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6화 (16/187)

<16화>

칼끝처럼 뾰족 선 성채와 곳곳에서 휘날리는 사자기(獅子旗).

드넓은 수련장, 간간이 들려오는 기합 소리.

아름답게 우거진 정원, 만발한 꽃들.

데인이 바라보고 있는 가문의 풍경은 모두 그대로였으나 단 하나만은 달랐다.

저기 루인, 자신의 형이 아름드리나무 아래 서 있었다.

오직 그 하나만 가문에서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데인은 마치 자신이 살던 세계가 송두리째 바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뚝.

또다시 의지와 상관없이 떨어진 눈물.

형은 어머니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흐느끼는 형제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한 참이나 어머니를 말하던 형.

어머니의 특이했던 몸짓.

자주 짓던 표정.

좋아했던 옷과 장신구, 그리고 꽃들.

흥얼거렸던 노랫말, 듣기 좋았던 웃음소리.

그리고 그녀가 우리들을 부르던 애칭.

형은 담담하지만 한없이 슬픈 눈으로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기억하자꾸나. 지금의 우리가 어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건 단지 이 정도뿐이지만 그럼에도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어 주실 분이다.>

형제라는 것은 하이베른가라는 커다란 울타리 속에서 좀 더 친밀한 구성원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그 관계란 그저 같은 성, 같은 아버지를 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형과 동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슬픔으로 가득 차오른 그 마음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감정.

굳이 입을 열어 그 슬픔의 크기를 묻지 않아도 모두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들이 자신과 다를 리가 없을 테니까.

<서로의 눈을 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같은 추억 아래 살아가는 형제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나 역시 이 순간을 잊지 않으마.>

그렇게 말하는 형의 눈이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 가늠할 수 없는 그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버렸었다.

도대체 형은 무엇을, 얼마나 더 견뎌 왔을까.

그런데…….

그렇게 감정적으로만 살 것처럼 굴다가 또다시 형은 무감각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무언가를 수련하고 있는 형.

팟- 팟-

데인은 형의 주변에서 터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불꽃들을 바라보다 문득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왠지 형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윽-

검을 들어 호흡을 가다듬는다.

후웅 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호선이 그려진다.

가벼운 내려치기.

그러다가 문득 데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수천수만 번을 연습했던 단순한 내려치기였는데 무언가가 이질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후웅-

이번에도 같은 느낌.

한 번도 이런 걸 느껴 본 적이 없었기에 데인은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에게로 어느덧 루인이 다가왔다.

“이제야말로 진검을 들어도 되겠구나.”

완연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형.

나아간 힘도 깨달은 경지도 없었다.

이런데도 자신을 기사로 인정한다고?

그렇게 어린아이 취급을 해 놓고서는?

“또 무슨 소리야 그건?”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데인에게로 또다시 루인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검에 네가 담겼다 데인.”

루인이 데인의 목검을 어루만졌다.

“과거의 네 검은 그저 궤적, 동작에 불과했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강하게. 그뿐이었지.”

인정하기 싫었지만 데인은 반박을 할 수 없었다. 형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네 검엔 네 의지가 담겼구나. 동생들을 지키고 싶은 것이냐?”

“…….”

데인은 단지 그뿐이 아니라 형을 닮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러다 결국 목소리를 삼켰다.

“그래. 아직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겠지. 직접 보는 것이 빠를 것이다. 목검을 다오.”

데인에게 목검을 건네받은 루인이 가슴 속에서 단도를 꺼내 목검의 끝을 뾰족하게 깎아 내기 시작하자.

비록 전투용은 아니지만 엄연한 가문의 제식용 목검이었기에 데인은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형!”

아랑곳하지 않고 루인은 목검의 끝을 더욱 뾰족하게 깎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아름드리나무로 다가간 루인.

그는 이내 목검의 끝으로 나무의 중심에 점을 팠다.

그야말로 바늘 자국처럼 희미하고 미세한 점.

루인이 에페(épée)처럼 얇아져 버린 목검을 데인에게 다시 건넸다.

“찌르기로 점을 일격한다. 할 수 있겠느냐?”

검을 받아 든 데인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찌르기 역시 내려치기와 마찬가지로 수도 없이 반복 연습한 동작.

문제는 표적이었다.

저렇게 미세한 표적을 목표로 하는 수련은 이번이 처음.

하지만 데인은 적어도 형 앞에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팟!

강렬하고 쾌속한 찌르기 동작.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박수를 쳤겠지만 정작 데인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다시 해 보거라.”

파앗!

오기가 생긴 데인은 몇 번이고 찌르기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목검의 끝이 정확히 표적에 닿은 경우는 채 이 할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목검의 끝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다.

“내가 해 보겠다 데인.”

꽤 자존심이 상했는지 루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목검을 내미는 데인.

다시 단도로 끝날을 벼리던 루인이 목검을 치켜들었다.

한데 그때.

문득 형을 살피던 데인이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났다.

“혀, 형?”

형의 얼굴에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살기가 일렁이고 있다.

일그러지고 비틀린 표정.

사람이, 표정 하나만으로도 저리도 흉포한 감정과 처절한 분노를 드러낼 수 있다니.

팍!

루인의 목검이 단숨에 쏘아져 표적에 닿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팍!

두 번째, 세 번째 찌르기도 한결같다.

언제나 표적에 정확히 닿는 목검의 끝.

데인은 그런 형의 찌르기를 바라보며 멍해졌다.

형의 몸짓은 위태로웠다.

