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데인이 몸을 떨고 있었다.
가문의 모든 것을 긍지와 영광으로 삼아 온 데인.
그러나 마침내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실이란 마주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역겹고 추악한 것이었다.
하이베른가의 기사 서열 10위, 그런 조디악의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는 비현실적인 광경.
아버지의 명령에 스스럼없이 자신의 왼팔을 잘라 내는 기사 브리제.
그토록 고아하며 자상했던 고모는 감히 가주의 면전에서 가문을 송두리째 부숴 버리겠다는 협박을 늘어놓았고.
기사도의 화신처럼 굴었던 삼촌은 저주를 이기고 살아 돌아온 조카에게 잔인한 악담을 퍼붓는다.
충성을 맹세했던 가신들, 그런 기사들의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한다는 것.
그것은 살아왔던 세계의 부서짐이요, 믿고 있던 가치관의 잔인한 부정이었다.
처음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
그 충격적인 실체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거대한 투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버지조차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형을 바라봤다.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이 모든 처참한 것들을.
투명한 형의 두 눈, 가슴을 저려 오는 그 무거운 감정에 마치 질식할 것만 같다.
이 지옥 같은 현실을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옥죄어 오건만.
오히려 형은 아버지께 권한을 요구하면서까지 저 더러운 진창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형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자신은 저런 냉철한 대공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그때, 카젠의 무거운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대공자의 청을 거절한다.”
강렬하게 타오르던 그의 투기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다만 대공자의 의견을 경청하겠다.”
그 순간 데인을 비롯한 모든 기사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리 대공자라고는 하나 가주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왕국의 기수 사자왕은 결코 그런 일을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경청이라니?
그제야 기사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의 주인은 이미 대공자를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이어 루인의 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료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채찍으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잠시 욕망에 눈이 멀어 재물을 착복했다면 더 많이 몰수하여 뉘우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사람의 논리로 응징할 수 있지요. 인정합니다.”
루인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소에느를 향했다.
“하지만 저 여인은 단순히 욕망을 이기지 못해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은밀하게 기사들의 의식을 파괴한 자입니다. 온갖 삿되고 저열한 방법으로 가문의 신념을 무너뜨린 자입니다.”
소에느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하이베른이라는 거대한 검술 명가의 정신과 의식을 타락시킬 수 있는 존재. 얼마나 사악하고 비틀린 마음이어야 가능한 것인지 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모두의 앞에서 당하는 치욕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소에느.
“그래서 저 여인은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악마입니다. 더욱이 그런 자가 가문의 혈족이라는 사실은 베른이라는 이름에 진실로 치명적입니다.”
“아, 아하하하하하!”
어깨를 들썩이며 기괴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에, 오랜 세월 그녀와 함께해 온 기사들조차 멍해진다.
소에느의 입가에 처절한 미소가 맺혔다.
“한 번도 신경도 쓰지 않았던 녀석인데…… 대단해. 꼭 빼닮았어. 저 원칙의 화신인 오빠가 왜 저렇게까지 신뢰하는 표정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아. 대공자라는 인간들은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대단해. 아주 질려 버리겠어.”
결국 그녀는 루인을 마음 깊이 인정했다.
루인은 검술 명가의 고매한 혈통 따위로 평가할 인물이 아니었다.
저 무시무시한 오빠와 같은 부류.
천재라는 단순한 수사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괴물 같은 인간들.
모든 재능과 운을 거머쥔 채로 태어난 신처럼 전능한 자.
그 어떤 훼방과 협잡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거대한 성(城)과 같은 자.
평생 자신의 오빠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아득함이 저 대공자에게도 느껴진다.
“나 하나 없앤다고 끝날 것 같아? 천만에! 이 고루한 왕국이 왕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 빌어먹을 가문의 가율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 저주와 같은 굴레, 이 품위 없는 싸움은 끝까지 계속될 거야!”
차가운 루인의 눈빛을 마주한 채로 비웃던 소에느가 니젠, 자신의 동생을 응시했다.
“니젠에게도 꿈이 있었어. 포기하기엔 너무도 간절한 열망이었지. 물론 그렇게 갈구하면 할수록 그는 더 비참해지기만 했어.”
다시 루인을 바라보는 소에느.
“……나는 어땠을까? 그래도 니젠은 가문의 모든 결정에서 소외되진 않았어. 하지만 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었지. 그저 좋은 가문과 맺어질 우리 안의 암컷. 내내 몸을 가꾸고 귀족의 예절과 품위를 강요당해 왔어.”
소에느가 기사들을 훑는다.
“다른 혈족들도 다르지 않아. 모두가 꿈과 야망을 강제로 거세당했어. 단 한 명의 인간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길러진 베른의 들개. 저들도 우리 안에 있었던 건 마찬가지야. 나약하고 비루한 수컷들이지.”
순혈주의자 측의 기사들 중 몇몇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카젠의 가벼운 손짓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분노를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 빌어먹을 차기 기수! 가문의 모든 안배와 배려, 지원과 영광을 거머쥐고 태어나는 자! 너 루인, 저 오빠가 지금까지 누렸고 앞으로도 누릴 그 모든 눈부신 것들! 다른 모든 이에겐 그건 절망이야! 잔혹한 거세지!”
소에느가 저 멀리,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 샹들리에를 바라본다.
