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기사 브리제의 붉은 눈이 쉴 새 없이 흔들거린다.
그는 대공자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소매 안의 단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에느의 비밀을 언급하는 즉시 사살. 그것이 그녀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대공자의 입에서는 전혀 궤가 다른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뜬금없이 하이베른가의 식단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대공자의 무감각한 음성이 또다시 잔잔히 울려 퍼졌다.
“일찍 일어나기 싫은 것, 훈련하기 싫은 것, 거추장스러운 갑주를 벗고 싶은 것, 달리지 않고 쉬고 싶은 것…… 무릇 검을 든 무인이란 태생부터 절제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는 삶이다.”
데인을 바라보는 대공자의 두 눈이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욕망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욕망에 길들여진다는 건 결국 절제를 잃어 간다는 뜻. 그런 무인은 필연적으로 나태해진다. 천천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불굴을 잊는다. 신념을 잃어버린다. 맹세를 외면하고 다짐을 멀리한다.”
마치 꿰뚫을 것만 같은 눈으로 자신들을 훑고 있는 대공자.
“저 눈들을 봐라, 데인. 욕망에 몸을 맡긴 자들의 눈이다. 신념을 외면한 자들의 눈이다. 맹세를 저버린 자들의 눈이며 도의를 잊은 자들의 눈이다.”
브리제가 쥐고 있던 단검의 손잡이가 찌그러진다.
참을 수 없는 분노,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갈망을 참아 내느라 그는 찢어져라 입술을 깨물었다.
“부정하고 싶은가. 붉은 눈의 기사 브리제여.”
그래! 틀렸다 대공자!
누구보다 빨리 일어났고, 누구보다 빨리 움직였다!
쉬지 않았다. 게으르지 않았다. 검을 닦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육체를 벼려 냈다고 누구에게도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렇게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루인은 피식 웃었다.
“억울해 보이는 눈이군.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싶은 건가.”
“함부로……!”
루인이 망설임 없이 브리제의 말을 잘랐다.
“그럼 어째서지? 왜 그대의 검은 그 옛날로부터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건가?”
“그게 무슨!”
“누구보다 타오르는 열정으로 검을 수련했건만 경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이유를 모르겠지. 이해가 되지 않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를 찾을 수 없겠지. 아니, 아마도 그대는 이런 고민마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
열기로 가득했던 브리제의 두 눈이 차갑게 식고 있었다.
대공자의 말은 치명적이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특히 검에 대한 고민마저 잊어버렸다는 대공자의 마지막 말.
그 말은 너무도 서늘하고 섬찟해서 브리제는 마치 온 마음이 해부되는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기사의 드높은 검이 육체 수련만으로 가능한 것이 되었지? 혹시 그것마저 잊어버렸나? 정신이 함께 성장하지 않는 기사의 검이란 결국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루인이 갖은 향으로 드레싱한 예리체니의 열매를 포크로 찍었다.
“그대의 정신이 향한 곳은 대신 이런 것들이지. 아름다운 것, 향기로운 것, 맛있는 것, 부드러운 것, 편한 것.”
툭.
루인이 포크에 찍혀 있던 예리체니의 열매를 털어 낸다.
“아름다운 여인, 값비싼 보석, 장인의 명검, 힘 좋은 명마.”
루인의 차가운 눈동자가 다시 천천히 기사들을 훑는다.
“재물, 노예, 기름진 땅, 병력, 지위, 권력.”
씨익.
“그 마음에 온통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었으면서 감히 검의 경지를 바랐나 기사 브리제?”
브리제가 입술을 가득 짓씹고 있을 때, 니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하하하핫!”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돌연 강렬한 눈빛을 빛내며 루인을 직시했다.
“병든 닭처럼 십 년 동안 누워만 있던 놈이 멀쩡하게 돌아온 것도 믿기 어렵거늘, 이런 입심이라니. 제법이구나.”
루인이 자신의 삼촌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자신이 아는 역사에서 저 사내는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선택만을 일삼던 자.
