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28화 (28/187)

<28화>

쟈이로벨.

그가 영혼의 붕괴를 각오하는 최후의 마법을 시전하기 바로 직전.

-쟈이로벨.

-왜 그러느냐? 중요한 순간이다.

-고맙다곤 하지 않을게.

-미친놈.

점점 으스려져 가는 영혼.

고통에 몸부림치던 쟈이로벨이 힘겹게 영언한다.

-끄으…… 부탁이 있다.

-말해.

-성공한다면 내 이런 최후를…… 굳이 과거의 나에게 말하진 말아 다오.

-…….

루인은 당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두 말하게 되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역시 지금의 쟈이로벨은 참지 못했다.

-크아아아아! 감히! 감히!

냉정했던 건 잠시뿐.

자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도, 인간에 의해 소멸에 이르렀다는 것도 그는 모두 인정하지 못했다.

‘쟈이로벨…….’

과거에도 지금도 쟈이로벨은 루인이 지닌 최강의 패.

그의 전폭적인 협력이 그만큼 루인에게는 절실한 것이었다.

‘그’를 향한 적개심은 쟈이로벨의 협력을 끌어낼 가장 효과적인 수단.

지금까지 불멸의 마신으로 살아왔기에 인간이 자신을 소멸시켰다는 사실은 그의 고고한 자아에 치명적이었다.

-그 인간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몰라.”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서야 놈은 실체를 드러냈다.

자신의 능력이 완연히 무르익을 때까지 그는 완벽에 가깝게 신분을 위장했다.

현재의 그가 어떤 인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그야말로 미지(未知).

왕족, 혹은 귀족, 그것도 아니면 평민, 심지어 이종족으로 위장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당장 놈을 찾아라! 강제로 결계를 부수고 내 본체를 소환시켜서라도 놈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루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과거, 실제로 쟈이로벨은 ‘존재들의 맹약’을 무시하고 차원의 결계를 깼다.

그렇게 당당히 본체를 소환해서 ‘그’와 맞섰으나 처참하게 패배했다.

루인은 굳이 그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약속한다 쟈이로벨.”

루인은 마치 내면의 모든 감정을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로 잔혹하게 웃었다.

“……네 영혼을 소멸시킨 놈을 반드시 찾겠다. 놈에 의해 죽어 간 무수한 영혼들의 절규가, 허무의 차원에 빨려 들어간 친구들의 넋이 함께 놈을 가리킬 것이다.”

순간 쟈이로벨은 광기를 멈추었다.

그만큼 루인의 맹세는 너무나도 섬뜩해서 마신인 자신마저 숨이 멎을 정도였다.

그제야 쟈이로벨은 자신이 어떤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지를 절절히 깨달았다.

수만 년의 증오를 영혼에 새긴 인간.

인간의 역사에서 과연 그런 존재가 있었던가?

그런 루인의 영격(靈格)은 마신인 자신과 동등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그때.

끼이이이익-

베른헤네움, 거대한 홀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들어선 이는 바로 데인이었다.

“형님.”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형.

데인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가문의 무수한 강자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데인조차도 치미는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한 표정.

지난 시간 동안 형과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완전한 오판이었다.

사람이, 인간이 어떻게 저런 잔혹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낼 수 있는 거지?

“아버지의 호출인가.”

“…….”

마치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형의 표정에서 데인은 말할 수 없는 막막함을 느꼈다.

왕국의 대가문, 이 위대한 검술 명가 하이베른조차도 형에겐 작아 보였다.

새삼 깨닫는 데인.

애초부터 형에겐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신분 따윈 거추장스러운 외피였을지도 몰랐다.

“형님과의 독대 후 1왕자께서 갑자기 수도 왕성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왕족, 그것도 르마델의 1왕자가 하루도 묵지 않고 떠났다는 것은 난감한 일.

거창한 예식과 환대를 준비해 온 가문의 혈족들은 분명 독대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져 물으며 호들갑을 떨 것이다.

“현자 일행은? 그들도 마탑으로 되돌아간 것이냐?”

“아닙니다. 형님을 만나겠다며 지금 아버지와 함께 계십니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던 루인이 발길을 옮겼다.

“가자.”

베른헤네움이 다시 고요로 잦아들었다.

*   *   *

루인이 데인과 함께 가주실에 등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모였다.

위압적인 눈빛으로 한참 동안 루인을 바라보던 카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1왕자님께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이냐.”

루인이 대답 대신 친위 기사 유카인을 응시했다. 루인의 시선을 받은 그는 가늘게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루인은 현자 일행 때문에 아직 그가 아버지께 제대로 보고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곧 루인이 원탁에 앉았다.

“우리 영지의 사정을 상세하게 말씀드렸고 왕실에서는 파네옴 광산의 운영을 허락하였습니다. 저 역시 영지가 안정되는 대로 운영권을 반납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이 역시 무리 없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남의 일처럼 건조하게 말하는 루인의 태도에서 카젠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외에는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개인적?”

카젠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대공자의 예복을 입고 1왕자와 독대를 한 이상 그와 오간 말들은 모두 공적인 것.

카젠은 루인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문의 원로들께서는 1왕자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혹여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미리 말하거라.”

