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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27화 (27/187)

<27화>

유카인이 멀어져 가자 루인 역시 발길을 옮기려던 차에 별안간 쟈이로벨의 영언(靈言)이 들려왔다.

-네놈이 과거에 대마도사가 된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군.

루인이 가늘게 미간을 좁혔다.

“또 실없는 소리를 하려거든 그만해. 진짜 시끄러워 죽겠군.”

무슨 놈의 마신이 이렇게나 말이 많은지 평소에도 머릿속이 어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전생에도 느꼈지만 쟈이로벨은 전혀 마신답지 않았다. 마계의 흔해 빠진 마군들조차도 이놈보다는 진중할 것이다.

-보통의 인간들과는 확실히 달라.

또 그 마도(魔道)의 경지 타령인가.

인간을 얼마나 하찮게 보고 있으면 ‘종주의 기질’에 이른 자신의 마나를 매번 쟈이로벨은 놀라워했다.

루인은 인간을 열등하게 깔아 보는 쟈이로벨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과거.

‘그’에 의해 펼쳐진 지옥 속에서도 루인은 분명 희망을 엿보았다.

각자의 고고한 역사와 전통을 포기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각국의 마탑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역사상 전례 없는 물량의 초인들이 탄생했으며, 인간들을 적대하던 이종족들까지 인류 진영에 합세했다.

적어도 베일에 감춰진 ‘그’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진 누가 보더라도 인류 진영의 압승이었다.

대륙 전체가 뭉쳤었으니까.

-너를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인간들 중에서 너 같은 놈들이 무수히 많다면 마계도 인간들을 다시 평가하게 되겠지.

쟈이로벨이 칭찬을?

쟈이로벨은 마신의 위계에 오른 마계의 군주들 중에서도 특유의 고고함과 자존심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그런 그가 다른 존재를, 그것도 인간을 인정했다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이룩한 마나가 네놈이 보기에 그렇게 특별한가?”

-나는 지금 네 마법의 경지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법의 경지가 아닌 다른 것?

루인은 그제야 호기심이 생겼는지 쟈이로벨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때로는 마학(魔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유는 알고 있겠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마법은 영원히 이어지는 불안의 굴레. 늘 불안정성과 변수를 확인해야 하고 상수라고 믿어 왔던 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완벽(完璧)이란 있을 수 없으며 성과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호한 루인의 대답에 쟈이로벨은 그제야 확신했다.

루인은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이은 존재였다.

-옳다. 그것이 바로 마도의 광기. 그러므로 마법을 추구하는 자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욱 편집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변수를 싫어하고 불안정성을 경계해 온 평생의 태도가 삶의 전반에서 묻어 나오는 거지.

점점 더 진중해지는 쟈이로벨의 영언.

-처음엔 너 역시 전형적인 마법사라 생각했다. 거기에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답게 철저히 자신의 행보를 설계하고 변수를 통제하더군. 때론 과감한 결단에 다소 놀랄 때도 있었지만 드러난 결과를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회귀 후 루인의 연속적인 행보는 철저한 계산 아래 펼쳐진 것.

위기에 빠진 가문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고, 특권과 오만에 찌든 동생들을 갱생시키며, 가문의 뿌리 속까지 드리운 배덕자들을 솎아 냈다.

이 일련의 과정은 한 치의 군더더기조차 없어서, 마치 쟈이로벨은 잘 짜인 한 편의 희극을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 마음에 혼란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네놈이 발카시어리어스 님을 소환했을 때부터였다.

루인이 물었다.

“어째서지?”

-태초의 어둠. 명백한 추측 불가의 존재. 그의 장난 같은 의지 하나에 이 인간계는 지옥으로 변할 수 있는 것. 그는 결코 인간 마법사 따위가 통제할 수 있는 변인(變因)이 아니었다.

-한데 넌 감히 그에게 조건을 걸며 협박했다. 마법사라면, 네놈이 진정 대마도사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지. 변수를 통제하지 못한 실패값은 절멸(絶滅). 그것도 명백히 높은 확률이었다.

