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회의실.
커다란 원탁의 중심에 서 있는 촛불이 위태롭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촛불이 너울거릴 때마다 간헐적으로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얼굴들.
그렇게 모두가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을 때 소에느의 고운 입술이 달싹였다.
“결심했어요.”
“……결심이라니요?”
“이미 알고들 계시잖아요. 집행자들이 우리 모두를 살피고 갔다는 걸.”
“음.”
하이베른가의 집행자들.
그들이야말로 가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원천적인 힘.
개개인의 이름도 무력도 알려진 바 없는, 그야말로 철저히 장막에 가려진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베일을 벗고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을 때 언제나 하이베른가에는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
가주가 집행자들을 동원한 이상 이번 일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설마 가주께서 우리를 가율로 옭아맬 수 있겠습니까?”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 사내는 베울하든 경.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 모인 기사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왼손 기사 에이거.
붉은 눈 브리제.
비웃는 자 조디악.
폭풍 수호자 베울하든.
다른 영지였다면 충분히 패자로 군림하고도 남았을 기사들.
그리고 이런 강력한 기사들의 기량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드높은 자.
투기를 잃어버린 가주로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현 가주의 동생 ‘니젠 아이올 비셀 베른’이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흥. 지금에 와서 집행자들을 끌어들여 봤자 이미 판세는 우리에게 기울어져 있다. 형님에게 남아 있는 건 고작 친위 기사 유카인과 그를 따르는 몇몇 기사들, 그리고 소수의 순혈주의자들이 전부지.”
그런 니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율을 내세운다는 것은 가주가 전면전을 각오한다는 뜻.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주 측에는 승산이 없었다.
비록 명분이 가주 측에 있다 해도 힘의 우위가 전제되지 않은 명분이란 나약한 객기.
하지만 그런 다수의 생각과는 다르게 여전히 소에느는 불길한 생각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 병력을 준비하세요. 만약을 대비해 병력을 남겨 놓는 자가 있다면 제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니젠이 미간을 찌푸렸다.
비교조차 무의미한 압도적인 전력 차.
그럼에도 끝까지 모든 힘을 쥐어짜 내어 전면전을 대비하자는 소에느의 태도가 그는 이해되지 않았다.
“누님답지 않군. 왜 그리 걱정이 많은 거지? 우리가 설마 집행자들 따위에게 밀릴 거라고 생각하나?”
여기에 모인 혈족들과 가신들의 전력은 하이베른가의 전체 역량에서 팔 할에 육박한다.
아무리 가주의 집행자들이라고 해도 수천 명에 이르는 기사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런 수적인 우위를 떠나 지금 이 원탁에 모인 실력자들의 기량만 해도 결코 만만한 전력이 아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길었다.
왕국의 기수라는 허울을 빼 버린다면 가주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모든 정보를 미뤄 봤을 때 힘을 잃어버린 것 또한 확실하다.
“난 이미 뜻을 밝혔어.”
소에느가 단호하게 말하자 기사들은 더 이상 반론하지 않았다.
암막의 뒤에서 이 거대한 하이베른가를 실질적으로 조종하는 자는 바로 그녀.
비록 니젠이 대단한 기사라지만 소에느의 뜻을 앞지를 순 없었다.
그때, 소에느 다음가는 상석에 앉아 있는 기사 파반 경이 입을 열었다.
“숙영 훈련 중인 병력까지 모조리 불러들였소. 집결지는 어디로 할 것이오?”
이미 파반 경이 소에느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에 모두가 신음을 삼켰다.
그가 소에느의 숨은 정부(情夫)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모르는 자는 없었다.
당연히 그의 입김은 소에느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성과 가장 가까운 베울하든 경의 진지를 집결지로 해요. 연회 기간 동안 준비를 끝내야 해요. 할 수 있겠죠?”
“물론이오. 훈련 직후라 다들 감각이 살아 있소.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큰 걱정 없을 것이외다.”
“좋아요.”
