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혈족대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공작령 곳곳으로 퍼져 나갈 무렵.
하이베른가의 가신들은 영지민을 동원해 연회에 필요한 물자들을 가문의 성내로 들이고 있었다.
각지의 희귀한 특산물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거리.
당연히 데인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수레의 행렬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형이 단호한 얼굴로 자신을 나무랐기 때문이다.
<연회 준비로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이 와중에 구경이랍시고 너와 내가 가문을 활보하고 다닌다면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네 동선마다 짐을 나르던 하인들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할 것이고 당연히 그들은 더욱 힘겨울 것이다. 귀족이라면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되도록 동선을 줄여야 한다.>
‘쳇. 누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을 쓴다고.’
소싯적부터 귀족의 특권에 흠뻑 빠져 살아온 데인으로서는 한 번도 하인들의 처지를 헤아려 본 적이 없었다.
무릇 하인이란 모시는 귀족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
물론 그런 불만을 데인만 겪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왜 하필 내 방이냐구!”
수수한 원피스 차림의 데아슈가 불청객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루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데아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왕 숨죽이고 있을 거라면 어여쁜 레이디의 방이 좋지 않겠느냐? 우리 같은 시꺼먼 사내들에게는 한없이 기분 좋은 일이다.”
데아슈가 발그레해진 홍조를 두 손으로 감싸며 루인을 매섭게 쏘아봤다.
“뭐, 뭐래…… 빨리 다들 나가! 나가라구!”
“어머니의 얘기를 더 듣고 싶지 않은 것이냐?”
“엄마 얘기?”
“어머니는 언제나 데아슈를 가장 예뻐하셨지. 네게 해 줄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는데.”
“빨리! 빨리 해 줘요! 다 들을래!”
“그래, 데아슈.”
그제야 위폰도 쪼르르 달려왔다.
“형! 내 이야기는 더 없어?”
“……있지.”
“그럼 나도 들을래!”
위폰을 바라보던 루인의 얼굴에는 측은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무렵 위폰은 갓난아기였다.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데아슈와 달리, 위폰에게는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데인은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옛 추억에 젖어 드는 형과 동생들을 바라보다가 테라스를 향해 걸어갔다.
4성의 경지에 이르자 내부에서 투기가 시도 때도 없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바람이라도 맞으며 투기의 열기를 식히고 싶었다.
테라스에 오르자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이 시야에 가득 펼쳐졌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한결 기분이 가벼워진 데인은 곧바로 새롭게 진화한 자신의 투기를 체내에서 운용하기 시작했다.
투툭!
투기를 잔뜩 머금은 온몸의 근육들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진검을 쥐고 투기를 불태워 보고 싶었으나 형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
<막 경지를 이룬 자들이 가장 흔히 하는 실수가 바로 새로운 힘에 취해 무턱대고 힘을 남발하는 것이다. 아직 너는 새롭게 얻은 힘의 한계를 파악하지 못했다. 기쁨에 취해 투기를 과용하다가 자칫 몸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네 미래가 퇴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얻은 힘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먼저다. 네 육체와 정신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무인으로서 이룬 네 그릇이 어디까지인지 끈질기게 관찰하고 시험해 보거라. 검을 잡는 것은 그 이후다, 데인.>
그런 형의 말을 들었을 때 데인은 정말로 가슴이 서늘했다.
분명 가문의 비전으로 내려오는 오랜 가르침이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것.
한계를 모르고 투기를 남발하다가 폐인이 된 기사들의 이야기.
어렸을 때부터 검술 스승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가르침이었다.
‘조금씩.’
데인은 투기를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럴 때마다 무리를 느낀 몸의 구석구석이 비명을 질렀다.
육체가 견딜 수 있는 한계, 그런 투기의 확장성을 면밀하게 살폈다. 여느 때보다 신중하게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시간을 잊을 만큼의 무아지경이었다.
데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갈 무렵의 늦은 오후.
