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공자의 명령에 의해 베른헤네움 내부에 있던 모든 기사들과 혈족들, 하인들이 물러갔다.
데인은 갑자기 형이 사람들을 내보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가 형을 쳐다보았을 때 루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투기를 거두셔도 됩니다.”
“…….”
카젠은 힘겹게 입술을 깨물면서도 질린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혈족들을 물리는 루인의 행동을 지켜보면서도 설마했었다.
한데 저 괴물 같은 아들놈은 자신의 몸 상태를 이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후우…….”
이윽고 카젠은 갑주 속에 감춰 두었던 아티펙트들을 하나둘 꺼트렸다.
불그스레한 빛을 머금고 있는 아티펙트들을 확인한 데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것들이 가문의 아티펙트 ‘포효의 씨앗’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본 것이다.
“아버지!”
일그러진 얼굴, 꽉 쥔 주먹으로 몸을 떨고 있는 데인.
포효의 씨앗.
목숨을 건 최후의 전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야 활용하는 결전 수단.
체내의 투기를 일시적으로 증폭하는 엄청난 효과가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갉아먹는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과연 포효의 씨앗을 활용한 후유증은 심각해 보였다.
아티펙트를 꺼뜨린 순간부터 아버지의 혈색은 눈에 띌 정도의 잿빛으로 변해 갔다.
또한 숨소리도 가늘어졌으며, 무엇보다 텅 비어 버린 듯한 아버지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데인은 안타까움보단 열불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왜!”
포효의 씨앗은 베른가의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쓰는 최후의 수단.
그 위험한 아티펙트를 왜 고작 만찬 자리에서 써 버렸단 말인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갑주를 하나씩 벗겨 가며 포효의 씨앗을 해체하던 루인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아버지의 투기는 전성기 시절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형……?”
피가 날 듯이 입술을 깨무는 루인.
“타락했다고는 하나 태생이 기사인 자들이다. 온전한 사자왕의 기량을 마주하지 않은 자들이 과연 반란의 뜻을 접겠느냐.”
루인이 아버지를 바닥에 누인 채로 데인을 향해 뒤돌아봤다.
“명심해라 데인. 명예와 위계만으로는 결코 기사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충성심의 원천이란 결국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는 것.”
명예니 신념이니 아무리 포장해 본들 결국 기사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이념은 힘의 논리.
이 단순한 사내들의 습성, 오랫동안 사자의 가문을 지배해 온 논리를 루인은 모르지 않았다.
‘아버지…….’
어두워져만 가는 아버지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가슴을 차갑게 식히는 루인.
‘모든 것들이 나로 인해 비롯된 일이었단 말인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작은 모두 아버지의 잃어버린 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투기가 온전했다면, 여리고의 환영 따위로 사자왕의 진면목을 감출 일이 없었다면.
이 거대한 검술 명가가 흔들리는 일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을 터.
모두 하이베른가의 가주, 왕국의 기수인 아버지가 가주실에서 침묵했기에 일어난 참극인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희생이, 이 위대한 가문을 격랑으로 몰아간 것이다.
“네 고모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고저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루인은 가슴속의 무언가가 욱하고 치미는 심정이었다.
이 와중에도 아버지는 대체…….
“네게 너무도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루인이 소에느의 징벌을 요구했을 때, 카젠은 아들의 얼굴에서 타는 듯한 분노를 읽었다.
그때 카젠은 확신했다.
루인 역시 옐콕 스프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
“레체아는 내 삶의 이유였다. 나 역시 지금도 이 들끓는 증오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갑주를 모두 떨쳐 낸 카젠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형제고 뭐고 다 죽이고 싶다. 녀석들의 피로 레체아의 넋을 위로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그런 유혹을 견디고 있다.”
카젠은 더없이 담담하게 루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네 고모 소에느를 우습게 여기지 말거라. 십 년 만에 가문의 기사들과 혈족들…… 팔 할을 휘하로 거둔 실력자다. 난 녀석의 수완이 단순히 권력이나 이권에 그쳤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가 않아.”
동의한다는 듯 루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휘하로 거둔 무수한 기사들.
아무리 치밀한 계략으로 기사들의 신념을 무너뜨렸다고 해도, 기사가 충성을 바친다는 것은 단순히 신념에 그칠 일이 아니었다.
신뢰(信賴).
사람이 사람에게 굴복한다는 건 결국 믿음의 문제.
재물을 뿌리고 자리를 약속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반드시 그 이상의 역량이 그녀에게 있을 것이다.
“이미 소에느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었다. 녀석을 죽인다는 것은 또 다른 무수한 증오를 짊어진다는 것. 결국 나를 증오하는 모든 이들을 베고 나서야 레체아의 복수를 끝마칠 수 있겠지.”
루인은 아버지의 비어 버린 마음, 참을 수 없이 무기력한 심정을 이해했다.
“……그리한다면 이 하이베른가에 뭐가 남는단 말이냐.”
아버지는 남편으로서 지켜 주지 못했다는 절망, 그 끝없는 분노와 자괴를 가문에 드리울 수 없는 것이다.
그 순간이 가문의 파국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데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자가 설마 고모란 말입니까.”