모두의 가습이 갑갑해졌다.
설마하니 정말로 내전(內戰)이라니.
하이베른가의 긴 역사를 통틀어도 몇 번 없었던 일.
그것도 하이베른가의 현 가주를 상대해야만 하는 현실은 승패를 떠나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왕국의 기수를 탄핵했다는 오명은 앞으로 내내 자신들을 괴롭힐 것이었다.
니젠이 소에느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가 더 문제지 누님. 왕성에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왕께서 이 나를 새로운 왕국의 기수로 받아들일 리 없잖나?”
가문의 장자로 이어지지 않은 기수의 자리.
르마델 왕국은 한 번도 하이베른가의 권력 다툼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왕국은 오랜 전통에 따라 장자 계승, 직계 옹립을 원칙으로 했다.
“……니젠.”
소에느는 자신의 동생이 얼마나 기수의 자리에 목말라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역량이 없었다.
지략도 경영 능력도 무엇보다 그에겐 사람을 따르도록 만드는 카리스마가 턱없이 부족했다.
“니젠. 나는 데인을 옹립할 거야.”
“데인……?”
니젠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진다.
누나의 입에서 상상도 해 보지 않은 대답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누님이 그럴 수가 있지? 십 년이 넘도록 이 내가 무슨 짓을 해 왔는데! 감히! 이 나를! 나를……!”
분노를 활화산처럼 드러내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 니젠에게로 소에느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기수 쟁탈전을 받아들일 자신은 있니?”
왕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쟁쟁한 기사들의 도전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는 ‘하이렌시아가’의 무수한 강자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니젠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하이렌시아가의 이름 높은 기사들이 떠올랐다.
천 개의 환영 율펜.
궁구하는 자 실바릴.
사색하는 바람 메데인.
모두가 한결같이 강한 기사들.
하지만 무엇보다 하이렌시아가의 가주 환상검제 레페이온.
그는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기사였다.
소에느가 멍하니 굳어 버린 동생을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데인은 어려. 일이 성공한다면 어차피 너와 내가 후견인으로 나설 수밖에 없지. 충분히 쥐고 흔들 수 있으니 그쯤에서 타협하자.”
하지만 니젠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하더라도 기수의 명예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하이베른가의 혈족이라면 모두 바라 마지않는 꿈의 완성. 그토록 차지하고 싶었던 영광이었다.
“제길!”
소에느가 분을 삼키는 니젠을 뒤로하고 다시 좌중을 훑어보았다.
“최악의 경우, 내일 모두 구금될 수도 있어요. 일단은 동요하지 말고 순순히 가율을 따르세요. 끝까지 내 신호를 기다리세요.”
그녀가 베울하든 경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대연회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진지에 모든 병력이 집결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준비가 끝났을 때 그때 결행하세요.”
“충!”
순간 소에느의 두 눈에 강렬한 적의가 아로새겨졌다.
“특히 조심해야 할 건 대공자. 그놈이 교활한 입을 놀리기 시작하면 그 즉시 사살해도 좋아요.”
그녀와 함께 대공자를 살해하려고 했던 기사들 몇몇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공자는 가주와 마찬가지로 소에느의 약점을 쥐고 있다.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명분은 더욱 힘을 잃게 된다.
이미 소에느는 얼마 전의 회의에서 가주 카젠의 사살을 언급한 상태.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가주마저 죽여야 하는 마당에 대공자라고 그 비참한 운명을 비껴갈 순 없었다.
긴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수십 년 만의 혈족대연회가 어느덧 내일이었다.
* * *
거대한 홀.
천장의 유리 모자이크로부터 흘러들어 온 햇빛이 또 한 번 화려한 샹들리에에 부서진다.
그렇게 천상의 빛이 사방으로 범람했다.
루인은 수백 개로 쪼개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쉼 없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기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여전하구나.’
왕국의 귀족이라면 하이베른가에서 열리는 사교계 파티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이곳 때문이었다.