쟈이로벨의 영언은 점점 떨리고 있었다.

-그만한 변인은 마신이라 불리는 이 쟈이로벨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유일한 답은 네놈이…… 네놈이…… 발카시어리어스 님의 의지를 모두 읽을 수 있다는……!

쟈이로벨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이 태초의 어둠이라 불리는 존재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허무한 말인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네놈은 그가 의지를 거두고 차원의 저편으로 되돌아갈 것이라 어떻게 확신한 거지? 그 확률을 정말 한없는 제로(0)로 봤단 말인가?

돌이켜 보면 루인의 모든 순간이 의심의 연속이었다.

루인이 스스로 심장을 찔렀던 순간.

자신이 엄청난 진마력을 희생하면서까지 부활시킬 것이라고 루인은 어떻게 확신한 것인가?

초인을 상대로 자신까지 소환해 도발했던 때도 그랬다.

초인의 역량을 충분히 알면서도 어째서 도발한 것인가?

심지어 그때는 진마력이 바닥이라 다시 그를 되살릴 수도 없었다.

인간의 육체에 혼이 갇혀 있는 순간은 단 십여 분. 그사이에 부활시키지 못한다면 루인의 영혼은 이 인간계를 빠져나간다.

방금은 또 어땠는가?

루인의 언변이라면 충분히 1왕자 아라혼을 설득시킬 수 있었을 터.

그럼에도 왜 굳이 도발하여 1왕자가 검을 뽑는 변수를 자처하는가?

그가 만약 진짜로 왕가의 미친 망나니였다면?

쟈이로벨로서는 루인의 모든 행동들이 전혀 마법사답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의 행동만 본다면 루인은 결코 마법사가 아니었다.

-내가 영혼 속에서 지켜본 인간들의 수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너는 지금까지 이 쟈이로벨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유형의…….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무슨……?

루인은 여느 때처럼 차갑게 웃고 있었다.

“네가 말한 대로 난 마법사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난 단 한 번도 변수를 상정한 적이 없어. 통제할 변인(變因)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고.”

루인은 대마도사.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바로 ‘확률’이었다.

루인이 변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쟈이로벨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불가! 거짓말! 명백한 거짓말이다!

이 쟈이로벨이 고작 인간 하나를 되살리기 위해서 진마력을 희생할 확률이 백 퍼센트라고?

태초의 어둠, 마계의 절대적인 혼돈을 도발하고도 무사히 넘어갈 확률이 정말로 백 퍼센트라고?

티끌 같은 변수조차 꺼리는 것이 마법사!

놈이 진실로 마법사라면 결코 이만한 변인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변인는 다름 아닌 감정이니까.

그것도 마계의 위대한 존재들의.

피식.

“발카시어리어스는 말이지. 억겁 동안 존재력의 본질을 추구해 왔지. 자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소멸도 마다하지 않을 놈이야. 그게 발카시어리어스다.”

전 마계의 지배자이자 태초의 어둠이라 불리는 그에게조차 영원히 따라다닌 콤플렉스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탄생을 증명할 수 없었던 것.

그는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지 못해 억겁 동안 고통받고 있었다.

“내가 그 비밀을 해결해 준 존재라고 떠벌인 이상 놈은 절대로 날 죽일 수 없어. 인간계의 소멸? 하하!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그야말로 광기에 찬 루인의 두 눈.

“그리고 마신 쟈이로벨은 말이지. 일부 마족들이 자신을 ‘날개 뜯긴 군주’라 부르며 수군거린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 그런 놈이 자신 앞에서 대마신 므드라를 칭송하는 인간의 죽음을 허락한다?”

-…….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쟈이로벨이라면 반드시 되살려 자신의 방식대로 고통을 주려고 할 게 분명해. 너무나 뻔해서 확률을 상정할 필요조차 없지. 변수? 풋!”

-너, 너 이 새끼……!

말문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분노하던 쟈이로벨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영언을 이어 나갔다.

