다.

금방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감정은 미지에 대한 짙은 갈망.

지금까지 대공가에서 지내면서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 의문이자 신비.

하지만 에기오스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그는 루인의 마법에 매료된 감정을 간신히 덜어 내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시지요.”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기오스는 급히 마력을 끌어올리더니 이내 전면으로 확장했다.

상대의 마나와 감응하여 그 기질을 살피는 마법, 스캐닝(Scanning).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일주일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하지 못했다.

이렇게 기회가 주어진 이상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살펴야만 했다.

두 개의 고리, 마나 서클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파동을 세세히 감응시킨다.

느껴지는 순수한 마나의 정기.

‘허! 정말 이게 마나홀이란 말인가?’

이건 일루전(illusion)이나 환영 마법 따위 같은 눈속임이 아니었다.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는 진짜 마나홀!

그러나 더한 충격은 그 다음이었다.

‘무, 무슨 마나의 순도(純度)가!’

농밀한 마나의 결정, 그 아득한 순수에 에기오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인간의 언어로는 그 순수함을 형용조차 불가능하다.

루인의 마나에 담긴 정수, 그 미지의 근원은 자신이 아는 그 어떤 지식으로도 해석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마나의 절대량 역시 결코 2서클의 그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5서클과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온갖 놀라운 표정으로 루인의 마나홀을 살피던 에기오스.

그런 그가 갑자기 기절할 듯이 비틀거렸다.

“아, 아니!”

에기오스가 황급히 마력을 회수하고 마법을 거두었다.

마나의 성질을 더욱 심도 있게 살피기 위해 스캐닝을 멈추고 마력 동화(魔力同化)를 시도하던 그 순간.

갑자기 반탄력과 함께 자신의 마력이 튕겨 나와 버린 것.

대공자가 무슨 마법이라도 펼친 것 같아 황급히 술식의 잔재를 살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건……!’

잡스런 침범을 거부한다.

그것은 마나가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뜻.

설마 마나, 그 자체의 기질이라고?

“영성(靈性)!”

에기오스와 함께 온 마법사들이 경악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자님?”

“여, 영성이라니요?”

마력에 시전자의 의지가 깃든 경지!

단지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태초 이후 인간의 마법 역사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신비의 경지였다.

‘지금 내가 테아마라스 님의 경지를 경험하고 있단 말인가?’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지금까지 무수한 현자들이 도전했던, 그러나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절망이자 꿈.

그렇게 이론상의 경지나 다름없었던 경지를 불과 2서클의 힘으로 이뤄 냈다고?

“이, 인정할 수 없다!”

하이베른가를 향한 예의도 현자의 고고함도 잊은 채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발하고 있는 에기오스.

루인이 무심하게 마나홀을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 그대! 아, 아니 대공자님의 마력은……!”

에기오스는 루인의 마나에 담긴 영성을 언급하려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 말을 내뱉는다면 마법사로서 자신의 모든 세월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것이기에.

“제게 제 마법의 해석을 요구하진 마십시오. 무례한 것이 아니라 저 역시도 제가 이룬 마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게 우연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인이 지그시 현자 일행을 바라보다 슬며시 입가를 꿈틀거렸다.

“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떡밥을 이 정도까지 뿌렸으면 이제 슬슬 당근을 내밀 때.

“대대로 본 가에 전해 내려온 혈류 마나석의 마력 도식을 연구해 본다면 제 마나의 근원을 살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 에기오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루인이 이룬 미지의 마나를 해석할 희망이라도 있다는 것에 안도했기 때문.

만약 대공자가 혈류 마나석의 신비한 힘에 의해 마법을 각성한 것이 확실하다면 반드시 연구할 필요성이 있었다.

대체 마나의 고리를 맺는 순간 영성(靈性)을 지닐 수 있다니!

그렇지 않아도 마탑은 하이베른가의 마력 도식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혈류 마나석을 재현할 당시의 마법사들은 기억하고 있는 부분들이 서로 상이했다.

또한 각자 맡았던 회로도 달랐고 해석한 해주들도 제각각이어서 제대로 마력 도식을 재현할 수가 없었다.

하이베른가에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마법 회로가 아니었다면 에기오스는 몇 번이고 국왕께 요청했을 것이다.

루인이 희망에 부풀어 있는 에기오스를 응시하다 아버지께 요청했다.

“가주님. 대공자의 권한으로 요청합니다. 마탑이 혈류 마나석의 마력 도식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카젠의 두 눈이 금방 분노를 드러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이미 마탑은 혈류 마나석을 재현한 성과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도식을 연구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가문의 후손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카젠의 외침에 루인의 완곡한 대답이 이어졌다.

“가문의 저주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라? 그게 정말이냐!”

“예. 가주님.”

“허……!”

오랫동안 하이베른가를 짓눌러 온 그 천형과도 같은 저주가 이제 사라지고 없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루인의 확신에 가까운 눈빛을 보고 있자니 카젠은 여느 때보다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결코 함부로 확신을 일삼는 이가 아니었다.

-무슨 짓이냐! 누구 마음대로 하찮은 인간들에게 이 위대한 마신의 마법을 전한단 말이냐!

‘닥쳐라. 쟈이로벨.’

