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20화 (20/187)

<20화>

기사들의 의식과 신념을 무너뜨린다는 것.

미약한 물줄기가 마침내 바위를 뚫어 내는 것처럼, 결국 그것은 지독한 인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소에느의 삶이란 역시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장악하고 싶은 욕망을 꾸역꾸역 참아 내며…….

천천히, 하지만 철저하게, 가문의 모든 저변을 은밀히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 치열했던 모든 것들이, 저 왕국의 기수 카젠의 강렬한 존재감 앞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당황스럽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

애써 잊으려 했었다.

하이베른가라는 검술 명가의 근본을.

하지만 오빠는 이 가문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이 본인의 권위를 증거하는지를 단번에 증명해 냈다.

그렇게도 인정하기 싫었던, 이 가문의 기사들이 우러르는 일관된 사상.

절대적인 기수의 존재, 그 무도하고 파괴적인 힘 앞에서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대공자!’

테이블 위에 펼쳐진 요리.

그 짧은 순간 저 대공자는 자신의 은밀한 의도를 칼날처럼 날카롭게 꿰뚫어 버렸다.

오래도록 숨겨 온 발톱을, 기사들의 의식을 허물어 온 그 치밀한 원리를,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들춰낸 것이다.

원래라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욕망들이 아니었다.

모두 저 대공자가 미리 기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게다가 근원을 알 수 없는 그의 놀라운 혜안보다 더 믿기 힘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잔잔한 그의 말 속에서 풍겨 오는 의식 체계.

그것은 17세 소년의 것이라 믿기엔 너무 비현실적인 것.

그런 대공자가 너무 충격적이라서, 오빠에게 투기가 흘러나왔다는 사실마저 놀랍지 않았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형님이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치켜뜨고 있는 니젠.

가주 카젠이 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그간의 모든 정보가 가리킨 결과였다.

마탑의 현자들을 끈질기게 추적 조사해서 결과를 얻었었다.

가주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나의 잔향이 환혹계 은폐 마법이라는 것 역시 알아냈다.

오랜 세월 그는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외출을 삼갔다.

소수의 심복들과 월례 회의를 주관해 온 것 또한 그 모든 신빙성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하나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이 거대한 투기란 그 옛날보다 오히려 더 강렬해진 느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때, 카젠의 투명한 눈빛이 기사들을 차례로 훑고 있었다.

“기사 가올에게 처결을 내리겠다.”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 가올.

흔들리는 그의 동공이 왕국의 기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대의 관할 아래 있는 땅 20에이커를 몰수한다. 보리스 지방의 순찰을 담당하는 탑주(塔主)의 지위 역시 반환하여야 할 것이다.”

결코 항거할 수 없는 강렬한 권위가 가올을 집어삼켰다.

기사 가올이 황급히 엎드리며 머리를 찍었다.

“……충!”

해부할 것만 같은 가주의 시선이 자신에게도 닿자, 기사 조디악 역시 무너지듯 엎드렸다.

“기사 조디악. 그대의 병권과 재산을 모두 몰수한다. 또한 에르혼 성의 성주 지위를 박탈한다. 그대의 새로운 계급은 일등위 견습 기사다.”

조디악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비웃는 자, 조디악의 서열은 붉은 눈의 기사 브리제의 바로 아래.

대 하이베른가의 기사 서열 십 위권을 자랑하는, 공작령 아니 왕국 내에서도 최고위급 기사인 그였다.

그런 그에게 견습 기사의 신분이란 너무나도 가혹한 처벌.

새파란 애송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생활하라는 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그가 차라리 은퇴를 결심했을 때, 또다시 카젠의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라. 하면 가율(家律)을 따르도록 하지.”

카젠의 두 눈이 더없는 살기로 이글거렸다.

“그대는 베른가의 혈족을 죽인 참혹한 중죄를 범한 것으로 모자라 실종이라는 그릇된 보고로 가문을 기망했다. 나 카젠은 베른가의 오랜 가율에 따라 참형을 명한다. 또한 그대의 가문이 후대로 전승될 수 없도록 그대의 장자는 거세될 것이다. 그는 아비의 죄를 속죄하며 평생 베른가에 봉사해야 할 것이다.”

“가, 가주님!”

조디악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엎드리며 자비를 구걸했으나, 안타깝게도 가주의 입에서 번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늦었다, 조디악. 내 판결은 끝났다.”

그 순간.

마치 허공에서 생겨나듯, 일단의 기사들이 그 존재를 드러냈다.

사자의 머리 형상이 양각된 가면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광활한 투기.

조디악은 그 아득함에 멍하니 굳어지고 말았다.

저들 하나하나가 자신 못지않은, 아니 자신을 능가하는 강자들.

그런 자들이 얼핏 헤아려도 삼십여 명에 육박했다.

가주의 집행자들!

그들의 힘은 자신들이 판단했던 수준보다 훨씬 더 아득한 것이었다.

“기사 조디악을 베른가의 기사 명부에서 삭제할 것을 명한다. 이 시간부로 조디악의 신분은 죄인으로 강등되었다. 온전한 가율대로 죄인을 처결하라.”

우우웅-

집행자들의 검이 일제히 울었다.

초대 가주로부터 이어진 오랜 맹약에 따라 그들은 곧바로 가율을 집행했다.

-충(忠).

결기가 끓어오른다.

집행자들의 응집된 투기, 태양처럼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스피리츄얼 오러들이 그대로 조디악을 향해 폭사된다.

“아, 안 돼!”

뒤늦게 투기를 끌어올리며 대항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

조디악의 몸은 집행자들의 스피리츄얼 오러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육중한 갑옷과 함께 부서졌다.