-후…… 좋다. 그것은 시간을 거스른 회귀자의 특성이라고 치지. 하지만 초인과 1왕자는? 초인이 펼칠 무형의 검들을, 돌진해 올 1왕자의 예검을 정말로 변수로 상정하지 않았나?

회귀자의 특성상, 발카시어리어스나 쟈이로벨의 성격과 특성을 미리 경험했기에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인과 1왕자는 루인이 경험하지 못한 자들.

어떻게 반응해 올지 예측할 수 없는 자들을 상대로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다는 건 결코 마법사답지 않았다.

“뭐 그 정도 일에 거창한 변수를 따질 가치가 있나?”

-뭐?

“마신을 실물로 본 인간이 두려움을 온전히 떨칠 수 없는 건 상식이지. 게다가 왕세자가 되지 못한 1왕자 놈에게 하이베른가의 후원을 언급한 이상 욕망을 떨칠 수 없는 것 또한 입만 아프고. 이건 뭐 거창하게 확률 운운할 필요도 없는 통찰의 범위다.”

쟈이로벨은 욕을 내뱉을 뻔했다가 겨우 참아 냈다.

변수를 상정하지 않는 최악의 결과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생명이었다.

마법을 회복하지 못한 지금의 루인은 초인의 검을 막아 내지 못한다.

고작 1왕자의 예검을 막기 위해 또다시 생명력을 희생해 가며 혈주투계를 운용하는 것 또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

그만한 리스크가 뻔히 존재함에도 자신의 통찰력 하나만을 믿고 도박을 일삼는다는 건 지극한 비합리였다.

-이제 보니 네놈은 마법사가 아니라 도박사였군.

쟈이로벨의 비웃음에도 루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두 눈에는 회한이 어려 있었다.

“그럴지도.”

지옥 같은 지난 생.

한순간도 도박이 아닌 적이 없었다.

지난날 자신의 모든 선택은 합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희망에 의한 결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그런 희망을 꿈꾼 자의 발버둥.

“네가 날 마법사답지 못하다고 모욕하는 건 상관없어. 너니까. 쟈이로벨이니까. 하지만 과거의 너라면, 수만 년 동안 나와 함께 생각을 공유해 온 그때의 너라면 과연 지금의 날 마법사답지 못하다고 욕할 수 있을까.”

-바, 방금 뭐라고 했느냐?

루인은 분명 지난 생을 이백여 년 남짓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뭐?

수만 년 동안 생각을 공유했다고?

“우리의 영혼이 공허 속에서 부유한 세월은 솔직히 나도 가늠할 수 없어. 하지만 넌 분명 그때 그렇게 말했지. 적어도 내 생애보다는 긴 시간이라고. 그럼 그 정도 시간은 되지 않겠어?”

쟈이로벨은 경악했다.

루인이 말한 장소가 어떤 곳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허(空虛).

별도 성운도 빛도 암흑도 없는, 말 그대로 철저한 무(無)의 공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두려운 장소이자, 신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

-도대체 어떤 존재가 우릴 차원의 경계 바깥으로 추방했단 말이냐!

루인이 쓰게 웃는다.

“내가 수없이 부활하자 놈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거지.”

쟈이로벨은 루인이 말한 ‘놈’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인간이? 그게 가능할 리가……!

“어. 인간인데 그놈은 가능해.”

루인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지금의 내 모든 행동과 계획은 그 지옥 같은 공허 속에서 수도 없이 반복한 철저한 마인딩의 결과값이다.”

-…….

“더구나 발카시어리어스를 소환하여 존재력의 본질을 운운해 원하는 답을 얻는 계획은 다름 아닌 네가 알려 준 계책이지.”

순간, 쟈이로벨은 식어 버린 자신의 오드를 떠올렸다.

-혹시 네놈이 공허에서 돌아온 것은……!

뿌득.

이를 악문 루인.

“그래 쟈이로벨. 지금 이 시간, 이곳은 네 소멸을 짊어지고 도착한 곳. 그것이 내가 지금의 삶을 결코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이유다.”

과거의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쟈이로벨은 자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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