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5화 (15/187)

<15화>

가문에 돌아온 루인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흘이 넘도록 방 안에만 있다는 데아슈의 소식을 들었을 때.

비로소 루인은 자신이 조금 급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가문을 정상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자신을 성급하게 만든 것이었다.

사람의 심성이란 하루 이틀 만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감화(感化)가 그리 쉬웠다면 이 세상에 악인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루인이 지끈거리는 미간을 매만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따라다닐 작정이냐.”

부작용이 하나 더 있었다.

“……상관하지 마.”

애써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으나 두 눈에 열기를 숨기지 못하고 있는 데인.

자신에게서 무엇을 찾으려는지는 짐작되는 바였으나 여전히 그는 너무 성급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생애 최초의 벽.

루인이 기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후…… 급할 필요 없다 데인. 너는 아직 어리다. 기회는 앞으로 무궁무진하단 말이다.”

형의 그 말을 데인은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경험한 어른들은 작더라도 하나같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랐다.

검술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도 저마다의 이름을 불러 주길 바랐고, 쉴 새 없이 아버지께 좋은 소리를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형은 달랐다.

오히려 대공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세의 전부 자신에게 내어 주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이 있다면 그저 손을 잡고 함께 울고 또 웃어 주는 것이었다.

고작 짧은 몇 마디로 쉼 없이 전율하게 만들고 꿈꿔 온 세계마저 부숴 버린 주제에.

자신이 보아 온 어떤 어른보다도 완전한 어른.

비록 검은 들고 있지 않았지만, 막연히 상상해 온 가장 이상적인 기사.

그런 형은 자신과 고작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돌아가서 검을 수련해라 데인. 그리도 좋아하지 않느냐?”

“싫어.”

지금은 검을 들기보다 형의 한마디 한마디를 더 듣고 싶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아내고 싶었다.

대체 무슨 삶을 살아왔길래 저리도 완성될 수 있었는지 한없이 궁금하기만 했다.

데인은 그렇게 형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꽉 다문 입.

놀랍도록 단호한 눈빛.

어린 검술왕의 완고한 고집에 결국 루인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방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데인.”

루인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지자 데인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는 안 해.”

“쯧.”

그렇게 기다란 회랑의 끝을 돌아 데아슈의 방에 도착했다.

대공자를 발견한 시녀 하나가 황망하게 허리를 숙였다.

“대공자를 뵈옵니다!”

고아하게 눈인사를 건네 화답한 루인이 이내 데아슈의 방문을 열었다.

방의 내부를 확인한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시녀들을 쳐다봤다.

“왜 치우지 않은 것이냐?”

“어맛! 또……!”

시녀들 몇몇이 황망하게 데아슈의 방 안을 향하자 시녀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옷을 모두 찢어 버리십니다. 평소 아끼시던 드레스를 드려도…….”

“그만. 됐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스프를 쟁반에 들고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시녀들도 데아슈 때문에 비상 상황인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데아슈의 곁을 지키던 막내 위폰이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위폰을 발견한 루인은 슬며시 터져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앙증맞고 터질 것만 같은 녀석의 귀여운 두 볼을 실컷 꼬집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데아슈를 설득하고 있었는지 녀석의 얼굴은 제법 힘들어 보였다.

무릎을 안은 채 퉁퉁 부은 눈으로 침대 에 앉아 있던 데아슈는 루인을 보자마자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루인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왜 애꿎은 드레스만 자꾸 찢어발기느냐.”

“나가! 나가라고!”

루인의 담담한 시선이 방안을 훑었다.

“너를 화려하게 가꾸던 것이 어디 드레스뿐이겠느냐. 저 반짝이는 액세서리들은 왜 그냥 두었느냐. 고운 향을 뽐내는 향수병들도 그대로고 예쁜 구두들도 아직 광이 번쩍이는구나.”

“…….”

이내 데아슈의 지독한 눈빛이 방 안의 화려한 모든 것들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불사를 듯 벌떡 일어나는 데아슈.

루인이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다시 침대에 앉혔다.

“이것 놔!”

그러나 데아슈는 루인의 힘을 당하지 못했다.

“너는 혹 좋아하고 아끼는 하인이 있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데아슈의 머릿속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 같은 정원사 셔먼.

미소가 푸근한 시녀장 마리나.

자애로운 유모 키티.

넉넉한 안젤라, 충성스러운 엠버.

문득 루인이 찢겨 널브러진 드레스 조각들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보아라 데아슈. 네가 찢어발긴 드레스들은 지금 네 머릿속에 떠올린 그들의 몇 년, 어쩌면 몇십 년어치의 급료일지도 모른다.”

루인의 시선이 공손히 두 손을 포갠 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시녀들을 다시 향했다.

“매일매일 너를 바라보고 있는 저들의 마음은 어떻겠느냐. 몇 년짜리 급료의 향수를 몸에 뿌리고, 수십 년 급료의 드레스를 입지도 않고 여벌로 보관하는 네가 어떻게 보이겠느냐. 그것도 모자라 너는 이렇게 드레스를 찢어 아예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렸구나.”

