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22화 (22/187)

<22화>

‘……사랑?’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아니 애초부터 이 가문의 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은 단어.

데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그만큼 소에느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데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어느새 대공자를 닮아 있는 듯한 그의 두 눈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였다.

이내 소에느의 멍한 얼굴이 데아슈를 향했다.

그러다 그녀는 또 한 번 굳어 버렸다.

대공자를 바라보는 데아슈의 눈빛.

그 시선 또한 데인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동경……?’

그 눈빛이란 자신의 형제들에게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

어떤 공포도 주눅도 없는, 마치 사랑하는 무언가를 바라볼 때의 그런 부드러운 감정.

지금까지 베른헤네움에서 일어난 일들이 너무도 충격적일 텐데도, 마치 데아슈는 대공자를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있는 듯했다.

힘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위폰.

굳건한 믿음으로 대공자를 바라보고 있는 왕국의 기수, 카젠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는 동안 저 일가(一家)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단 말인가?

소에느가 데인을 향해 물었다.

“난…… 이 고모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지금 자신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이 가문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

이 거대한 사자의 가문에서 ‘빚’이란 그런 고상한 것들이 아니었다.

재물.

권력.

목숨.

그녀가 경험한 빚이란 대체로 인간의 욕망과 밀접한 것들.

그러므로 데인의 주장에 말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고모. 형은 우리를 발아래에 두고 군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를 들개 취급했다면 가르침을 베풀고 스스로 가진 것을 내어 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가진 것을 내어 준다?”

대공자가 형제들에게 무언가를 나눈다?

소에느는 그런 일을 결코 들어 보지 못했다.

가문의 역사에서도 그랬고,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다른 모든 귀족가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대공자가 네게 무얼 줬지?”

데인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카젠이 가벼운 고갯짓으로 승낙의 뜻을 보내오자 다시 그가 말했다.

“고모, 형이 제게 준 것은 대공자의 위계입니다.”

그 순간.

소에느와 니젠은 물론 그들의 휘하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충격적인 표정으로 굳어졌다.

소에느의 멍해진 시선이 다시 오빠의 일가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침묵하고 있는 카젠.

무심한 루인의 표정.

어떤 동요도 없는 데아슈와 위폰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명백한 합의(合意).

“그, 그럴 리가 없어!”

대공자.

사자왕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존재.

왕국의 기수를 가문으로부터 약속받은 자가 형제에게 그 찬란한 영광을 모두 내어 줬다고?

왕국의 군권을 절반 이상 거머쥔, 가히 국왕과 비교되는 엄청난 권력.

이 나라 권력의 정점, 모든 기사들이 소원해 마지않는 그런 명예를 양보한다는 것.

그것은 이 거대한 검술 명가의 어떤 이도 상상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침묵하던 루인의 입이 열렸다.

“마침 잘됐군. 가문의 혈족들과 가신들이 모두 모인 이곳에서 선언합니다. 차기 기수는 데인입니다. 저의 대공자 지위는 언제까지나 임시적인 것이며 그가 준비가 끝났을 때 반드시 위임될 것입니다.”

충격적인 정적.

소에느만큼이나 놀란 사람은 카젠의 동생, 니젠이었다.

“하지만 왕법이……!”

귀족가의 장자는 특별한 사유 없이 계승을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이 귀족 세계의 권력 투쟁, 왕국의 혼란을 막아 온 르마델의 왕법.

그런 왕법을 어기면서까지 대공자의 지위를 포기하려는 것이 니젠으로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폐된 채 죽어 가던 대공자. 어차피 데인이 성년이 될 때까지만 유지될 수 있는 한시적인 지위였지요. 아버지가 그런 내 이름을 사교계 명부에 올렸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 가문이 그렇게 살가운 귀족가는 아니지 않습니까?”

“…….”

그런 아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카젠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루인의 말이 틀리지 않아 씁쓸했지만 한편으로는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게 이런 엄청난 면모가 있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교계 명부 따위가 아니라 왕실에 직접 데려갔을 터.

“르마델의 왕족들은 물론 그 어떤 귀족가도 제 존재를 모르고 있겠죠. 저는 확신합니다.”

확신이 아니라 그건 사실이었다.

과거, 루인이 가문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존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베른의 성을 내세우는 사기꾼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데인이 대공자가 되는 것에 또 무슨 장애가 있지요?”

“…….”

모두가 무겁게 침묵한다.

사교계에 적을 올리지 않아 이 왕국은 루인의 존재조차 몰랐기에 분명 왕법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대공자의 주장에는 ‘왜?’라는 물음이 생략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공자의 지위를 포기한다는 것인지, 그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니젠의 눈빛을 읽었는지, 루인이 담담한 음성을 이어 나갔다.

“별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유폐된 자가 왕국의 기수가 될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예상한 일이 아닙니까? 예정된 대로 데인에게 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불가!”

흥분하고 있는 니젠.

“어디까지나 그건 대공자가 정상적이지 않았을 때의 일! 또한 유폐지 밖으로 돌아다니는 너를 형님께서 제약하시지 않는다는 건 유폐의 명을 암묵적으로 철회했다는 뜻과 같다!”

그런 삼촌의 모습에 루인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란을 획책했던 삼촌.

한데 그런 그에게서 가문의 원로들에게서나 들을 법한 원칙이 흘러나오다니?

