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26화 (26/187)

<26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루인을 노려보고 있는 아라혼.

감히 르마델의 1왕자를 상대로 왕실을 기만하는 보고를 청탁하는 주제에 뭐?

그 대가란 것이 고작 친구가 되어 주겠다?

서로 친구가 된다면 더 큰 이득을 얻는 쪽은 오히려 놈이었다.

명망 높은 귀족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구애의 손길을 보내오는 터.

자신은 다름 아닌 르마델의 1왕자.

르마델의 차기 국왕으로 유력한 존재.

분을 삭이던 아라혼이 채 운을 떼기도 전에 루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지금 나를 두고 셈을 하고 있는 건가?”

“가소롭구나. 그대가 아무리 베른가의 대공자라고 해도 지금까지 이 왕국에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다.”

아라혼의 얼굴에 어려 있는 냉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 어떤 능력도 알려진 바 없는 그야말로 무명의 귀족. 베른가의 전폭적인 지지라면 몰라도 고작 그대 따위로는 내 환심을 살 수 없다.”

“능력이라…….”

어이가 없다는 듯 묘하게 비웃고 있는 루인.

이윽고 루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홀 내부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능력을 가늠한다는 것은, 가늠하는 자의 역량이 철저히 비교 우위에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 그대는 날 가늠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1왕자.”

“무슨 소리냐?”

루인의 두 눈이 더욱 매서운 빛을 발했다.

“정식으로 왕국의 기수가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대뜸 상대의 명예를 모욕하며 시험하는 옹졸함.”

“그것은……!”

아라혼의 반론을 가볍게 손짓으로 물리치며 다시 입을 여는 루인.

“상대의 갑작스러운 반말로 무너진 평정심. 왕국의 내전 같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서슴없이 믿어 버리는 형편없는 사고력.”

“……그건 또 무슨 뜻이지?”

피식.

“하이베른은 왕국의 명예로운 기수가다. 왕실에 대한 충성과 기사의 신념으로 충만한 검술 명가가 고작 대공자 하나 죽었다고 해서 르마델 왕국을 적으로 돌릴 것 같은가?”

순간 루인의 눈빛이 더없이 강렬해졌다.

“그대는 내 모든 행동에 압도당해 정상적인 사고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실망?”

루인의 입가가 묘한 미소를 그려 낸다.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 왕족이라면, 아니 왕이 될 인간이라면 결코 함부로 드러내선 안 되는 감정이지.”

아라혼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놈이 8천의 병력을 운운했을 때, 순간이나마 가슴이 서늘했던 것은 사실.

그 짧은 순간에 놈은 자신의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을 읽은 것이다.

“물론 나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겠지. 그대가 두려워한 것은 폐하의 신망을 잃는 것. 그대의 무능한 협상 결과가 왕실을 향한 베른가의 적대를 불러일으킨다면…….”

“…….”

“6왕자 케튜스를 향한 한없이 자애로운 폐하의 마음은 확신으로 바뀔 테니까.”

“그, 그대가 어떻게?”

아라혼은 여느 때보다 놀라고 있었다.

물론 자신 역시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에게 장자 계승의 원칙을 내세운 것은 다름 아닌 왕실.

그럼에도 왕실이 성년이 훌쩍 지난 1왕자를 왕세자에 봉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자연히 귀족들이 기이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터.

그러나 그렇게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6왕자 케튜스를 언급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케튜스를 향한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은 자신만 느끼는 것.

기대 어린 표정.

자애로운 말투.

무료한 왕의 일상 속에서 케튜스를 바라볼 때만큼은 늘 감정을 찾아가는 아버지.

왕실의 비밀스러운 사정에 아무리 밝다고 해도 그것은 이 머나먼 대공가에서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대는 내 동생 케튜스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전혀.”

당연했다.

케튜스 왕자는 아직 사교계에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나이도 어렸고, 무엇보다 케튜스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케튜스의 실물을 본 사람은 극히 제한된 신하들 몇몇이 전부.