저 멀리 거대한 몽델리아 산맥으로부터 어둑한 어스름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잘하고 있구나.”
문득 들려온 루인의 목소리.
데인이 난간의 옆쪽을 응시했다.
“형? 언제…….”
“한참 됐다.”
“아. 미안.”
루인이 피식 웃었다.
어느덧 검술 천재의 오만한 태가 조금은 잦아든 모습.
“이제 사과도 할 줄 아는 것이냐.”
데인이 형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사람처럼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건 여전했으나 왠지 모르게 형은 심각해 보였다.
데인은 형의 시선을 묵묵히 좇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영지민들이 시종들에게 쉴 새 없이 짐을 건네고 있었다.
“영지민들의 표정을 살피면 영주의 역량을 알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다시 형을 응시하는 데인.
“영주의 치세가 훌륭하다면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있다. 여유, 넉넉함, 웃음, 존경 그런 긍정적인 것들이 묻어 나오지.”
루인의 시린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반대로 영주의 치세가 무능하거나 악랄하다면 영지민들의 얼굴에 피폐함만이 가득할 것이다. 절망과 비애, 한탄과 좌절, 분노와 원망…… 온갖 억눌린 감정들이 그들의 표정에 드러나지. 하지만 그 정도는 그래도 희망이 있는 편이다. 분노한다는 것은 아직 삶의 의지가 남아 있다는 거니까.”
호기심이 생긴 데인이 다시 루인의 시선을 좇아 영지민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가 그는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형이 언급한 그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래. 너도 느꼈겠지. 저들은 이미 텅 비어 버렸다. 더 이상 분노할 힘도 원망하는 마음도 모두 사라진 것이다.”
“…….”
“빼앗기고 짓밟혀도 그들은 화가 나지 않는다. 감정을 잊고 사는 것이다. 아무리 원망하고 분노해 봤자 자신들의 삶은 결국 제자리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거지.”
“…….”
“너는 저리도 공허한 자들이 진정 사람으로 보이느냐?”
데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가문은 왕국의 기수 하이베른가다.
그야말로 최고의 가문이요, 왕국의 하나 뿐인 공작가.
그런 용맹한 군주의 보호를 받는 자들, 공작령의 영지민들이라면 모두가 가슴 뛰는 영광으로 살아갈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한데 스스로의 삶을 불행이라 느끼지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니?
“인정하지 못하겠느냐. 그도 그럴 것이다. 이 위대한 검가의 문제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현실을 보고도 직시하지 못하는 다름 아닌 너와 같은 이들 때문이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어린 너만 해도 이런 반응이지 않느냐.”
“아, 아니야! 짐을 나르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너무 확대 해석 하지 마! 하이베른가의 영지민들이 그럴 리가 없어!”
루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가문의 문제는 왕국의 어떤 권력도 어쩌지 못하는 절대봉토(絶對封土)다. 왕국의 기수를 수없이 배출해 온 전통의 검술 명가. 왕족에 버금가는 대 공작가.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진 철옹성과 같은 그 권위가 이 가문을 고이고 썩게 만든 거다.”
“형!”
루인이 망루의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는 가문의 깃발들을 바라봤다.
“어떤 외부의 침입도 영지민들의 이주도 왕령으로 금지된 절대봉토. 그렇게 안주해 온 우리 가문은 오래전부터 경쟁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현명한 영주와 정치적으로 비교되지도, 강력한 군주와 영토를 걸고 싸우지도 않았다. 그저 귀족들의 아귀다툼을 관망하며 고고하게 날개를 펼쳐 우아함만을 자랑했지.”
루인의 말이 데인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하지만 루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습지 않느냐? 수백 년 동안 본 가의 봉토가 줄어든 것은 패배해서 빼앗긴 것이 아니다. 그저 경작할 사람이 사라지자 미개척지처럼 변해 버린 거지. 오랜 세대를 걸치며 영지민들의 수 자체가 줄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가문의 영역 절반 이상이 빈 땅이다.”