사실 하이베른가에 전해져 온 마력 도식은 쟈이로벨의 마수였다.

자신이 점찍은 먹잇감의 생명력을 더욱 오랫동안 즐길 수 있도록 가문에 파렴치한 만행을 저질러 온 것이다.

지금까지 가문은 그것도 모르고 이 사악한 마신에게 놀아났던 것.

-흥! 천년만년 해석해 보아라! 인간 마법사들 따위가 이 위대한 마신의 마법을 한 자락이라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까진 내가 알 바 아니고.’

루인은 희열로 번들거리고 있는 에기오스의 두 눈을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루인은 인간의 백마법을 반드시 체계적으로 배워야 했다.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마법사들의 갈망.

더욱 커다란 미끼를 드리운 이상 에기오스는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드디어 결심한 듯, 에기오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면…… 저희 마탑의 요구를 온전히 따라 줄 수 있으십니까?”

루인이 빙그레 웃었다.

“배우는 자가 자세를 낮추는 건 당연한 의무지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에기오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루인을 마주 바라본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르마델의 마법사가 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순간 엄숙해지는 에기오스의 표정.

“허면 그대는 내 말을 곧이들으라. 이는 마탑을 대표하는 탑주의 말이니.”

루인이 허리를 굽힌다.

“받들겠습니다.”

“지금부터 그대의 신분은 원칙적으로 없는 것으로 하겠다. 공작가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르마델의 마법사 명부에서 즉시 축출을 당한다 해도 불만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오히려 제가 원하던 바였습니다.”

그때 카젠이 끼어들며 에기오스에게 물었다.

“그게 가능하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리 녀석이 사교계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탄생을 지켜본 무수한 귀족들이 있소. 녀석의 존재를 아는 이는 생각보다 왕국에 많소이다.”

루인이 답답하다는 듯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니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죠. 제 탄생연에 참가했던 자들이 대체 누굴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음?”

“그들이 기억하는 대공자는 갓난아기입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나 흘렀죠. 그들이 절 알아볼 것 같습니까?”

“어허! 그래도 그들 대부분이 네 이름을……!”

“루인 ‘베른’은 알겠죠. 하지만 ‘루인’은 모를 겁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왕국에 루인이라는 이름의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계십니까?”

“…….”

물론 카젠 역시 몰라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자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의 큰 아들이 성을 숨기고 명예 없는 백성으로 살아간다기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의 속도 모르고 루인은 더욱 당돌하게만 굴었다.

“마법사의 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버지라도 더는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루인이 에기오스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계속해 주십시오.”

눈치를 보던 에기오스가 다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또한.”

에기오스가 더욱 힘주어 말한다.

“마탑의 입성은 왕국 모든 마법사들의 간절한 염원. 아무런 성과도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그대를 곧장 마탑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느니.”

루인의 표정에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그대는 먼저 왕실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마법학부의 생도로서 자질과 능력을 검증받도록 하라. 마탑의 입성은 그 후에 논하도록 하겠느니라.”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한 루인의 얼굴.

회귀 후 처음 보는 그의 당혹한 표정에 쟈이로벨이 배꼽을 잡았다.

-크하하하하하하! 전설의 대마도사라 불려 온 네놈이 아카데미라니!

루인의 얼굴은 보기 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기초 입문자 과정.

애송이들이 가장 초보적인 이론을 배우며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곳.

이미 마법사의 기틀이 넘치다 못해 대마도사의 경지에 이른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곳이었다.

“에기오스 님! 아니 탑주님! 그건!”

“번복은 없네. 예비 생도.”

엄숙한 선언을 마친 후 에기오스가 굳게 입을 닫자.

카젠의 얄미운 목소리도 거들었다.

“흐음. 일리 있는 말이군. 기사 아카데미를 거치지도 않은 자가 근위 기사단에 배속된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왕국의 체계가 엉망이 될 테지.”

아버지까지!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아들의 시선을 카젠은 애써 외면했다.

한숨을 내쉬는 루인.

저 빌어먹을 현자 에기오스의 의중은 명확했다.

공작가의 요청이기도 하고 받은 것 또한 있으니 거절하긴 어려웠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척한다.

하지만 꺼림칙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니 일단 아카데미에 처박아 두고 지켜보겠다는 것.

과연 왕국의 현자라 이건가.

늙은 능구렁이다운 처사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주님.”

현자 일행이 일제히 예를 갖추자 카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허어. 마뜩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구려. 부디 내 아들을 잘 살펴 주시오.”

“걱정하시 마십시오. 후일 왕성에서 뵙겠습니다. 가주님.”

그렇게 현자 일행이 멀어지자.

“으흠. 그럼 나도 이만 밀린 정무가 있어서.”

“아버지.”

“아. 지금 내가 꽤 바빠서 말이다.”

“…….”

더욱 구겨지는 루인의 얼굴.

틀림없이 아버지는 자신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치 없는 쟈이로벨의 영언이 루인의 뇌리에 울려 퍼진다.

-네 수만 년의 마인딩은 다 어디 갔느냐? 저런 현자의 반응은 예측하지 못했느냐? 크하하하하!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는 루인.

오늘에 이르러서야 쟈이로벨은 처음으로 루인이 인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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