“케튜스를 본 적도 없는 그대가 어떻게?”

루인이 예의 의미 모를 웃음을 발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것은 그대가 또 한 번 쉽게 동요하며 내 예상을 싱겁게 증명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루인의 과거 속 ‘우울한 국왕’ 케튜스.

왕국의 멸망을 온몸으로 감내해야만 했던 불운한 왕.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그가 르마델의 차기 왕이 될 것이었다.

“폐하의 마음을…… 예상했다고……?”

국왕의 얼굴 한 번 마주하지 않은 자가 짐작만으로 왕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런 것이 진실로 가능한가?

사람의 마음이란 곁에 두고 평생을 살펴도 쉽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마음은 사고와 분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

아버지의 모호한 태도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 때문에 긴 세월 동안 치를 떨어 온 아라혼이었다.

한데 놈은 그런 자신보다 아버지를 더 잘 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대의 승낙 여부는 후일 왕성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 대신하지.”

어처구니없게도 놈은 확신에 찬 눈이었다.

마치 자신이 왕실에 평범한 보고를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한.

그러나 아라혼의 놀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전에 충고 하나를 하지. 왕국 내에서의 그대의 평판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려 온 자가 있을 것이다. 그대의 입장에선 그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아라혼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내 평판을 의도적으로 깎는 자가 있다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진실에 그럴싸한 거짓을 보탰겠지. 본디 선동이란 그런 것이다. 자그마한 흠을 부풀려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는 거지.”

“그런……!”

마치 전혀 알지 못했다는 아라혼의 태도에 루인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했다.

“밀행을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나?”

밀행(密行).

신분을 숨기고 백성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행위.

왕국의 민심을 살피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으나 호위 문제 때문에 여러 제약이 많았다.

호위 기사들 전체가 왕족과 함께 신분을 위장해야 했기 때문.

“없었군.”

루인이 바라본 아라혼.

고귀한 신분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왕족의 느낌.

그런 그가 여행자나 상인으로 위장하여 굳이 자신의 위세를 감출 리 만무했다.

“당장 밀행부터 나가 보는 걸 추천하지. 그대가 르마델 왕국 내에 어떤 1왕자로, 아니 어떤 인간으로 불리는지를 먼저 알아보는 편이 낫겠군.”

꾹 다문 입.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루인이 완곡히 입을 닫아 버리자 이제 답답한 쪽은 아라혼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번에는 예상되는 인물이 없는가?”

루인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로 한참 동안 침묵하자 왠지 모르게 아버지가 겹치는 아라혼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한 루인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화를 내고 두려워하다 궁금해하고 또 욕망을 드러낸다라…… 그대는 너무 열혈이군. 모든 감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

루인은 르마델의 국왕이 왜 아라혼을 왕재(王才)로 여기지 않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상대에게 읽힌다는 것. 예측 가능한 인물이 왕이 된다면 반드시 왕권은 약화되고 신하들의 권력이 강해진다.”

순간 아라혼은 자신의 어린 동생 6왕자 케튜스가 떠올랐다.

기사의 재능, 학문의 성취, 예술적 감각, 무엇 하나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수수하고 말수가 적은 놈.

그러나 루인의 말을 듣는 순간, 평소 바보 같다고 여긴 케튜스의 모든 점들이 비범한 것들로 변해 버렸다.

창백한 얼굴.

하지만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는 눈동자.

필요한 말만 하는 담백한 성격.

쉽게 드러내지 않는 욕망.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

그 외의 모든 절제된 행동들까지.

‘그래서……!’

케튜스의 모든 것들이 왕의 자질.

빌어먹을 아버지를, 르마델의 국왕을 닮아도 너무도 닮았다.

루인의 무심한 음성이 다시 들려온다.

“사람이 쉽게 변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대가 왕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성격을 고쳐야 할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무겁게 침묵하고 있는 아라혼.

