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루인은 계곡 곳곳에 새겨진 부정형(不定形)의 검흔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럽고 복잡한, 가다듬지 못한 데인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번에도 그는 과거처럼 스스로를 저주하며 할퀴고 있었다.
다만 그 증오의 대상이 검성이 아닌 자신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한계까지 스스로 괴롭혀 돌파구를 찾으려는 행동은 검술왕이라는 무인의 특성.
물론 그것은 일정 수준의 경지에 다다르기까지는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초인의 경지에 이르려면 그런 비틀린 자아로는 불가능했다.
비록 자신이 무인의 삶을 겪어 보진 못했지만 초인이었던 동료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유롭고 따뜻했으며 또 순수했다.
흑마법이 주는 음험함에 영혼이 잠식당할 뻔했던 적이 무수히 많았지만, 그런 순수한 동료들 덕에 자신은 끝까지 인간성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초인이었던 동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마도에 몸을 담고 있을지라도 데인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마음껏 웃어 둬. 언젠가 그 이빨을 모조리 부숴 줄 테니까.”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다는 듯 데인은 또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메마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루인이 그가 웅크린 채 끌어안고 있는 목검을 무심히 응시했다.
“그 검이 베고자 하는 것이 고작 나 하나가 전부라면 단언컨대 기사로서의 네 삶은 무가치한 것이다.”
루인이 데인의 곁에 다가가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나를 미워하여 아린 네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그리하여도 좋다. 그 정도쯤은 누구도 옹졸하다 비웃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틀린 마음을 기사의 검에 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데인.”
루인이 데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와의 대결을 수도 없이 머릿속에 그렸을 테지.”
갑작스런 형의 손길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으나 그보다는 그의 말이 더욱 거슬렸다.
형의 말대로 그때의 대결을 수백, 수천 번은 떠올려 보았었다.
손발의 궤적.
몸을 비튼 각도.
쇄도하는 힘의 수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형의 모든 움직임을 하나하나 짓씹으며 되새겼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면 지금 당장 검을 들어 나에게 뛰어들었겠지. 하지만 넌 지금 검을 들지 못하고 있구나.”
“…….”
데인은 순간 욱하고 치밀어 올랐으나 형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형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 기묘한 궤적을 따돌릴 수도 없다.
쇄도하는 형의 공격에 시의적절한 방어법을 아직 찾을 수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형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향해 언제 다시 검을 들 수 있을 것 같으냐.”
형의 온전한 기량을 알 수 없기에 이번에도 데인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내가 너보다 늘 한 발 더 앞서 간다면 어떡할 것이냐.”
무인이 한계를 만날 수는 있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
하나 언제까지고 이 무저갱과 같은 곳에서 타인을 증오하며 검을 수련할 수는 없다.
그렇게 루인은 검술왕이라는 무인의 근본적인 한계를 냉철하게 짚어 주고 있었다.
“그래 데인. 너는 평생을 이렇게 살게 될 것이다. 아내의 손을 맞잡을 때도 네 아이를 안을 때도…… 친구가 배신을 하든 부하가 죽든 네 머릿속은 온통 내 움직임만 좇고 있겠지.”
다른 가치들을 모두 배척하는,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사라진 삶.
“왜 너는 이곳에서 이런 비루한 몰골로 누워 있느냐.”
서슬 푸른 루인의 두 눈.
“정말 나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것이 그 원인이겠느냐.”
비로소 데인이 눈을 떴다.
내내 웅크리고 있던 그가 천천히 앉으며 루인을 노려보았다.
“그럼 뭐가 원인이지? 나는 형에게 졌으니까 이곳에 왔어! 수련하기 위해! 형을 이기기 위해! 난……!”
“아니. 아니다 데인.”
형의 두 눈에 지독히도 음울한 빛이 어리기 시작하자 데인은 감히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넌 오랜 병마를 이기고 돌아온 나를 데아슈와 함께 축복해야 했다. 이 형의 손을 맞잡고 제 일처럼 기뻐해야 했다.”
툭툭-
루인이 단추를 풀어 헤치며 상의를 모두 벗었다.
회복되는 중이었으나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메마른 것은 여전했다.
“너는 형의 달라진 얼굴을 쓰다듬지도, 이 몸을 확인하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대신 네가 한 것은 이 형을 향해 검을 뽑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그것이 네가 이 무저갱과 같은 곳에서 비루한 날을 보내고 있는 진짜 이유다 데인.”
루인이 데인이 쥐고 있는 검을 아련히 응시했다.
“고작 나에게조차 뽑지 못할 검은 기사의 것이 아니다. 기사의 검은 부하에게 신뢰를 주는 검이다. 그리고 데아슈를 지키기 위한 검이다. 이 형에게 기꺼움을 주는 검이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검이다.”
상의를 추슬러 입은 루인이 다시금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므로 기사란 초인을 앞에 두고도 망설임 없이 검을 뽑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네 속에 흐르는 피, 베른(Baron)이다 데인.”
주저앉은 채로 데인은, 어느덧 오연히 서 있는 루인을 멍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의 궤적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의 파랑들이 휘몰아쳤다.
죽도록 검술을 닦으면서도 정작 무엇을 위한 수련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공격.
철통같은 방어.
자신의 검은 그저 그런 것들뿐이었지만 모두가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다.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좀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검은 고작 그것이 다였는데 국왕께서 내리신 기사의 작위를 그토록 기뻐했던 것인가.
‘허…….’
가까운 곳에서 그런 형제들을 지켜보던 카젠은 단 한마디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루인에게 대공자의 책무를 운운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자신에게서 아비의 자격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인이 쏟아 낸 엄혹한 말들이 온 가슴에 알알이 박혔다.