“틀렸다 대공자. 그것들은 보상이다. 하이베른가의 봉토를 지키는 기사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영지민들을 다스리는 공작가의 특권이요 예부터 존재해 온 귀족의 법도다.”
루인이 피식 웃다가 데아슈를 바라봤다.
“데아슈. 저 필렛은 어부들이 평생 한 번이라도 낚기를 소망하는 리쉬어리로 만든 것이다. 저 스튜는 북부의 희귀 품종 구쿠스의 고기로 끓인 것. 저 붉은 빛이 도는 오믈렛은 화산새의 알.”
“……응.”
간략하게 들었을 뿐이지만 값비싼 요리 재료라는 것을 데아슈는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먹겠느냐, 데아슈.”
데아슈가 곱게 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빠. 먹지 않을 거야. 돌아가서 호밀빵을 먹겠어.”
더없이 포근한 미소로 데아슈를 바라보는 루인.
“왜 먹지 않겠다는 것이냐.”
“내가 이 요리들을 먹지 않으면 결국 내 식탁에 올라오지 않을 거야.”
그녀가 저 멀리 홀의 벽 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장 마리나를 바라봤다.
“내가 아낀 식비만큼 집사에게 요구할 거야. 마리나의 급료를 올려 달라고.”
짐짓 너스레를 떨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루인.
“이유가 궁금하구나.”
“난 단지 맛있는 걸 참으면 되지만, 그걸로 마리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 난 마리나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그렇다. 마리나는 충분히 감동하여 너의 손과 발, 눈과 귀가 되어 줄 것이다.”
“응! 귀족의 재물은 그렇게 쓰는 거니까!”
루인이 빙그레 웃었다.
“똑같은 요리를 바라보면서도 누군가는 절제를 말하고 누군가는 특권이라고 주장하는구나. 재미있구나 하이베른가여. 가르칠 자는 욕망을 포장하고 배울 자가 오히려 절제를 다짐하다니.”
“감히! 네놈은 위아래도 없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무시무시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삼촌을 바라보며 루인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미치겠군. 가문이 언제부터 이따위로 돌아가게 된 거지?”
순간.
루인의 눈빛이 변했다.
품위 없는 욕이 나오려던 니젠이 단번에 목소리를 삼킬 만큼, 그 눈빛은 가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니젠 성주. 그대의 눈앞에 있는 자는 가주의 부재 시 그 권위를 대리하는 대공자다. 감히 이 몸 앞에서 위계를 내세우는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주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
가율에 따르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드높은 위계를 지닌 이는 바로 대공자였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힘을 수반하지 않는 위계란 약자의 덧없는 객기.
권력이 다하면 왕조차도 죽임을 당해 온 것이 역사거늘.
“우습구나. 고작 그따위 몰골과 기량으로 대공자의 위계를 운운하다니.”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약한 육체.
투기 한 올 느껴지지 않는 비루한 기량.
그런 놈의 눈빛이 왜 이토록 거슬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깟 놈이 아무리 고매한 기사도를 읊어 봤자 궤변으로 들릴 뿐이다.
루인의 강렬한 눈빛이 다시 기사들을 향했다.
“보아라 데인. 과연 닿을 수 없는 자들 같으냐.”
데인은 형의 시선을 좇아 찬찬히 기사들을 훑고 있었다.
브리제, 에이거, 조디악.
그리고 눈앞의 삼촌 니젠.
그 옛날부터 자신의 우상이었던 쟁쟁한 기사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다르게 보였다.
과거처럼 그들의 경지가 까마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풍겨 오는 투기나 예리한 기세 따위에 의해서 느껴지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서는 사람 자체가 발산하는 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로소 데인은 고개를 꺾어 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금방 깨달았다.
그들이 달라진 게 아니라 자신의 시야가 달라졌다는 것을.
그들에게는 형을 바라볼 때처럼 압도적인 무언가가 없었다.
“아니요 형님.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 모두 닿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어 들리는 담담한 음성.
