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29화 (29/187)

<29화>

마나홀(Mana hole).

마나의 역동과 인간을 잇는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매개.

마법사의 역량과 가치를 평가할 때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잣대이며 마법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마법기관.

하나 인간이 마나의 고리를 심장 외의 다른 곳에 맺을 수 있다?

길고 긴 마법의 역사.

에기오스의 뇌리에 무수히 많은 전설과 위업들이 스쳤으나 그런 일은 백여 년을 살아온 그에게도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물론 그 충격은 그를 따라온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에기오스 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진정…… 진정들 하시게.”

현자 일행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마탑 최고위 반열의 마법사들.

그들은 지혜와 깨달음, 앎을 추구하는 마법사들의 본질에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에기오스가 수차례나 호흡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루인 대공자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제게 모두 설명해 줄 수 있으십니까?”

담담한 루인의 대답.

“생명력이 말라 가며 죽어 갈 때 마나를 깨달았습니다. 이 힘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지요.”

에기오스의 동공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스스로 마나의 고리를 이루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참지 못한 마법사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루인은 명백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말은 마법의 체계를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때 카젠이 끼어들었다.

“저 녀석은 혈류 마나석의 어떤 알 수 없는 작용에 의해 마나의 힘을 깨달았다고 했소. 나 역시 그리 짐작하고 있소만. 저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오?”

“아……!”

“음…….”

마법사들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된 하이베른가의 마력 도식.

지금도 현자 일행은 그 도식을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고대의 문헌들을 모조리 뒤져 봐도 그와 비슷한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미지의 마력회로.

대체 어떤 기전으로 회로가 진행되는지, 그 미묘한 파동들은 무엇인지, 어떤 힘으로 치환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마법적 해석은커녕 그저 그려진 마력 도식대로 완성하는 데만 삼 년이 걸렸다.

그것도 마탑의 모든 지혜가 모인 결과였다.

“대공자님의 말씀은…… 기사로 예를 들자면 마치 검을 쥐어 본 적도 없는 이가 스스로 스피릿 오러를 발휘했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가주님.”

“그 정도란 말이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기오스.

“마법사의 자질을 논할 때 저희는 마나 친화력을 잣대로 삼습니다. 단지 마나를 남들보다 쉽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기질만 뛰어나도 천재적인 재능이라 부르지요. 마나 친화력의 정도에 따라 마법사의 운명이 갈리는 편입니다.”

“음.”

카젠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기사의 자질과 재능도 그와 비슷했다.

근골이 뛰어나고 투기에 민감한 체질만 타고나도 절반은 성공인 셈.

거기에 타고난 심성과 근성이 뒷받침되고, 비로소 뛰어난 스승 만났을 때 한 명의 뛰어난 기사가 완성된다.

“한데 친화력을 넘어 마나의 고리를, 그것도 2위계를 스스로 이룩했다는 것은 저희 세계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더구나?”

에기오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가주님께서는 마나홀을 다른 말로 마나하트(Mana heart)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들어 보았소.”

“심장(heart)에 고리를 맺는 건 마법사들에게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존재’도 비껴갈 수 없는 마법의 섭리와 같은 것입니다.”

대륙에 널리 알려진 드래곤 하트의 전설을 카젠이 모를 리 없었다.

취하는 즉시 초인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전설의 보물이었다.

카젠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면 내 아들이 섭리를 벗어난 인간이란 말이오?”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대는 가부만 결정하면 될 것이외다.”

난처한 에기오스.

분명 대공자 루인은 자신들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만큼 홀로 마나의 고리를 이루었다는 것은 마법의 체계를 부정하는 말.

더욱이 외부에 마나홀을 소환하는 불길한 이능(異能)이라니.

분명 전례 없는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未知)를 섣불리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때 루인의 담담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전 평생을 누운 채로 말라 가는 육신과 싸워 온 몸입니다. 당연히 어떤 마법서도 본 적이 없지요. 이를 증명해 줄 사람은 아마도 저를 아는 가문의 혈족들이 전부일 것입니다.”

“…….”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간신히 생명만을 유지해 온 루인.

그 사실은 그의 몸에 혈류 마나석을 재현한 현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이 위대한 기사의 가문에서 마법을 익힌다는 자체부터가 모순.

하지만 일의 앞뒤가 너무나 완벽하게 깔끔했다.

그 점이 내내 에기오스의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에기오스가 복잡한 상념으로 고심하고 있을 때 다시 루인의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기오스 님의 뜻은 곧 마탑의 의지. 제 요청이 마탑을 곤란하게 만든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아쉽지만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예……?”

황당해하는 에기오스.

이를 지켜보던 카젠 역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마탑에 입성하기 위해 스스로 마법의 비밀까지 내보인 녀석이 이렇게 쉽게 물러난다고?

카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인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제 동생들의 자존감 따위는 시궁창에 던져 버리는 녀석이었다.

취하고자 했던 것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모습은 그동안 보여 줬던 녀석의 면모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과연 카젠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루인의 두 눈이 웃고 있음을.

“루, 루인 님은 기, 기수가의 대공자이십니다. 당연히 저로서는 생각할 시간이…….”