시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마음을 추호도 품어 보지 않았다는 듯 더욱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시녀들.

그러나 루인은, 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결국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 가는 어머니를 그저 힘없이 지켜봤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친구들의 값비싼 교재를 부러워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저들의 삶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궁핍하단다 데아슈.”

데아슈가 멍한 얼굴로 시녀들을 바라본다.

데아슈는 그녀들의 삶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네가 드레스와 구두를 줄이고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면 저들의 삶을 바꿔 줄 수도 있다. 영혼 없는 인형처럼 허리를 숙이는 자들이 아니라 진정으로 너를 우러르는 사람들을 네 곁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루인이 데아슈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때야 비로소 너는 저들의 세계다. 너를 따르는 자들은 기꺼이 네게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귀족의 재물이란 그렇게 쓰는 것이다 데아슈.”

시녀들 몇몇이 감동한 듯 격정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신들의 설움을 알아주는 하이베른가의 귀족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다시 묻겠다 데아슈. 무엇이 더 너를 빛나게 하느냐.”

화려한 드레스와 액세서리들은 여인의 외모를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교계의 남자들을 향한 구애일 뿐 진정한 사람의 빛이 아니었다.

“저들의 빛이 되어라. 진심으로 너의 뒤를 따르는 자들을 거느리거라. 그런 자들이 구름처럼 많아질수록 너는 진정한 광채로 눈부실 것이다 데아슈.”

빨개진 귀로 일어난 데아슈가 흩어진 드레스 조각들을 다급히 줍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누나? 부끄러워하는 거야?”

“시, 시끄러!”

이내 루인이 스프를 들고 있는 시녀를 향해 눈짓했다.

다가온 시녀가 루인을 향해 공손하게 스프를 올렸다.

“베른은 함부로 허리를 숙이지 않는다 데아슈. 그것은 네 할 일이 아니니 이리 와서 스프나 먹거라.”

바닥의 드레스 조각들을 줍던 데아슈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저들이 스프를 데운 것이 몇 번이겠느냐.”

감히 베른가의 직계 혈족에게 식어 버린 스프를 대령할 순 없다.

자신이 먹을 때까지 분명 수도 없이 새로운 스프를 데웠을 것이다.

“네가 저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주인인 것 같으냐 데아슈.”

데아슈는 정원사 셔먼의 건강을 알지 못했다.

시녀장 마리나에게 아들딸이 있는지를 물어보지 못했다.

왜 유모 키티가 우울한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지, 왜 안젤라는 이따금씩 황망히 눈물을 훔치는지 어느 하나 알지 못했다.

“나는…… 나는…….”

“그래 데아슈. 불행히도 지금의 너는 저들의 빛이 아니다. 저들의 수고를 온전히 받을 자격이 아직 네겐 없다.”

그렇게 데아슈는 멍하니 스프 그릇을 받아 들었다.

한 입, 두 입.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어느새 그녀의 앞섶을 적셨다.

창백한 얼굴로 슬피 우는 데아슈를 바라보니 루인은 가슴이 아려 왔다.

“무엇이 그리도 공허했느냐. 너는 저 따위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지 않아도 충분히 어여쁘다. 더 이상은 화려한 것들로 너를 채우려 들지 말거라 데아슈.”

입가에 흐르는 스프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데아슈가 더욱 처연하게 흐느꼈다.

“흑. 엄마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흑흑……!”

“…….”

그래서였느냐 데아슈.

루인은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옛날의 자신처럼, 데아슈도 가슴속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가주실에서 나오지 않는 아버지를 무던히도 원망했을 것이다.

부모의 정을 갈구했던 그 여린 마음은, 다시 볼 수 없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 더욱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러고 그 상처는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들이 모두 겪고 있는 아픔이었다.

루인이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지만 결국엔 끅끅거리고만 위폰을 바라봤다.

눈물을 보이진 않았으나 데인은 애써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루인이 천천히 다가가 흐느끼는 데아슈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모두 이리 모이거라.”

어린 위폰이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데아슈의 곁에 앉았다.

위엄 가득한 형의 말에 쭈뼛거리던 데인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왔다.

“서로의 등을 쓸자.”

둥글게 자리 잡은 베른가의 형제들이 서로의 등에 손을 올렸다.

“오늘만은 우는 것을 허락하마.”

동생들이 더욱 흐느끼자 뜻 모를 감정이 솟구쳤지만, 데인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루인은 그런 데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작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 녀석이 가장 많겠지.’

루인이 눈짓하자 시녀들이 물러갔다.

동생들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루인은 성급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더 이상 낡아 버린 자신의 감정을 기준으로 형제들을 대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동생들은 아직 너무 어렸다.

그래.

마음껏 슬피 울어라 동생들아.

비록 닳고 바래져 돌아왔지만 여기에 너희들의 대공자가 서 있다.

회한으로 살아온 마음이라도 괜찮다면 내 기꺼이 너희들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이니.

등을 쓰다듬으며 서로 울자.

오늘만은 어머니께서도 허락할 것이다.

루인은 슬피 흐느끼지 않았다.

그저 세상을 모두 품을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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