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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24화 (24/187)

<24화>

성벽 위에 서서 저 멀리 구릉을 바라보는 데인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왕자 일행이 가문에 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헝클었기 때문이다.

르마델 왕국의 1왕자.

지금까지 자신이 들어온 소문들은 하나같이 경멸스러운 내용이었다.

왕가의 문제아.

왕가의 수업을 게을리하고, 틈만 나면 귀족가의 영애들을 희롱하며, 대낮에도 만취해서 돌아다니는 망나니 같은 사내.

왕족의 특권 의식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주변의 신하들을 쉴 새 없이 괴롭혀 대는.

보통 왕족에 대한 평판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그의 망나니 같은 성격이 이토록 왕국 내에 자자한 것을 보면 실상은 아마 더욱 처참할 것이다.

그토록 오만에 쩔어 있는 자라면 하이베른가에 도착해서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것이 분명했다.

대공가라고 해도 르마델 왕가의 혈통을 능가할 순 없다.

“또 무슨 걱정인 것이냐. 고모를 향한 미움이라면 이제 그만 접어라. 아버지께서 감당할 몫이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형님은 1왕자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동생의 물음에 루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알지. 너무나 잘 알지.’

아버지를 향한 복수심 하나로 르마델 왕국을 삼켜 버린 자.

1왕자였으나 결국 르마델 왕국의 후계로 지목되지 못한 그는 ‘그’의 세력에 투항하여 왕국 최대의 적으로 변신해 버렸다.

그의 복수는 단순한 복수 그 이상이었다.

르마델 왕국 전체 인구 중 절반 이상을 그의 군대가 도륙해 버렸다.

아라혼 그렐리아 니소 르마델.

‘그’의 심복 중에서도 잔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형님. 틀림없이 소란을 피우거나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습니다.”

“그러겠지. 아라혼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데인의 얼굴에 순간 경멸의 빛이 스쳤다.

왕가의 혈통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놈.

나이는 자신보다 많다고 해도, 기사로서의 역량은 비교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를 경멸하느냐?”

루인의 질문에 데인은 단호했다.

“아니요. 그냥 무시입니다. 형님이나 제가 마음 쓸 가치도 없는 인간이지요. 왕족의 허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놈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

그러나 루인은 아라혼을 그렇게 간단히 평가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르마델 왕국의 절반을 지워 버릴 수는 없다.

“데인.”

갑작스러운 형의 진지한 눈빛에 데인이 자세를 고쳐 잡고 더욱 귀를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왕국의 귀족들 중에 만만한 이들이 있더냐.”

잠시 고민하는 데인.

만만한 귀족이라…….

그런 자들이 있을 리가.

오랜 세월 왕국을 피로 물들인 귀족가들의 암투, 그 처절한 역사를 떠올려 보니 어떤 가문도 만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백 년 이상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라면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뱃속에 얼마나 많은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더없이 적절한 루인의 표현에 데인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형의 말대로 그들은 뱃속에 무수한 뱀을 품고 사는 음모와 계략의 화신들이었다.

“그런 만만치 않은 귀족들 중에서도 최고인 자들이 르마델의 왕성에 입궁한다.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닌 자들이, 가장 놀라운 지혜를 품은 이들이 국왕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루인의 두 눈이 침잠했다.

“왕족들은 그런 왕국 최고의 인재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간다. 평생 그들과 협력하거나 경쟁하며 지혜와 계략을 습득한다. 자신도 모르게, 누구보다 뛰어난 괴물이 되는 것이다.”

“…….”

“그가 망나니라고 했느냐. 그렇겠지. 하지만 그는 매일매일 왕국 최고 기사가 검을 다루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권력의 암투 속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계략들을 식사하듯 날마다 체험했을 것이다. 그의 눈과 귀로 전해지는 모든 정보들은 그 어떤 귀족가의 자제도 경험하지 못하는 엄청난 것들이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다시 루인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가 우습게 보이느냐.”

아라혼은 그 모든 자신의 경험들을 왕국을 괴멸시키는 일에 녹아 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꽤나 잘 해낸 악마였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데인. 왕족을 결코 만만히 보아선 안 된다.”

데인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놀라움 속에서도 다시 한번 형의 식견에 감탄했다.

자신은 왕성에 가 보기라도 했지만, 형은 지금까지 가문 밖을 나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형은 왕족을 직접 겪어 본 자신보다 훨씬 왕족들의 실체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지금까지 형이 보여 줬던 역량들이 너무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것 같구나.”

데인이 루인의 시선을 좇아 저 멀리 구릉 위를 다시 바라봤다.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화려한 마차.

펄럭펄럭.

마차 위로 우뚝 솟은 깃발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선명한 에메랄드 빛 드래곤 문양.