하이베른가의 명성답게 압도적으로 화려하며 또 놀라운 규모를 자랑하는 홀.
왕성에서 평생을 보내 온 왕족들조차도 감탄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홀, ‘베른헤네움’이었다.
루인의 차분한 시선이 베른헤네움 내부를 훑었다.
머나먼 동쪽에서 왔다는 값비싼 카펫들이 수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왕국의 이름 높은 장인들이 만든 아름다운 테이블들, 화려한 보울들, 미각을 돋우는 갖가지 꽃들이 한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시종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일 때마다 왕국의 진미가 차례대로 테이블에 오른다.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듯, 시종들의 표정에는 경건함마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루인이 천천히 걸어가 대공자의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곁에서 쭈뼛거리던 데인에게 그가 말했다.
“내 옆에 앉거라.”
데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혈족대연회는 그 엄숙한 성격만큼 모든 자리에 지위와 서열이 안배되어 있었다.
대공자는 가주 바로 아래의 서열.
당연히 그의 옆자리는 데인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허락하겠다 데인. 사양치 말고 앉거라.”
“예 형님.”
루인은 갑자기 딱딱하게 구는 동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엽기는커녕 훌쩍 커 버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게 자라나고 있는 그의 마음가짐이 기꺼웠기에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혈족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홀에 입장하고 있는 사람은 소에느와 니젠,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휘하 기사들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고 또한 노골적이었다.
소에느는 가문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기사들이 자신의 휘하라는 것을 더는 감추지 않았다.
각오한 듯, 결연함으로 가득한 표정들.
그때, 데아슈가 위폰과 함께 홀에 입장하고 있었다.
소에느가 빙긋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지만 데아슈는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루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루인 오빠 옆에 앉아도 돼?”
“물론이다. 여기 앉거라 데아슈.”
루인은 소에느에게 배정되어 있었던 의자를 쭈욱 빼냈다.
루인은 배덕자들의 위계와 서열을 결코 존중할 마음이 없었다.
소에느의 동그란 이마에 작은 주름이 잡힌 것도 잠시, 그녀는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루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찍 와 계셨군요. 대공자.”
소에느가 앉자 그녀를 따르는 기사들이 일제히 착석하기 시작했다.
배정되어 있던 자리가 밀려 버려 부산을 떨고 있는 기사들.
루인의 눈매가 잠시 비웃음을 그려 내더니 이내 테이블 위의 요리들을 훑었다.
“데인. 늘 이런 것을 먹고 있었더냐.”
데인이 형의 시선을 좇아 요리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볼 수 없는 화려한 요리들도 있었지만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예. 몇 가지 요리가 더 추가되었지만 늘 먹던 것입니다.”
루인의 무심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름 높은 검가의 식단이란 철저한 영양을 바탕으로 한다. 훈련량을 소화할 수 있게 해 주는 풍부한 식단. 육체의 발달과 성장을 자극하는 양질의 식단. 그래서 검가의 식단은 대체로 맛이 없고 투박하다. 그런데 이 무수한 요리들이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느냐.”
데인은 벌써부터 입안에 고이기 시작한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맛있어 보입니다.”
“그렇다. 온통 네 혀를 중독시키고 코를 즐겁게 하는 요리들뿐이구나. 죄다 기름지고 달고 또 짠 것들이다. 깊은 맛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인간의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전부 그런 것들뿐이다.”
“…….”
데인이 침묵하자 다시 루인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기사의 수련과 성장을 배려하지 않는 식단은 정말이지 오랜만이군. 도대체 무슨 의도일 것 같으냐? 왜 이름 높은 검술 명가 하이베른의 식탁이 이 지경에 이른 것 같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네 날 선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함이다. 욕구에 중독시켜 기사의 절제를 앗아 가기 위함이다. 적어도 식탁에 앉아 있는 시간만큼은 달콤한 맛에 취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는 루인의 두 눈이 소에느를 향했다.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이 기수의 가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