그것은 그가 한 번도 제대로 검을 수련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매번 표적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단 말인가?

날 때부터 검과 함께 살아온 왕국의 천재, 자신에게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목검을 거뒀다.

“어떠냐. 나의 검이.”

루인의 눈빛은 추억에 잠겨 있었다.

검성과 겨뤄 온 기억.

비록 가는 길은 달랐으나 녀석의 움직임이, 녀석의 궤적이, 화인처럼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

멍하니 형의 검을 받아 든 데인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

힘과 속도, 동작, 궤적.

하나씩 따진다면 어느 하나 자신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마치 한 번도 검을 쥐어 본 적 없는 사람의 어설픈 찌르기.

하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형일 뿐,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감각으로 도저히 살필 수 없는.

“너도 검사라면 느꼈을 것이다. 내 동작이 매우 미진하다는 것을. 아마도 모든 면이 너에 비해 부족했겠지.”

“…….”

“하지만 데인. 방금 나는 저 표적을 내 필생의 적, 그놈의 급소로 상정했다.”

루인이 자신의 일격에 담은 것.

그것은 동료들 모두의 원한이요, 흑암의 공포가 벼려 온 필생의 의지였다.

표적이 ‘그’의 심장인 이상, 마법이든 검이든 그의 의지는 빗나갈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정신과 의지를 담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수단이 검이 됐든 마법이 됐든 달라지지 않아. 기사는 육체의 수련을 우선하지만 그 육체를 움직이는 힘은 결국 정신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 데인.”

루인이 물러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해 보거라.”

비로소 데인의 심상에 가상의 적이 맺혔다.

그는 온몸의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 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

호흡을 멈추고 시야를 확장했다.

가상의 적, 놈의 급소가 순간적으로 심상에 맺혔을 때, 그의 목검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감히 아버지의 목숨을 노려 온 자!

팟!

데아슈의 소중한 정절을 더럽히려는 자!

팟!

위폰의 갸날픈 목을 쥐고 웃고 있는 자!

팟!

그리고 형을 짓밟으려는 자……!

파악!

“헉헉……!”

단 몇 번의 찌르기였지만 데인은 단숨에 호흡이 가빠져 왔다.

루인이 보기 좋게 웃고 있었다.

“역시 검의 천재답구나.”

데인은 어떤 누구의 칭찬보다 울컥했다.

그렇게 그가 쏟아질 것만 같은 감정으로 희미하게 표적을 응시한다.

“와……!”

단 한 번의 빗나감도 없이 모든 찌르기가 명중했다.

왕국에서 최연소로 3성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성취감이 데인을 감쌌다.

“앞으로 네 모든 검의 궤적에 이와 같은 의지를 담을 수 있다면 어떻겠느냐.”

순간, 벼락을 맞은 것만 같은 충격이 데인을 휘감았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깨달음이 몰아친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세계가 산산이 해체되며 재구성되어 가는 순간이었다.

루인이 말없이 웃으며 한참 동안 그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흐르자 데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표정에는 고양감으로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형……! 내가! 내가……!”

“축하한다, 데인.”

마의 벽처럼, 그렇게 뚫을 수 없었던 4성의 경지를 마침내 정복해 낸 데인.

하이베른가의 경사였으며 동시에 왕국의 경사이기도 했다.

비로소 루인은 자신이 그토록 바라 왔던 바가 실현되었음을 깨달았다.

검술왕의 인생이 바뀌었다.

이제 이 가문은 과거와 모든 면에서 달라질 것이다.

그때 집사 아길레가 황망히 다가와 루인에게 예를 표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의 명을 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그가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가주의 전령.

루인이 옷매를 가다듬으며 대공자의 예법을 취했다.

“말하라.”

아길레의 표정에서 한껏 긴장이 느껴졌다.

“가주님께서 혈족대연회(血族大宴會)를 선언하셨습니다.”

“……혈족대연회?”

루인이 굳어졌다.

가문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가 아니라면 혈족대연회는 열리지 않는다.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에는 그런 혈족대연회가 열린 적이 없었다.

또 한 번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제야 결정하셨습니까 아버지.’

숙청될 이가 너무 많았다.

가율로 모두 벌한다면 가문의 존립이 위태로울 만큼.

루인은 아버지께서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웠다.

“내 예복이 이제 몸에 맞지 않더군.”

“그렇지 않아도 시종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사흘 내로 대공자님의 새로운 예복을 올리겠습니다.”

“사흘?”

하이베른가의 예복은 그리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 년 이상 지속된 가문인 만큼 예복에는 무수한 신화와 역사가 복잡한 자수로 새겨졌다.

역대 가주들의 문양만 해도 상의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미리 옷감을 만들어 두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하이베른가의 예복이 옷감의 재고가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문의 업적이 나날이 늘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복은 필요할 때마다 한 벌씩 제작하는 편이었다.

“저 역시 더욱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종들의 모든 역량이 동원될 것입니다.”

그제야 깨달은 듯 루인이 미간을 오므렸다.

“설마 사흘 뒤?”

“그렇습니다. 혈족대연회는 사흘 뒤에 열립니다.”

“…….”

혈족대연회는 성대한 규모의 연회다.

최소 보름 이상의 여유를 두고 준비를 해도 모자랄 것이다.

한데 사흘 뒤라니.

아버지께서 마음이 많이 급하신 모양이다.

왠지 수척해진 아길레를 바라보며 루인이 안쓰럽게 웃었다.

“고생이 많겠군.”

아길레는 허리를 굽힌 채로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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