기사들의 질서정연한 호위를 받으며 구릉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마차는 틀림없는 르마델 왕가의 마차였다.

“내려가서 아버지께 내가 직접 그를 맞이하겠다고 이르거라.”

왕가의 행렬.

아무리 대공의 가문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맞이해야 한다.

하지만 루인은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  *  *

흔들거리는 마차 속에서 아라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책이 그렇게들 좋나?”

르마델 왕국의 현자, 에기오스가 특유의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아하게 미소 지었다.

“지혜란 끊임없이 앎을 탐구하고 함양하는 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지요. 또한 미지를 탐구하는 것은 제게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아라혼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거렸다.

“그거 병이야 병. 그 지겹고 난해한 마법 서책을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분명 질병이라고.”

왕국의 이름 높은 마법사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아라혼에게 있어서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잠시 말을 쉬게 하거나 숙영할 때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시간을 마법 서책에만 몰두하는 마법사들.

그 숨 막히는 광경을 한 달 이상이나 견뎌 왔으니.

“진짜 나까지 정신병이 걸릴 것 같다고.”

푸근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기오스가 마법 서책을 덮었다.

“거슬리신다면 그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 이제야? 이봐 현자 양반. 다 도착했거든?”

“음?”

깜짝 놀란 에기오스가 마차의 쪽창을 슬며시 밀었다.

이내 그의 시야로 가득 차오른 거대한 성채.

몽델리아 산맥의 지배자, 왕국의 깃발을 품은 사자의 가문이 위풍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이베른가.

웬만한 소국가 이상의 봉토를 품고 있는 르마델 왕국의 대공 가문.

“어휴. 1왕자가 뭐라고. 저 재미없는 자들을 다시 상대해야 하다니.”

하이베른가의 성채를 바라보던 아라혼은 벌써부터 하품만 해 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하이베른가란 고리타분 그 자체였다.

왕국에서 가장 기사도에 연연하는 자들.

그 엄격한 왕실근위대조차 이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에 비한다면 불량배다.

“르마델 왕가의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하이베른가는 대공가입니다.”

“흥!”

콧방귀를 날리던 아라혼이 비릿하게 비웃었다.

“대공가가 뭐? 그들이 르마델 왕가의 위에 존재할 수 있나?”

“그건…….”

“시끄러. 그들 또한 내 백성일 뿐이야.”

철컹.

다짜고짜 마차의 문을 열어 재낀 아라혼.

“빨리 해결하고 떠나자고.”

갑자기 아라혼이 마차에서 내리자 그를 호위하기 위해 기사들이 기겁하며 에워쌌다.

마차 안에서 에기오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자님. 아직 도착하려면…….”

하이베른가의 성채가 워낙 거대해서 가까워 보이는 것이지 도보로는 꽤나 먼 거리.

“마법사들은 이래서 문제야! 좀 걸어! 사람이 머리만 쓰면 그게 사람이야? 몸도 써야지!”

어쩔 수 없다는 듯, 에기오스를 포함한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이 하나둘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걸어가기를 한참여.

“음?”

아라혼이 발견한 것은 한 소년이었다.

산들바람에 의해 흩날리는 머리칼.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심한 표정.

예복에 새겨진 문양은 틀림없는 하이베른가의 그것.

하지만 너무나 이질적이다.

기사는커녕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깡마른 몸이었으니까.

가장 이상한 것은 놈의 불가사의한 눈빛이었다.

차분하고 고요한, 그야말로 흔들림 없는 눈빛.

하지만 아라혼은 하마터면 검을 뽑을 뻔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몸이 그렇게 반응했을 뿐이다.

“……넌 누구지?”

눈앞의 소년이 무릎을 굽히며 담담하게 예를 표했다.

“1왕자님을 뵙습니다. 하이베른가의 루인입니다.”

“루인?”

아라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놈은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르마델 왕가의 1왕자 앞에서 감히 하이(High)를 운운하다니.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왕족 앞에서만큼은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지 않는다.

‘이상해.’

그럼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건방진 놈을 만나면 욕부터 나와야 정상인데.

그때, 현자 에기오스가 화들짝 놀라며 루인을 바라보았다.

“루, 루인 님?”

언제나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던 왕국의 현자가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이라니?

아라혼이 에기오스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야?”

“예? 아, 물론 루인 님을 알지요. 그런데…….”

“그런데?”

연신 눈을 껌뻑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루인을 바라보고 있는 에기오스.

세월이 흘러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 그가 맞았다.

‘분명 서찰에는 그가 다시 죽어 가고 있다고 했다! 아니 무엇보다 이건!’

혈류 마나석.

왕국 마탑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완성한 고대의 보호 마법.

강렬하게 그를 수호하고 있어야 할 생명의 파동이 더 이상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루인이 현자 에기오스를 바라보며 흐릿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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