고결한 기사도를 배우기엔 데인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조차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자식들의 훈육이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검술 스승에게 데인의 지도를 일임하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던 것.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이제야 모두 깨닫게 되었다.
루인이 아니었다면 데인은 무인으로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을 것이었다.
‘루인. 너는 어떻게…….’
단순한 비유였으나 루인의 말들은 왕국의 기사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기사도의 근본.
검술에 지나치게 매몰되거나 세속의 권력을 탐하는 기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갈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검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루인이 어떻게 저렇게 완성된 기사의 자아를 지니고 있느냐는 것.
하지만 카젠은 곧 그런 의문을 접었다.
방금 전의 대화로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루인은 어떤 혈족보다도 완전한 베른 그 자체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가 어떤 사연과 운명에 휩싸여 있든 상관없었다.
삶이 이어지는 이상 언제고 그는 하이베른을 수호할 것이기에.
“대공자.”
카젠의 목소리는 한껏 엄숙해져 있었다.
그는 루인을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아닌, 하이베른가의 완전한 대공자라는 것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금린사자기를 걸고 맹세하마. 내 다시는 대공자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곧바로 대 하이베른가를 이끄는 가주의 선언이 이어졌다.
“유사시 금린사자기의 운행을 허(許)한다. 지금까지 행사하지 못했던 대공자의 모든 권위도 함께 회복될 것이다.”
본래라면 무릎을 꿇고 예를 받아 마땅했으나 루인은 가늘게 미간을 좁히고 있을 뿐이었다.
유사시에 금린사자기의 운행을 맡긴다는 것은 하이베른가의 병권을 내어 준다는 뜻.
더욱이 대공자로서의 권위를 모두 회복한다는 것은 하이베른가의 차기 가주로 확정됨을 의미했다.
“아버지.”
“거부하지 마라. 대공자.”
눈앞에 자신이 본 가장 완벽한 베른이 서 있다.
카젠은 이 결정을 추호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버지…….”
무섭도록 단호한 카젠의 얼굴.
입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루인은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말해야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다.
결국 루인이 선택한 방법은 솔직함, 그리고 대안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루인이 데인을 향해 눈짓했다.
“일어나라 데인.”
잠시 침묵하던 데인이 아버지의 엄숙한 표정을 한 차례 살피다 일어났다.
그때 루인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데인이 치우라며 소리치려는 그 순간 루인의 엄숙한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이 녀석이 바로 금린사자기의 차기 기수입니다 아버지. 부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뭐……?”
루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데인을 훑었다.
“가주와 대공자의 정식적인 회담이다. 함부로 입을 열지 마라 데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젠은 오히려 더 흡족했다.
루인은 가문의 미래에 대한 사안을 논하는 이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행동만 골라서 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다니.
“아니, 난 모르겠다. 이 가주의 눈에 대공자는 더없이 완벽한 차기 기수다. 대안은 없다.”
루인이 한숨을 쉬었다.
“후…… 십 년이 넘도록 누워만 있던 몸입니다. 아버지께서도 무인이라면 제가 마샬 워 소드를 익힐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튼소리!”
카젠의 비릿한 웃음.
“왕국의 검술 천재인 데인마저 때려눕히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듣고 있던 데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루인이 그의 떨리는 어깨를 더욱 힘주어 감싸며 영계에서 오드를 꺼냈다.
화르르르르!
허공에 떠오른 마신의 핵.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져 계곡 내부의 전경이 훤히 드러났다.
응축된 마나의 기운이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며 타오르고 있었다.
“보고 계시듯 제가 숨겨 온 비밀은 마법입니다. 아버지.”
“이, 이럴 수가! 대체 어떻게 네가……!”
기하학적인 룬 문양이 새겨진, 농밀한 마나의 위력을 떨치고 있는 마법구.
도대체 저 마법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카젠은 그 근원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아, 아버지! 형은 분명……!”
데인이 경험했던 것은 루인의 강력한 체술.
그는 너무나도 분명한 무인이었다.
만약 마법에 패배했다면 무저갱과 같은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한 적 없다고 했다 데인!”
“크윽!”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통증이 데인을 전신을 휘감았다.
루인이 그의 어깻죽지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것이다.
“이미 대외적으로 데인은 본 가의 최고 영재입니다. 녀석의 명성이 이어질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카젠.
이미 마법사의 고리를 몸에 새겼다면 기사의 투기를 벼려 낼 수가 없다.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이 마법사를 따를 수는 없었다.
“혈류 마나석이 원인이었느냐.”
틀림없었다.
혈류 마나석에 담긴 이치는 마탑의 현자들조차 그 아득함에 치를 떨던 고대의 마법학.
루인의 몸에서 그런 혈류 마나석이 어떤 알 수 없는 작용을 일으킨 것이 확실했다.
“예. 아버지.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없이 서 있는 카젠에게로 루인의 확신에 찬 음성이 재차 날아들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기사로 길러 내겠습니다. 르마델 왕국의 자랑으로 만들겠습니다. 데인에겐 그런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아버지.”
그러나 카젠은 그리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마치 찬란한 보물을 눈앞에서 빼앗긴 심정.
곧 그가 기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믿어 보겠다. 대공자.”
그제야 루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정중하계 예를 갖추었다.
“반드시 증명하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멀어져 가자.
데인이 멍하니 루인을 바라본다.
“형. 왜 이렇게까지…….”
데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왕국의 기수란 이 하이베른가의 혈족이라면 모두가 닿고 싶어 하는 꿈이요 이상이었다.
대공자로서 모든 지위와 권세를 누릴 수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양보하다니.
“형이라 부르고 있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
“응?”
조금은 소년 같아진 데인의 머리를 루인이 기분 좋게 헝클었다.
“잊지 마라 데인. 나는 너의 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