마치 가문의 역사가 송두리째 부정되는 기분.
결국 데인은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분노를 두 눈에 가득 드러냈다.
“나의 가문을……! 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마!”
루인의 음울한 시선이 허공을 갈랐다.
최후의 때에 이르렀을 때.
하이베른가의 영지민들은 가장 먼저 ‘그’의 백성이 되길 자처했다.
대부분의 영지민들과 가문의 재산까지 모두 잃어버린 검술왕은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 미쳐 버렸다.
그렇게 폐인처럼 지내던 그는 결국 한 줌에 불과한 병력을 이끌고 무모한 원정을 나섰다.
하지만 검술왕이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곳은 전혀 의외의 장소였다.
검술왕이 선택한 마지막 전장은 대륙의 악마 ‘그’의 군단이 집결하고 있던 ‘테네브리가 성’이 아니었다.
그가 나타난 곳은 오히려 아군 측.
인류 최후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던 검성의 숙영지였다.
짝!
“언제까지고 기수가의 명예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할 것이냐! 또다시 용렬한 영주가 되고 싶은 것이냐 데인!”
시뻘게진 얼굴을 부여잡은 채로 황당하게 굳어 버린 데인.
“그렇게 의심이 든다면 직접 영지 순찰을 가 보거라! 너를 보고 엎드린 영지민들을 일일이 일으켜 세워 그들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란 말이다!”
순간적으로 과거의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지 말았어야 할 말까지 쏟아 내 버렸다.
하지만 루인은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데인을 현명한 군주로 만들고 싶다면 뼛속 깊이 새겨진 하이베른가의 선민의식부터 그의 마음에서 솎아 내야 했다.
“직시해라 데인!”
영지민들을 다시 바라보는 데인.
“본 가를 향하는 저 무수한 재물 중 그 어디에 영광이 있느냐! 비어 버린 마음으로 수확한 작물이다! 사람다움을 포기한 자들의 결과물이다! 그런 허무한 재물을 쌓고 쌓아 만든 이 거대한 성채가 너는 그토록 자랑스럽단 말이더냐!”
데인의 열기 어린 눈동자가 모든 영지민들을 치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결과는 같았다.
어떤 의지도 감정도 읽을 수 없는, 그야말로 비어 버린 표정들.
형의 말을 궤변으로 치부하기에는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 현실이 너무 적나라했다.
데인은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갑주가 부끄러웠다.
이 값비싼 갑주 역시 저들의 허무한 마음을 거둬들인 결과물.
기수가의 명예.
공작가의 긍지.
평생 데인이 의심하지 않았던 그 모든 숭고한 가치들이 그렇게 산산이 해체되고 있었다.
“형…….”
루인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무너져 내리는 데인을 와락 감싸 안았다.
“울지 마라. 눈물을 허락하지 않았다.”
꽈악.
이를 깨물며 데인을 더욱 강하게 안는 루인.
“당장은 마음을 누일 곳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기사의 신념이란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완성해 가는 것이다.”
루인이 데인의 양 어깨를 잡고 격랑으로 일렁이고 있는 그의 두 눈을 직시했다.
“여기서 무너지지 마라 데인. 너는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
“과연 내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할 수 있다 데인. 네 열정은 누구보다도 드높다. 네가 못한다면 이 가문의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옛날 데인의 심성이 비틀리지만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루인은 그가 누구보다도 강한 기사, 훌륭한 영주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석양 아래 호수처럼 잔잔한 눈으로 서 있는 형을 바라보며 비로소 데인은 깨달았다.
자신이 진정한 기사가 된다면 형의 등을 바라보며 성장한 결과물일 것이다.
위대한 군주로 역사에 이름을 새긴다 해도 그 또한 형이 바라던 가치를 좇은 결과일 것이다.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루인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따르겠습니다. 형님.”
루인은 드디어 그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새로운 대공자.
왕국의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영주가 될 이, 그는 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