악다문 입, 비명을 토해 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또다시 처절하게 흘러나왔다.
“눈부신 자들이 어둠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리가 없어! 본 가의 역사책에서 지워진 소에느는 몇 명일까? 앞으로는 몇 명이나 더 나타날까?”
그다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카젠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소에느는 또다시 나타날 거야. 그녀 역시 술에 취한 부랑자에게 스스로 처녀를 내어 주겠지. 베른가의 고귀한 공녀? 개나 주라지. 꿈도 꿀 수 없는 몸뚱이 따윈 오히려 진창에 더럽혀질수록 좋아.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조차 잊을 수 있거든.”
“소에느!”
소에느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가 처연하게 웃으며 오빠를 쳐다본다.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죽여 줘요. 더는 미련이 없어. 나도 끝내고 싶어요, 이젠.”
끓는 듯, 애잔한 그녀의 목소리에 파반 경과 몇몇 혈족들이 화답했다.
“나 역시 차라리 가문의 검에 죽겠소. 이 기수의 가문에서 더는 살아갈 자신이 없소이다, 가주.”
“속죄를 허락해 주십시오.”
“저도…….”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루인은 더없이 복잡한 심경이었다.
늘 가문의 배덕자들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온 자신.
하지만 왜 모르고 있었을까.
저 소에느가 아버지의 ‘데아슈’라는 것을.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떨고 있는 니젠 삼촌 역시 아버지의 ‘데인’.
저 무시무시한 투기의 외피는 그저 아버지의 가면일 뿐이었다.
참을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 누구보다 후회하는 심정으로 아버지는 또 저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
어쩌면 달려가서 안아 주고 싶을 것이다.
자신을 더 원망하라고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왕국의 기수, 대 하이베른가의 가주라는 위계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아버지는 그리했을 것이다.
그 모진 시간을 되돌아와 이렇게 아버지의 텅 빈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인간의 수명을 초월하여 대마도사로 살아온 이 낡은 영혼으로도 가문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루인은 소에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당위가 있지. 그래서 정말 궁금해.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거지?>
그녀의 욕망에 당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바라보지 못한, 아니 관심조차 없었던 것일 뿐.
가문의 모든 위계와 질서를 당연하다고 생각한 자신의 어리석음.
애초부터 하이베른가는 단순히 자신의 형제들을 올바르게 가르친다고 해서 다시 위대한 미래가 그려질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영원히 침묵할 것만 같은 카젠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 베른가를…… 다시 나를 믿어 줄 순 없겠느냐?”
투명한 얼굴, 소에느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비어 버린 두 눈이 향하고 있는 곳은 루인이었다.
“저 대공자를 봐. 벌써부터 그는 철저하게 동생들을 장악했어. 그 옛날의 오빠처럼 이미 홀로 빛나기 시작했지. 저 루인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직계와 방계들은 분명 우리처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거야.”
“내 대공자는 다르다, 소에느.”
순간 악에 받힌 듯한 소에느의 눈빛이 카젠을 향했다.
“닥쳐!”
그녀의 음울한 시선이 루인의 형제들을 훑는다.
“저 어린 데인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왕국의 검술 천재, 찬란했던 그의 영광은 금세 소싯적 이명으로 치부되겠지. 꿈꾸면 꿈꿀수록 멀어지는 열망. 충성을 강요받고 야망을 거세당하는 베른가의 들개. 그것이 남은 그의 인생이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녀의 슬픈 시선이 데아슈에서 멈춘다.
“……미안하다 데아슈.”
더욱 쏟아져 내리는 눈물.
데아슈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처럼 살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런 측은한 마음이 커질수록 대공자를 증오하는 감정도 함께 부풀었다.
저 어린 대공자의 눈빛은 정말이지 소름이 돋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식 체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치밀한 심계.
천재적 재능? 타고난 자질?
그런 건 데인이 타고났다.
저 대공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인간적인 면모들이 아니었다.
사람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런 아득함.
여기서 더 성장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때, 데인이 한 발자국 나서서 고모 앞에 섰다.
“고모. 저는 형님의 들개가 아닙니다.”
“뭐……?”
데인이 루인을 담담히 바라본다.
“제가 형님에게 무언갈 희생하고 양보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분 좋은 일이죠. 형님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니.”
“빚?”
“그런데 저는 아마 평생 갚을 수 없을 겁니다. 애초부터 형은 제게 뭘 요구할 인간이 아니거든요.”
소에느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빚을 졌길래? 대공자의 상속분을 모두 빌리기라도 했단 말이니?”
호탕하게 터져 나온 데인의 웃음소리.
“하하하하하!”
데인은 고모의 빈약한 상상력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 돈이라니!
정말로 이 왕국의 검술 천재 데인이 그런 하찮은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모.”
소에느의 가슴이 서늘해진다.
데인의 가라앉은 눈빛이 어느덧 대공자를 닮아 있었기 때문.
“진정한 기사의 영혼을 형에게 받았습니다. 사람이 평생 가슴에 품어야 할 가치를 배웠습니다. 무인이 경계해야 할 자만과 두려움을 배웠습니다. 또한.”
데아슈와 위폰의 어깨를 감싸 안는 데인.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형은.”
<형이라 부르고 있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
“어쩌면 그 자신보다.”
<잊지 마라, 데인. 나는 너의 형이다.>
붉어진 눈시울을 닦으며 데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