꽈지지직!

찰박! 찰박!

조디악의 파편이 비릿한 피내음과 함께 사방으로 쏟아져 내린다.

갑작스레 일어난 참극.

왕국의 기수가 보인 그 어마어마한 권위에 홀에 모인 모든 기사들이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기사 브리제.”

이어 가주의 호명을 받은 붉은 눈의 기사.

의외로 브리제는 담담했다.

다가올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인 듯, 그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대의 직위와 재산을 유지한다. 허나 그대의 팔 하나를 거두어 가겠다.”

의외의 결과.

브리제는 가주의 결정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한 결과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고서 카젠이 답해 주었다.

“그대는 데인을 검은 수리 계곡으로 인도한 자. 나는 그대에게 베른가의 후계를 위험에 빠뜨린 죄를 묻고 있는 것이다.”

가주의 후계를 위험에 빠뜨린 죄.

가율을 온전히 따른다면 죽음을 명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결연한 얼굴.

결국 브리제는 소매 속에 감추어 놓았던 단도로 자신의 어깨를 긋기 시작한다.

살을 가르는 소리.

꽈드득, 어깨뼈의 이음새가 갈라지는 소리.

투둑, 억센 힘줄이 잘려 나가는 소리.

그 모든 소름 돋는 소음들이 홀 내부에 잔인하게 울려 퍼진다.

억세게 다문 턱.

격렬하게 몸을 떨면서도 브리제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툭.

결국 떨어지고만 브리제의 팔.

브리제는 꿈틀거리는 자신의 왼팔을 집어 들어 카젠을 향해 공손히 내밀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스스스스.

강렬한 투기로 단숨에 브리제의 왼팔을 태워 버린 카젠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혈하도록.”

또 다른 기사들이 베른헤네움 내부로 입장했다.

가주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유카인과 그를 따르는 순혈주의자들.

명에 따라 완전한 무장으로 입장하고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결기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후 카젠의 처결은 죄의 경중에 따라 엄정하게 진행되었다.

가주의 냉엄한 음성이 자신들의 죄과를 낱낱이 드러낼 때마다 기사들은 쉴 새 없이 몸을 떨어 댔다.

가주는 자신들의 치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꿰뚫고 있었다.

끝없이 욕망을 탐해 온 자신들의 과거.

그렇게 그들은 완벽하게 벌거벗겨진 심정으로 모든 것을 순순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의 처결이란 가율에 비한다면 지극히 가벼운 것이기에.

주인을 잃은 온갖 지위와 이권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신념을 지켜 낸 순혈주의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 채로 온갖 설움과 차별을 감당하던 그들로서는 절로 눈물이 흘러내릴 만한 감동이었다.

폭풍이 지나갔다.

카젠이 가주의 자리에 앉자 그제야 기사들은 일제히 착석했다.

하지만 모두의 의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주동자인 여름 정원의 소에느, 아이올 성주 니젠에게는 가주가 그 어떤 죄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주의 입은 다물어졌으나 더없이 잔인했던 긴장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결국은 참지 못한 소에느의 입술이 벌어졌다.

“여전히 지독하시군요.”

카젠의 투명한 동공이 소에느를 훑었다.

“네게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소에느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맺혔다.

“무력을 되찾았으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아 낸 거죠?”

“…….”

“이런다고 내가 무너질 것 같아요? 천만에. 취할 수 없다면 부숴 버리는 것이 사자의 논리죠. 내겐 여전히 이 가문을 부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이어지는 카젠의 무심한 음성.

“내가 왜 늦게 왔다고 생각하느냐.”

순간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소에느의 동공.

그녀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베울하든 경의 진지에 모일 6천의 병력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를 추린 병력.

그 병력만 있다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끝났다, 소에느. 이미 베울하든은 본 가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뭐……?”

모든 병력을 베울하든 경의 진지에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소에느의 최측근, 극소수만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 비밀스러운 계획을 이미 카젠이 알고 있다는 것.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소에느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첩자를 심어 두었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그 어두운 회의실에 있었던 자들은 이미 철저하게 검증이 끝난 사람들.

오랜 세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끈질기게 관찰했었다.

그들 중에 첩자가 있었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무심하게 소에느를 바라보고 있는 카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순수를 믿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 그가 미리 이런 상황을 대비해 첩자를 심어 두었을 리는 만무한 일.

그럼에도 소에느의 계획을 미리 차단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대공자 루인이 건네준 반역자들의 명단 때문이었다.

‘루인…….’

집행자들을 투입해 확인해 본 결과, 그 정보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이제 카젠은 루인의 혜안이 대체 어디까지 미치는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카젠이 그런 자신의 아들을 조용히 응시했다.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데아슈의 두 눈을 감싸고 있는 루인.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깊이의 분노를 드러낸 채, 차갑게 서 있는 그를 바라보며 카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이냐?”

더없이 엄숙한 가주의 행사.

허락지 않아 절제하고 있던 루인의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처결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기사들이 두 눈을 치켜떴다.

이 거대한 검가에서 가주의 권위란 태양과도 같은 것.

한데 그 힘을 대리하는 대공자가 가주의 권위를 부정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냐.”

해부할 듯 기사들을 훑는 루인의 시선.

“기사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까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단.”

대공자 루인이 소에느를 직시한다.

“순결한 기사도를 타락시킨 원흉까지 용서하는 건 베른의 방식이 아닙니다. 형제의 정이 가주님의 판단을 흐리는 것이라면 잠시 이 대공자에게 권한을 이임해 주십시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