“아닙니다.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루인이 허공에 소환했던 마나홀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미련 없는 냉정한 표정으로 카젠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데인과 함께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카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루인이 데인과 함께 가주실 밖으로 나가버리자 이제는 오히려 현자 에기오스가 다급하게 굴었다.

“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희가 하이베른가의 호의를 너무 배려하지 않은 듯합니다.”

카젠이 씁쓸하게 웃었다.

“1왕자님을 따라 나서지 않아도 괜찮겠소?”

“그건…… 아, 아무래도 저희에게 따로 언질도 없이 가셨으니 혼자가 편하신 듯한 모양입니다. 르마델 왕실 최고의 호위대까지 함께하고 있으니 큰일이야 생기겠습니까?”

카젠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현자 일행만이라도 떠나지 않는다면 원로들의 우려를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본 가의 체면을 생각해 줘서 고맙소. 정원에서 환영연을 준비하고 있으니 함께 그곳으로 가겠소?”

“영광입니다. 가주님.”

흡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카젠이 문득 미간을 좁혔다.

‘설마 루인 녀석은 현자 일행의 이런 반응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짧은 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원로들의 우려까지 말끔히 해결해 주다니.

카젠이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정원으로 향하는 현자 일행을 무심히 바라봤다.

르마델 왕국의 최고 지성 집단이라는 마탑의 일원들.

하지만 카젠은 그들이 낚시대에 걸린 물고기 신세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허허…… 도대체 너란 녀석은.’

*   *   *

왕실 사절단을 위한 환영연이 끝난 지도 벌써 일주일.

데인이 갖은 핑계로 현자들을 만나 주지 않고 있는 루인에게 우려를 표했다.

“형님. 벌써 아홉 번째 접견 거부입니다.”

하이베른가가 아무리 왕국의 기수가라 할지라도 상대 역시 르마델 왕국의 마탑, 그중에서도 최고위 신분의 현자.

루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슬슬 모멸감을 느낄 시간이지.”

“예?”

그런 형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황당한 얼굴로 굳어 버린 데인.

“상대는 국왕께서 친히 아끼시는 현자입니다. 그런 분을 굳이 왜 이렇게까지…….”

루인은 그런 데인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현자의 자아는 완고하다. 지혜 역시 뛰어나지. 평생을 왕실에서 치열하게 살았으니 지략과 협상에도 능할 것이다.”

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현자 에기오스의 명성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자자했다.

“나는 그런 뛰어난 자에게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쉽지 않은 일이야.”

“마탑…….”

데인은 그런 형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 역시 검술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허나 형님은 왕국 최고라 일컬어지는 검술 가문의 후계자.

위대한 선조로부터 안배된 길을 거부하면서까지 굳이 마법의 길을 걷겠다는 그의 의지가 납득되지 않았다.

“꼭 마법이어야 합니까?”

“반드시.”

하지만 저 눈빛.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저 올곧음, 그 뜨겁고도 강렬한 그의 의지에 매번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

하인 에서턴이 난처한 표정으로 루인의 방에 도착했다.

곧 그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대공자님.”

루인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에서턴을 무심히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대공자님, 그게…….”

“기다리겠다더냐?”

“그, 그렇습니다 대공자님. 제가 분명히 목욕을 끝마치고 낮잠을 청하셨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드디어 현자 에기오스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루인은 때가 되었음을 인지했다.

“그리고 대공자님. 가주님께서……”

화들짝 놀라 창밖을 살피던 데인이 크게 소리쳤다.

“형님! 아버지도 함께 계십니다!”

씨익.

“노인네가 이성을 잃었군.”

고작 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하이베른가의 가주까지 동원하다니.

하지만 아버지에게 현자 에기오스는 아들의 목숨을 살려 준 은인.

아버지는 그런 자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순 없었을 것이다.

결국 루인은 별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카젠은 자신까지 번거롭게 만든 루인이 괘씸했다.

하지만 예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루인이 정중하게 예를 갖추자 어느덧 기분이 좋아졌다.

“몸이 많이 좋아졌구나.”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혈주신으로 탈바꿈된 루인의 육체는 날이 갈수록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제 해골을 연상시키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 이상 수척하거나 병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환담이 끝나자 카젠이 얼굴을 굳히며 본론을 꺼냈다.

“어째서 에기오스 님의 접견 요청을 계속 거부하느냐.”

“정무에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루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현자 에기오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루인은 단 한 번도 정무를 핑계로 대지 않았다.

독서, 수련, 혹은 식사, 심지어 오늘은 목욕과 낮잠이었다.

처음에 몇 번은 사심 없이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자신의 냉정을 흔들기 위해 일부러 하찮은 핑계들을 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때.

츠츠츠츠츠츠-

갑작스레 허공에 소환된 오드.

루인이 싱긋 웃으며 에기오스를 바라본다.

“그래, 현자님께서는 무엇이 더 얼마나 궁금하신 건지?”

영롱한 빛을 내며 쉼 없이 도도하게 회전하고 있는 루인의 마나홀.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던 에기오스는 자신이 완벽한 약자라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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