꽤 긴 시간 동안 생각을 가다듬던 그는 어느덧 좀 더 깊어진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루인을 향한 아라혼의 두 눈.

그것은 더 이상 상대를 업신여기거나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내 친히 그대의 친구가 되어 주도록 하지.”

피식.

“루인 베른. 사자의 가호, 몽델리아 산맥의 정령들 아래 그 뜻을 받아들이겠다.”

루인이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아라혼은 왠지 가볍게 들리진 않았다.

“마치 무슨 서약 같군.”

여전히 웃음 띤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 루인.

대마도사 루인이 이름을 걸었다는 것은 피로 맺은 서약보다 더한 약속.

미래에 왕국을 통째로 지워 버릴 악마를 길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루인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대를 다시 만나러 오겠다. 그리 길진 않을 거야.”

“즐겁게 기대하지. 다시 만날 땐 그대가 왕세자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군.”

의자에서 일어나 돌아가려던 아라혼도 피식 웃었다.

“벌써 왕세자를 이용해 먹을 생각부터 하는 건가.”

“주었으면 받아 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별다른 반론 없이 자신의 욕망을 순순히 인정하는 루인을 응시하며 아라혼은 과연 범상치 않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놈에게 받은 것은 컸다.

왕실에서는 평생을 살아도 듣지 못할 말들.

실타래처럼 얽혀 있던 복잡한 마음이 이곳 베른가에서 모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보겠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아라혼이 처음으로 자신의 가문을 하이(High)로 존중한 것이다.

정중하게 예법을 다하는 루인.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1왕자님.”

그런 루인의 예법에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빠진 아라혼.

곧 그가 홱 하고 돌아서며 베른헤네움을 빠져나갔다.

아라혼이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루인이 냉정한 눈빛을 발했다.

“이제 나오시지요.”

베른헤네움 내부를 잔잔히 공명하는 루인의 차가운 목소리.

홀의 깊숙한 커튼 속, 투기를 완벽하게 지워 낸 채 몸을 숨기고 있던 유카인이 잔뜩 동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대공자님. 어떻게……?”

루인의 고저 없는 목소리.

“고생하셨습니다.”

투기와 마나를 아무리 완벽하게 지워 낸들 루인의 이목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 이상, 마신 쟈이로벨은 반드시 그 향(香)을 맡을 수 있으니까.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뜻이겠지요.”

유카인 삼촌은 하이베른가의 친위 기사이자 아버지의 절친한 친우.

그가 아버지의 명령 없이 단독으로 임무를 결정할 사람이라면 루인은 반드시 엿들은 죄를 물었을 것이다.

“르마델 왕실을 상대하는 일이니까요. 가주님을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고 들은 그대로 보고하시면 됩니다.”

잠시 망설이던 유카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무…… 위험했습니다.”

르마델 왕국의 귀족을 자처하면서 왕족, 그것도 1왕자를 상대로 감히 반말이라니.

더욱이 그와 오간 말들도 지극히 위험하고 또 대범했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파네옴 광산을 수습하여 본 가의 역량이 달라진다면 귀족들, 특히 렌시아 놈들의 이목은 피할 길이 없겠지요. 당분간만이라도 귀족들의 관심을 늦춰야 합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 하이베른가는 오랜 세월 귀족 사회와 동떨어져 기사의 순수만 고집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기수가의 명예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루인의 두 눈이 더없이 깊어진다.

“여타의 귀족들, 지방의 흔한 남작가들조차 왕실에 끈 하나씩은 다 쥐고 있습니다. 1왕자 아라혼은 하이베른가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끈입니다.”

“하지만 친구는 너무 나갔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예. 무모하고 급했지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왕실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지금의 가문을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하이베른가의 적나라한 현실 앞에 친위 기사 유카인은 더는 반론할 수 없었다.

칼날 같은 루인의 논리.

점차 그의 얼굴에 열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로 계속 남아 주실 순 없는 겁니까?”

루인은 말없이 햇살에 부서지는 샹들리에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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