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루인이 혼란스러워하는 현자 에기오스를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눈앞의 이 마법사는 르마델 왕국에서 반드시 포섭해야 될 인물 중에서도 1순위.
베른가의 일부 직계 혈족을 제외한다면 자신의 저주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은 마탑의 마법사들이 유일했다.
“왕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회포는 나중에 푸시지요.”
은은하게 웃으며 대공가의 예법을 표하는 루인을 향해 에기오스가 어색하게 마주 예를 표했다.
“아. 알겠습니다. 루인 님.”
그렇게 루인과 에기오스가 묘한 기류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 호기심이 동한 아라혼이 금방 의문을 드러냈다.
“왕국의 현자와 구면이라? 그렇다면 평범한 기사는 아니란 뜻이군. 그대의 직위와 위계를 드러내라.”
순간 에기오스의 고아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왕자님. 그는 베른가의 대공자입니다.”
“대공자?”
시종일관 고고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라혼이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베른가의 차기 기수, 대공자의 존재는 왕국 내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하이베른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공자의 실체를 대외적으로 밝힌 바가 없었다.
“이런 자가?”
하이베른가에는 왕국의 검술 천재라 불리는 데인이 있다.
왕국의 긴 역사 속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연소 기사.
그러나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면 적어도 그 이상의 역량이 느껴져야 정상이다.
그것이 베른이라는 가문의 무게감.
“…….”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풍겨 오는 것을 제외한다면, 투기 한 올 예리한 기세 하나 발산하지 않았다.
아라혼이 피식 웃었다.
“평범한 호위 기사 수준의 기량도 느껴지지 않는 자가 베른가의 대공자라니. 이제 이 사자의 가문도 이름뿐인 가문이 되어 가고 있는 건가. 대공가의 명예가 땅으로 추락하겠군.”
“와, 왕자님!”
한껏 당황해하고 있는 현자 에기오스를 뒤로한 채 아라혼이 더욱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됐고. 왕국의 기수(旗手)와 만나 얘기를 나누겠다.”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루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눈을 더럽혀서 죄송합니다. 다만 왕자님을 맞이하는 일의 전권은 이 루인, 베른가의 대공자에게 있나니. 부디 왕자님께서는 발길을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황당한 얼굴로 굳어 있던 아라혼이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하하!”
베른가의 대공자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일부러 치욕적인 도발을 했다.
용맹한 베른가의 대공자, 아니 적어도 그가 기사라면 당장 검을 뽑으며 결투를 신청해도 무방할 정도의.
한데 그 치욕을 견뎌 낸다고?
이렇게 쉽게?
흥미가 생긴 아라혼이 루인을 더욱 끈적하게 바라봤다.
“그대가 전권을 지니고 있다고?”
“미거하나마 아직은 제가 베른가의 대공자입니다. 대대로 저희 가문은 가주의 부재 시 대공자가 그 권위와 권한을 대리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아라혼.
그가 곧 입매를 비틀었다.
“뭐, 좋아. 베른가의 법도가 그러하다면.”
“그전에 왕자님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청하고 싶은 것? 그게 뭐지?”
루인이 담담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독대(獨對)입니다.”
그때 왕실 호위대장 디에올 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왕실 호위대는 어떤 경우에도 왕족에 대한 호위 임무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아라혼이 호위대장 디에올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이봐, 디에올 경. 이 아라혼이 고작 이런 자와의 독대도 두려워할 만큼 나약해 보이나?”
“하, 하지만 왕자님……!”
“시끄럽다. 독대? 좋아.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루인이 허리를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 * *
아라혼이 감탄한 표정으로 베른헤네움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천상의 빛이 사방으로 범람하고 있는 곳.
수백, 수천 개로 쪼개어진 빛살이 거대한 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광경이란 일종의 경이.
과연 베른가의 베른헤네움이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홀이라더니 그 이름값 그대로였다.
루인이 천천히 걸어가 홀의 중앙, 커다란 원탁의 의자 하나를 빼내더니 무심히 아라혼을 응시했다.
“앉아.”
“……그러지. 뭐?”
황당한 얼굴로 굳어져 있는 아라혼을 향해 루인이 피식 웃었다.
“예법에 목매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뭐 왕족의 권위를 내세우기 좋아한다면 다시 신하의 예로 대할까?”
왕실의 예검(禮劒)을 매만지고 있는 아라혼.
“잘 생각해. 여긴 베른의 대지야. 비록 유명무실해졌지만 여긴 독립적인 공국(公國)의 땅이라고. 그 검을 뽑아 내게 겨누는 순간 8천의 병력이 르마델을 향해 진격할 거야. 물론 그 전에 그대와 호위대들이 먼저 죽겠지.”
“너, 너 이 새끼……!”
드르륵.
루인이 마주 자리에 앉아 깍지를 꼈다.
“본 가문의 초대 사자왕께서 건국에 끼친 영향력은 건국왕 소 로오 르마델 님 못지않다. 초대 사자왕께서 조금만 더 권력욕이 있으셨다면 과연 어땠을까? 지금 그대와 내 자리가 바뀌었을 것 같다고 생각지 않나?”
“다, 닥쳐라! 죽여 버릴……!”
“해 봐.”
아라혼은 예검의 손잡이를 잡고 쉴 새 없이 몸을 떨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하이베른가가 어떤 가문이었는지.
왕국의 군권, 그 절대권력의 절반을 쥐고 있는 기수(旗手)의 가문.