“전혀요.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뭐 제 개인적인 사담이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곧 알게 되실 것이 아닙니까?”

이 와중에도 루인은 자신을 믿지 못해 유카인을 따라 붙인 것을 따져 묻고 있다.

카젠은 괘씸했지만 루인의 묘한 눈짓 때문에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의 눈이 현자 일행을 향해 있었기 때문.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오히려 현자 에기오스가 환기에 나섰다.

“1왕자님께서는 활달함 속에 깊은 속을 감추신 분입니다. 급히 왕성으로 되돌아가셨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크게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문득 에기오스가 루인을 향해 천천히 일어났다.

“가주님께서는 기적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이렇게 직접 대공자님을 뵈오니 기적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대공자님의 쾌유를 경하드립니다.”

목례로 축복하는 에기오스.

루인 역시 마주 웃으며 대공자의 예를 다했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기적은 존재하지 않지요. 마탑의 지혜가 저희 가문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에기오스가 말없이 루인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루인을 옭아매던 그 참혹했던 저주가 정말로 말끔히 사라진 것이 확실했다.

비록 아직 수척하긴 했으나 서서히 생명력이 말라 가는 저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카젠을 바라보는 에기오스.

“왕국의 기수이시여. 마탑의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면 저희도 이만 길을 나설까 합니다. 저희가 아무리 하이베른가의 기사도를 흠모한다고 해도 1왕자님께서 떠난 마당에 그분을 따라잡지 않을 수가 없지요.”

“허 참.”

왕실의 사절이 도착한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1왕자와 현자 일행이 모두 떠나간다니.

하지만 카젠에게는 1왕자를 따라나서야 한다는 에기오스를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때.

“잠시, 에기오스 님.”

갑작스런 루인의 부름.

진중한 그의 표정에 에기오스가 예의 부드럽게 웃었다.

“대공자께서는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루인은 현자 일행이 가문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계획해 온 말을 꺼냈다.

“하이베른가의 루인. 왕실 마탑의 현명한 가르침을 청합니다.”

“예……?”

에기오스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멍해졌다.

이곳은 왕국의 기수, 사자의 검가, 위대한 검술 명가 하이베른이다.

그런 엄청난 검술 가문의 대공자가 설마 마법을 배우고자 한단 말인가?

“너……!”

카젠이 억센 수염을 부르르 떨며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빛처럼 투명한 루인의 두 눈을 바라보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저 치밀하고 대범한 아들놈이 스스로의 다짐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땐 이미 얘기는 끝난 것이었다.

설사 놈의 목에 검을 들이민다고 해도 그 의지를 꺾을 수가 없으리라.

“그 말씀은 설마…… 대공자님께서 저희 마탑의 마법을 배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허허.”

루인의 요청은 단순한 소년의 호기심으로 치부될 사안이 아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또한 왕국의 기수가 함께 있는 자리.

결국 에기오스는 말없이 카젠을 응시했다.

이건 자신의 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검술 명가의 정체성과 직결된 사안.

하이베른가의 후계자가 마법을 배우겠다는 사실은 르마델 왕국의 커다란 화제라 할 수 있었다.

카젠의 강렬한 눈빛이 루인을 향했다.

“뜻을 접진 않겠지?”

“잘 아시면서 왜 묻는지요.”

“한 번 물어보는 것도 안 되느냐?”

괘씸한 루인의 반응에 혀를 끌끌 차던 카젠은 하는 수 없이 에기오스에게 요청했다. 왠지 힘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뜻대로 해 주시오. 에기오스.”

“허……?”

설마 하이베른가의 가주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질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에기오스.

그렇게 난처해하던 에기오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주님! 마법사의 세계는 귀족 사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대공자님께서 마법에 입문하는 순간 그 즉시…….”

루인이 에기오스의 말을 잘랐다.

“마법사들의 철저한 신분 질서를 저 역시 모르지 않습니다. 오로지 마법의 경지로만 구분되는 위계 체계. 마탑에 제 가문의 위세를 내세울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공자님.”

말이야 쉽다.

하지만 루인의 배경을 알게 되면 어떤 마법사가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왕국의 대 공작가, 그것도 기수가다.

그는 천 년 이상 왕국의 기사도를 짊어져 온 명예로운 하이베른가의 후계자.

마탑이 받아들이기에는 그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저희에게도 원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대공자께서는 이미 사자의 투기를 담으셨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기사가 마나를 받아들인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마나에 속하지 않은 자를 마법사로 키울 순 없습니다.”

그때.

츠츠츠츠츠-

현자 에기오스는 갑작스럽게 소환된 루인의 오드를 바라보며 멍해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을 뿌리며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마법구.

영롱한 빛을 내며 쉼 없이 도도하게 회전하고 있는 그 모습에 에기오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어 정신을 차린 그가 황급히 마법구를 살피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술식이 치환된 건지 끊임없이 마나회로를 살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도대체가……?’

자신이 아는 어떤 마법적 지식으로도 루인이 소환한 마법구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 대공자님! 이게 도대체 무슨 마법……!”

그 순간 드러나는 두 개의 고리.

위이이잉-

지이이잉-

현자 에기오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설마!”

루인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마나홀입니다. 현재 2위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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