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3화 (13/187)

<13화>

천천히 하늘을 활강하고 있는 기구 속.

기구의 바구니에 기댄 채 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루인을 바라보며 카젠은 지금까지도 어안이 벙벙했다.

<철없는 동생이 못난 모습을 보이길래 손 좀 봐준 것뿐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데인은 국왕 폐하로부터 서임을 받은 정식 기사다.

동년배에서는 그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한 검의 재능을 자랑하는 데인.

그런 데인을 루인이 제압한다?

<빈틈투성이. 겉멋만 잔뜩 들어 있더군요. 검의 기초조차 부실한 놈이 가문의 정수만 좇았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데인의 기초가 부실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처음 검을 쥐여 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데인의 기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자신이 가문의 정수를 전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기초를 지적한다는 것은 자신을 나무라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몇 번이고 루인에게 투기의 잔재를 살폈으나 투기는커녕 마나가 맺힌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괜스레 심정이 상했다.

‘고얀 놈. 물어보면 또 비밀이라고 둘러댈 테지.’

과거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사의 신념 운운했던 자신의 약속을 무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루인이 보인 면모들은 하나같이 미칠 듯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만 좀 욕하세요. 귀가 따갑습니다.”

“무, 무슨 소리냐!”

여전히 눈도 뜨지 않은 채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루인을 바라보며 카젠은 소름이 다 돋았다.

마치 자신의 속이라도 들여다본 듯한 루인의 태도가 숫제 괴물 같을 지경.

“별일 없을 겁니다. 그 정도로 죽을 놈은 아니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젠은 어이가 없었다.

고장 3성에 불과한 몸으로 검은 수리 계곡에 들어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루인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수리 계곡을 네가 가 보기라도 했단 말이냐?”

루인이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눈을 떴다.

그가 곧 천천히 일어나 기구 밖 머나먼 산봉우리를 응시했다.

구름 아래 드러난 칙칙하고 거대한 바위 하나.

그 기묘한 모양이 마치 검은 수리의 머리처럼 생겼다.

“사람마다 맞는 수련법은 따로 있습니다. 이제 본 가도 가문의 전통에 너무 매몰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루인도 하이베른가의 혈족인 이상 검은 수리 계곡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신성한 곳이다 루인. 선조들을 욕보이지 말거라.”

루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잔뜩 미간을 오므리고 있는 카젠.

하지만 그는 이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루인과 함께 검은 수리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금방 아련한 과거가 떠올랐다.

검은 수리 계곡의 구조는 지극히 단순 무식했다.

저 기묘한 모양의 검은 수리 봉우리 아래, 상상할 수도 없는 깊이의 계곡이 펼쳐져 있다.

한번 빠지면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장소.

바위틈의 습기와 듬성듬성 자라난 이끼만으로 연명하며 오로지 일정 수준의 경지를 돌파해야만이 탈출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도중에 체력이 다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죽음이었다.

검은 수리 계곡에서의 수련이란 불굴의 한계를 수도 없이 돌파한다는 것.

바위의 습기를 핥으며 거친 이끼를 씹으며 견딘 정신력이란 사람의 기질, 그 자체를 변하게 만들었다.

처절한 고난과 인내로 단련된 수련자는 삶을 대하는 자세부터 영혼의 근본까지 달라졌다.

검은 수리 계곡에서 수련을 마친 기사는 그래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다.

왕국의 기수가 된 카젠의 기억 속에서도 이곳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그러나 루인은 그런 아버지의 음울한 표정을 바라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검술왕입니다 아버지.’

루인은 데인을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은 꽤나 확고한 것이었다.

검술왕이라는 대단한 이명으로 불릴 자가 고작 검은 수리 계곡 정도에 쓰러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적어도 무력만큼은 아버지보다 더욱 드높은 무인이 될 기사다.

“이제 난기류 구간. 많이 흔들릴 것이다. 바구니를 꽉 잡거라 루인.”

쿠쿠쿠쿠쿠-

과연 카젠의 말대로 기구 전체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독특한 지형에 의해 생겨난 거센 난기류가 사방으로부터 불어닥쳤다.

억센 풍압에 두 눈을 뜨기도 힘들었지만 루인은 어느덧 음울한 감상에 휩싸여 있었다.

‘시르하…….’

질풍의 시르하.

긴 머리를 휘날리며 바람처럼 전장을 누비던 그가 생각난다.

언제나 쾌활했지만 내면에 깊은 슬픔을 숨기고 살아가던 친구.

홀로 슬피 울며 동료들의 죽음을 견디던,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사나이.

초인들 중 가장 정이 많았던 그의 마지막이 환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의 마력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산화되기 직전의 그 순간.

그는 음울한 눈을 하고 있지도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마지막에 그는 그저 웃고 있었다.

온 세상을 품어 낼 것처럼 그저 환하게.

마지막 순간에도 시르하는 바람이었다.

“…….”

흔들리는 기구의 바구니 속에서 카젠은 그런 루인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은 웃고 있었으나 왠지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고 아려 왔다.

웃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찌 저렇게 슬프게 느껴진단 말인가.

낡아 버린 그림처럼.

풍화되어 버린 석상처럼.

대체 무엇을 얼마나 견뎌 왔기에 저리도 바래고 바래진 감정으로 서 있단 말인가.

감히 입을 열어 물어볼 수 없었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 슬픔은, 단순히 죽음의 공포를 견뎌 온 이의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문득 카젠은 어쩌면 저 어린 아들이 자신의 품을 아득히 벗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거센 바람이 점차 잦아들자 곧 어둑한 계곡 내부의 전경이 드러났다.

칠흑처럼 펼쳐진 어둠.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계곡.