더구나 그 내용 역시 오히려 자신의 편을 들고 있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그렇게나 증오해 온 삼촌에게서 어떻게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지 루인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저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어떤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루인이 핏물로 그득한 베른헤네움 내부를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런 지옥을 만든 삼촌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조금은, 아니 많이 의외군요.”

이를 깨물며 진득하게 루인을 쳐다보는 니젠.

“함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더럽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누님은……!”

시작부터 욕망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왕국의 기수, 사자왕의 기나긴 겨울잠.

쉴 새 없이 동요하던 기사들.

분명 처음의 의도는 가주의 공석이나 다름없는 가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가문을 수습하기 위한 방법들이 모두 깨끗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결국 초심을 잃어버렸고 점점 더 욕망에 솔직해져 갔다.

브리제를 힐난하던 대공자에게 반박하면서도 계속 가슴 한구석이 무거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영지가 위기에 직면해도! 혈족들과 가신들이 무수히 동요해도! 그 모든 것들을 월례 회의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형님이었다! 끝끝내 가주실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은 저 왕국의 기수란 말이다!”

악다문 입, 니젠의 절규와 같은 외침이 카젠을 향했다.

“잊었던 내 열망, 그 오래된 꿈에 다시 희망의 불씨를 붙인 것도 형님이었다! 형님이 힘을 잃지 않았더라면! 형님께서 가주로 오롯이 건재했다면……!”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는 루인.

“눈처럼 허황된 말이군요. 삼촌의 녹아 버린 신념을 포장하기엔 이곳에 모인 순수한 자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진 않으십니까.”

니젠이 루인의 시선을 좇아 멍하니 순혈주의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역경과 유혹 속에서도 끝끝내 기사의 신념을 지켜 낸 자들.

그런 강직한 자들의 눈빛이란 태양처럼 강렬해서 마치 온몸이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니젠이 더욱 이를 악물었다.

“……죽음을 명하신다 해도 도망갈 생각 따윈 없다! 하나 하이베른가를 지켜 내고 싶었던 내 마음까지 부정하려 들지 마라!”

“기수의 자리를 빼앗아야만 이 가문이 지켜질 수 있다면 저라도 그리했겠습니다.”

비수처럼 파고드는 루인의 힐난에 니젠의 동요가 더욱 거세졌다.

“그래! 내가 틀렸다! 내가 모두 틀렸으니 대공자를 포기한다는 네 말을 철회해라!”

“이미 결정이 끝난 일입니다.”

루인의 두 눈에 의문이 번져 갔다.

“그토록 깨고 싶어 하셨던 장자 계승이 아닙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나는 우리 혈족의 입에서…….”

어느덧 루인의 동생들을 쳐다보는 니젠.

“사랑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자의 가문, 하이베른가에게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

분명 데인은 입을 열어 자신의 형을 말하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권위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마음.

그 마음은 분명 굴종이 아니라 순종.

동생들로 하여금 그토록 대단한 감정을 품게 만드는 자라면, 절대 대공자를 포기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삼촌.”

루인이 바보같이 서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힘없는 얼굴을 응시했다. 금방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기사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투기(鬪氣)를 이 빌어먹을 대공자에게 모두 희생하시고도 티 하나 내지 않던 미련한 아버지십니다. 그런 분이 사랑을 모른다? 하하!”

저토록 온 마음에 사랑을 안고 있으면서, 대관절 왕국의 기수가 뭐길래 감정을 숨기고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 크고 너른 사랑을.

“왜 아버지가 삼촌과 고모를 죽일 수 없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

가슴을 움켜쥐는 루인.

“사랑하는 이를 잃어 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사무치도록 느껴 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지.

집행자들의 엄청난 힘.

저런 자들을 휘하로 두고 있는 하이베른가의 가주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는 저렇게 또 버티고 계십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이성을 잃어버릴까, 그렇게 동생들마저 잃어버릴까 봐 함부로 입조차 열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런 마음을…….”

흐르는 눈물을 닦는 루인.

“저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멍하니 카젠을 쳐다보고 있는 니젠.

웬만한 기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 거대한 육체가 어쩐지 왜소하게 느껴졌다.

형님이 걸치고 있는 육중한 갑주와 검 역시 오늘만큼은 무거워 보였다.

언제나 굳건하기만 했던, 모두의 우상이었던 사자왕.

그런 사자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절절한 통곡, 마음으로 울고 있는 자신의 우상을 바라보면서.

마침내 니젠이 허물어져 내렸다.

털썩.

“형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심정으로 무너져 내린 니젠.

카젠은 말없이 동생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잊었다.”

카젠이 무릎을 굽혀 니젠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오늘 또한 잊을 것이다.”

그 말에.

소에느와 니젠이 동시에 흐느꼈다.

가늠할 수 없는 마음,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아득한 너름에 결국 굴복하였다.

빙그레 웃고 있는 카젠.

“내 대공자는 다르다고 하지 않았느냐.”

카젠의 시선을 좇아 멍하니 루인의 형제들을 바라보는 그들.

“우리의 시대는 끝났다.”

가주의 상징, 사홀의 용맹이 루인과 그의 형제들을 향했다.

“저기 새로운 베른이 태어났느니. 검을 높이 들어 그들의 시대를 축복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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