“그런 자들이 감히 나의 기량을 말하고 있구나.”
데인이 웃긴다는 듯 피식 웃었다.
비록 한없이 마르고 투기 한 가닥 느껴지지 않은 형이었으나 그야말로 아득하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신(神)처럼, 저들과는 달리 형은 모든 것이 의뭉스럽고 드높다.
평생 검을 닦는다고 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런 아득한 절망이 저들에게선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군요. 이제 막 4성에 이른 저도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니.”
루인이 가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함의 경지라는 것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깨어나지 못한 자의 미몽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법이지.”
마법(魔法)과 마도(魔道)를 구분 짓는 명확한 기준은 위계와 같은 경지가 아니라 정신.
검의 경지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검성 역시 늘 정신의 순수를 강조했었다.
“……호호.”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만 있던 소에느가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결국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는 것을.
무려 십 년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움켜쥐기까지.
저 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오빠의 여인 레체아마저 죽였다.
마음에도 없는 모정을 연기했다.
철없는 어리광에 상처를 입어 가면서도 끝까지 안고 품었다.
혹여라도 모진 마음이 들킬까 봐 표정 하나 몸짓 하나 모두 계산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화려한 드레스 대신 깔끔한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데아슈를 보자마자 뭔가 틀어졌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데인의 달라진 눈빛을 본 그 순간.
그를 앞세워 가문을 집어삼키려는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대공자!’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가문의 아이들이 대공자로 인해 완전히 변해 버렸다는 것을.
소에느가 멍하니 자신의 동생 니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끝났다.
거사에 성공한다고 해도 기사들의 마음을 온전히 모을 수가 없다.
그때.
왕국의 기수, 하이베른가의 가주 카젠이 홀에 입장하고 있었다.
그는 예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사자관을 머리에 쓰지도, 금린사자기를 손에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가 걸치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육중한 갑주, 그리고 가주의 검 ‘사홀의 용맹’이었다.
샹들리에로부터 부서진 빛살들이 그를 비추었다.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한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카젠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사자와 같은 그의 부리부리한 두 눈이 베른헤네움에 모인 기사들을 천천히 훑고 있다.
천상에서 강림한 기사, 그 자체였다.
“…….”
“…….”
기사들은 그 압도적인 모습에 예를 표하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잊고 있었다.
몽델리아 산맥의 지배자 사자왕(師子王)을.
영광을 부르짖지 않아도 명예로운 자.
검을 치켜들지 않아도 용맹스러운 자.
누구보다 드높은 기사, 왕국의 기수 카젠은 이 하이베른가의 기사들 모두가 품어 온 영웅이었다.
구구구구구구구-
거대한 홀이 흔들린다.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투기의 파장.
그에게서 피어오른 압도적인 힘이란 기사의 피를 들끓게 하는 사자의 포효.
누군가가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부터 사자왕은 화려한 가주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심마에 빠졌다는 소문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세월이 무려 십 년이었다.
기사의 신의(信義)도, 추구했던 가치도 희미해져만 가는 세월.
영웅의 부재에 흔들렸다.
전장에서 바라볼 등이 없으매 절망했다.
하나, 갑주를 입고 투기를 발산하는 그를 보는 순간.
욕망을 탐해 온 마음이, 나약하게 흔들리던 기사도가, 모두 차곡차곡 개어져 머나먼 저편으로 날아갔다.
척.
“기사 브리제. 한없이 경원하는 마음으로 사자왕을 배알하나이다.”
브리제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군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때.
“기사 미카도. 한없이 경원하는 마음으로 사자왕을 뵙습니다.”
“기사 에이거…….”
“기사 조디악…….”
털썩 털썩.
소에느의 기사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는다.
루인도 대공자의 예법으로 예를 표시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느덧 가주의 오른편에 서서 함께 기사들을 굽어보는 대공자 루인.
악에 받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몸을 떨고 있는 소에느.
날카롭고 차갑던 그녀의 눈빛이 어두운 증오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