마침내 데인이 아버지와 형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참혹한 진실을 목도하고 말았다.
루인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데인. 내가 널 왜 이곳에 남겨 두었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먼저 묻고 있습니다!”
“나는 어떨 것 같으냐.”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은 눈빛, 끝없이 침잠한 루인의 시선이 데인을 향했다.
“모두가 나 때문이다.”
“형님!”
“나 하나 살리겠다고 아버지는 스스로 투기를 희생하셨다. 기사의 기량을 잃은 아버지는 결국 아티펙트에 의지하며 자리만 연명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 끝에서 배덕자들의 탐욕이 피어났다.”
점점 충혈되어 가는 루인의 두 눈.
“아버지는 어떨 것 같으냐. 삶의 전부였던 아내를 잃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텅 빈 마음을 우리가 한 자락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루인이 시선으로 아버지를 가리킨다.
“아버지의 눈을 보거라. 투명해져 더 이상 닳을 것도 없는 저 비어 버린 눈빛이야말로 미래의 네 눈이다. 무수한 절망을 딛고 일어나 오늘과 같은 참혹한 결정을 수도 없이 내려야 할 너의 삶이다. 가주(家主)란 그런 것이다.”
곧 대륙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닥칠 것이다.
고작 가문의 이권에 얽힌 원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망들.
그것이 데인이 마주할 미래, 그가 딛고 일어나야 할 엄혹한 운명이었다.
“아버지가 너와 내게 무엇을 바라고 계실 것 같으냐.”
“저는……!”
데인은 그것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당장 솟구치는 이 분노와 증오, 온몸에서 들끓는 피를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데아슈를 고모처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위폰을 니젠 삼촌처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함께 살아가는 현명함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형님!”
“가문의 저주에 걸린 아들이 내가 아닌 너였다고 해서 아버지의 선택이 달랐을 것 같으냐.”
“…….”
“아버지의 너름에 머리를 조아리거라 데인. 적어도 이 가문에서 너와 나만큼은 아버지를 경배하여야 한다.”
그런 루인을 바라보면서 카젠은 결국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 넓은 세상에서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이 얼마나 있을까.
자신 역시 전대 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주는 아들을 마주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아비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일.
카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누구보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 어울리는 루인을 바라보면서, 또다시 카젠은 아쉬움과 미련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는 여러모로 이 가주를 힘들게 만드는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젠은 웃고 있었다.
아들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대공자를 향한 믿음이 피어났다.
“루인. 데인.”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아들들을 품에 안는 카젠.
“가문의 무거운 짐을 너희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정말로 미안하구나.”
루인이 짐짓 정색하며 아버지의 품을 벗어났다.
“아직 은퇴는 이르지요.”
받아치는 카젠.
“이놈이? 방금까지만 해도 경배 운운하지 않았더냐?”
루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버지의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습니다. 혼란에 빠진 혈족들을 추스르고 기사들의 마음을 다시 모으셔야 합니다. 피폐해진 영지를 수습하시고, 비어 버린 가문의 재정을 온전히 회복하셔야 합니다. 더욱이 유랑민 문제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왕성에는 언제가실 겁니까?”
“…….”
냉정한 루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카젠은 기가 질려 버렸다.
산적한 문제를 애써 잊고 있었건만.
벌써부터 지독한 업무량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후…… 왕성엔 이미 파발을 보낸 상태다.”
루인이 가늘게 미간을 좁혔다.
“파네옴 광산의 운영권을 허가받는 일입니다. 아무리 저희가 하나뿐인 공작가라지만 그런 중대한 일에 파발로 뜻을 전해서야 되겠습니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라니요?”
카젠이 루인을 향해 눈을 부라린다.
“네놈이 스스로 가슴을 갈라 혈류 마나석을 제거하지 않았느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혈관까지 통째로 베어 버린 것이냐?”
루인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고 판단한 아버지가 했을 행동이 무엇일지 곧바로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설마 마탑의 현자들을 초빙하기 위해 또다시 대공(大公)의 인(印)을 사용하셨습니까?”
십 년 전, 아버지를 도와 고대의 혈류 마나석을 재현했던 현자들.
마탑의 현자들을 동원하는 것은 대공의 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침묵하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루인은 더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체! 제게 함부로 왕가에 빚을 지는 것은 위험하다고 가르치신 분께서 왜 자꾸만 그런 무리수를 두시는 겁니까!”
대공의 인을 동원해 왕국의 현자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막대한 빚.
그 일을 빌미로 국왕이 무엇을 얼마나 요구해 올지 벌써부터 루인은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무리수.
“나라고 대동맥이 끊겨 버린 놈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줄을 어떻게 알았겠느냐!”
“지금이라도 물려야 합니다!”
“나 역시 네가 회복한 모습을 보고 급히 파발을 보내 대공의 인을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더구나. 현자들이 1왕자와 함께 오고 있다는 소식이 먼저 가문에 날아들었다.”
“예?”
하필이면 가문의 혈족 외에 가장 먼저 만나는 전생의 인연이 바로 그라니.
르마델 왕국의 1왕자.
정말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
루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