왕국을 향한 그들의 충성이 변질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
놈은 모욕을 참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을 보자마자 얼마나 분노를 삭이고 있는지 곧바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이베른가를 모욕했던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살기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독대를 요구한 것이었나.
‘놈……!’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일부러 화려한 베른헤네움으로 인도하여 대공가의 위세를 드리우고, 서슴없는 반말로 자신의 냉정을 뒤흔든다.
게다가 왕가의 1왕자 앞에서 감히 왕국의 내전을 운운할 줄이야.
치밀하고 영리하다.
또한 무서울 정도로 대범한 놈이었다.
아라혼이 루인에게 느낀 압박은 왕실의 교활한 전략가들 이상이었다.
“내가 실수했군. 앞서 그대와 그대의 가문을 모욕했던 것을 사과하지.”
예검을 매만지던 손을 풀고 자리에 앉아 마주 웃고 있는 아라혼.
그런 그의 태도에 이번에는 루인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역시 녀석은 왕실의 권위만 내세우는 철없는 왕자 따위가 아니었다.
이런 변화무쌍한 능구렁이 같은 놈이 왕실의 망나니일 수가 없다.
루인은 그에 대한 평판과 소문이 어쩌면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 서로 살가울 필요는 없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하하, 본 왕자가 사과를 했음에도 그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겠다는 건가?”
루인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1왕자까지 보낸 것을 보니 왕실은 본 가문의 청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아라혼이 금방 얼굴에 장난기를 지우고 가면을 썼다.
“꼭 그렇지는 않지.”
피식 웃는 루인.
“파네옴 광산 따위야 왕실의 무수한 재산 중의 하나. 그런 광산 하나를 대공가에게 맡기는 일에 무슨 왕실의 큰 결단이 필요하지?”
“…….”
“르마델 왕실이 본 가문의 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우리 베른가의 명예를 다리오네가의 아래에 두겠다는 것. 남작가 따위가 운영하던 광산을 대공가에서 맡지 못한다? 왕실로서도 큰 부담일 텐데?”
루인이 품에서 펜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운영 주체만 달라질 뿐, 대공가라면 관례와 세율대로 철광석을 왕실에 상납할 것이고 이는 그저 현행 유지다. 왕실 입장에서는 사실 큰 고민이 필요한 일이 아니야.”
마치 왕실의 회의실을 들여다본 듯한 루인의 태도에 아라혼은 점점 가슴이 서늘해져 갔다.
“왕실이 이렇게 1왕자까지 보낸 이유는 다른 이유겠지. 대공가에게 파네옴 광산의 운영권을 허락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변방에서 기수가의 명예만을 위해 살아가던 땀 냄새 나는 기사의 가문이 갑작스럽게 이권을 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철(Iron)은 전쟁의 동력. 설마 대공가는 힘을 기르려는 것이 아닐까? 하이베른가가 다시 강성해지는 것이 왕실에 과연 도움이 되는 일인가? 아니면 또 다른 숨은 의도가 있단 말인가?”
“허튼소리.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기수가의 충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분이시다.”
루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시겠지. 하지만 신하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탁.
루인이 펜을 놓으며 깍지를 꼈다.
“우리 가문은 말이지. 왕국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계륵이다. 가까이할 수도 가까이해서도 안 되는 그런 집단. 난 잘 알아. 왕실이 본 가를 약화시키기 위해 해 온 오랜 일들을.”
섬찟.
아라혼은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섰다.
방금 루인이 했던 말은 르마델 왕실의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베른가의 충성은 의심해서도 의심할 수도 없다.
의심하는 순간이 바로 왕국의 재앙이었기 때문.
더욱 소름 돋는 것은 그가 한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베른가의 약화를 위해 해 온 왕실의 노력!
그 엄청난 비밀은 소수의 신하들을 포함한 왕실의 중추가 아니고서야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하, 하하! 그럴 리가?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지어내기 좋아하는 이야기꾼들의 헛소리다.”
루인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다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실의 예상대로 우리 하이베른가는 힘을 기르려고 한다. 파네옴 광산의 강철로 본 가의 부(富)를 늘이고, 다리오네 남작령의 유랑민들을 모두 영지민으로 받아들여 본 가의 버려진 봉토를 개간할 것이다. 그 옛날 베른 공국 이상의 위상을 되찾을 것이다.”
“뭐……?”
“하지만 그대는 왕실에 그렇게 보고할 수가 없겠지. 왕국의 기수, 하이베른가의 가주는 그저 불쌍한 유랑민을 보살피고 파산한 다리오네가의 영지를 안정시킬 뿐이다. 남작령 일대가 수습이 되면 광산의 운영권은 다시 다리오네가에게 귀속될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침묵하던 아라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지? 내가 왜 그래야……?”
한없이 투명한 루인의 동공.
“르마델 왕국의 이름 높은 귀족이라면, 성년이 지난 그대가 아직도 왕세자가 아니라 1왕자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지.”
“…….”
깍지를 푼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가 폐하의 마음을 온전히 얻을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지.”
덜덜.
아라혼이 동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왕국의 사자! 그대의 하이베른가가 내 옆에 서 주겠다는 건가!”
“아니. 본 가문이 아니지.”
“그게 무슨……?”
루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얻을 수 있는 건 나다. 1왕자 아라혼. 내가, 이 루인이 그대의 친구가 되어 그 옆에 서 주겠다.”
왕국을 파멸시킬 악마가 되기 이전에 길들인다.
그것이 르마델 왕실을 향한 루인의 첫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