잊고 있었던 과거의 공포가 또다시 카젠의 가슴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으음.”

웬만한 일로는 냉정을 잃지 않는 루인조차도 답답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막연히 상상만 해 왔을 뿐 검은 수리 계곡의 진면목을 보는 것은 처음.

루인은 자신의 선입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곧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위험천만한 곳은 확실히 3성 기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루인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짙은 어둠을 응시했다.

“아니…… 이런 미친 계곡의 바닥까지 데인은 어떻게 갈 수 있었단 말입니까?”

“자력으로는 도착할 수 없는 곳이다. 이 마법 기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카젠이 투기를 일으켜 타오르던 기구의 심지를 꺼트렸다.

“그 말은 누군가 이 일을 도왔단 뜻이지.”

감히 가주의 핏줄을 위험에 빠뜨리는 중죄를 범했다.

그게 누구라고 해도 카젠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데인을 자극한 점에서는 너 역시 다를 바가 없다. 동생들을 올바르게 훈육하는 것이 대공자의 책무이긴 하나 너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루인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처벌을 내린다고 해도 기꺼이 감당할 것이다.

며칠 전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데인과 만난다 해도 자신의 결정은 늘 한결같을 것이기에.

심지의 열이 잦아들자 기구는 가파르게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향해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불길한 느낌.

풍압도 소음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질적인 감각에 루인은 속도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 어둠 속에서 카젠의 음성이 조심스럽게 울려 퍼졌다.

“몸을 낮추거라. 조금만 더 가면 다크 와이번(Dark Wyvern)의 서식 구간이다.”

루인이 크게 놀랐다.

드래곤을 몬스터의 범주에 넣을 순 없었다.

그런 드래곤을 제외한다면 이 세계에서 가장 상위의 포식자가 바로 와이번이었다.

그중에서도 다크 와이번은 흉포하기가 이를 데 없어 인간이 길들이지 못한 유일한 개체.

수많은 라이더들이 도전했지만 그들은 모두 다크 와이번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다크 와이번이 일반적인 와이번과 더욱 비교되는 점은, 그들이 무수한 플라잉 바이퍼(Flying Viper)들의 우두머리라는 점이었다.

벌떼와 같은 플라잉 바이퍼들을 거느린 채 나타나는 다크 와이번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군단.

비로소 데인이 얼마나 큰 위험에 빠졌는지 루인은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서두르시죠 아버지!”

“쉿.”

키르르르르르…….

불길한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와이번 개체 특유의 하울링이었다.

그 뒤를 이어 엄청나게 군집된 날갯짓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부우우우우웅!

그 수가 얼마만큼 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소리가 잦아들자 루인이 신음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다크 와이번이 얼마나 더 있는 겁니까?”

“정확한 수는 모른다. 하지만 많지. 너무나 많아. 아마도 이곳이 그놈들의 산란지일 게다.”

대마도사로서 넓은 대륙의 풍상을 겪어 온 루인이었지만 다크 와이번을 본 기억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희귀종의 초대형 몬스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서식처라니!

신성시되는 가문의 장소에 다크 와이번의 대규모 산란지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루인이었다.

“투기와 마나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민감한 녀석들이다. 적어도 이 구간을 통과하려면 투기를 완벽히 갈무리할 수 있는 6성 이상의 고위 기사가 되어야지만이 가능하지. 그래서 처음에 진입할 때도 차폐용 아티펙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사실은 루인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다크 와이번의 출몰지라는 말을 들은 순간 마나홀이 된 오드를 더욱 영계 깊숙한 곳으로 숨겼으니까.

“그럼 이 구간은…….”

과연 이곳에서의 탈출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과거의 경지를 모두 회복하지 않는 이상 루인은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다크 와이번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이 구간의 절벽은 마나와 투기를 배제한 채 순수한 근력으로만 타고 올라야 했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 해도 절벽에 매달린 채 다크 와이번과 전투를 할 순 없었다.

초인에 근접한 경지라면 모를까, 아니 애초에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런 무모한 수련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제야 루인은 이곳에서의 탈출이 단순한 무력이 아닌 정신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음…….’

이 지옥을 벗어나는 순간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삶을 임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트일 것이다.

그렇게 루인은 오랜 시간을 지나 과거로 되돌아오고 나서야 마법이 아닌 무(武)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다.

마도가 아닌 무인의 도(道).

그들 역시 충분히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었다.

이곳을 견뎌 낸 가문의 혈족들이 다르게 보였다.

하나 그런 고결한 자들의 정신마저 타락시킨 욕망이라는 괴물에 더욱 소스라쳤다.

그렇게 다크 와이번의 서식처를 지나 한참 동안 더 하강했을 때 루인은 어렴풋한 흙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흙냄새와 습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계곡의 최하단부에 도착했음을 의미했다.

퉁-

기구의 바닥으로부터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파.

뱃속이 뒤틀렸으나 루인은 구역질을 참아 냈다.

곧 루인은 기구의 바구니를 타고 넘어 바닥에 착지했다.

고개를 들어 멀리 위를 바라보니 깨알처럼 작은 빛구멍이 시야에 담겼다.

그때 데인을 발견한 카젠이 매섭게 소리쳤다.

“데인!”

한껏 걱정하며 달려가는 카젠과는 달리 천천히 걸어가고 있던 루인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기묘하게 생긴 바위 아래.

데인이 자고 있다.

그의 호흡은 비록 가늘었다.

몸을 둥글게 말아 빠져나가는 체열 역시 최대한 막고 있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제외한 모든 힘을 갈무리하고 있었으나, 쉼 없이 맥동하고 있는 그의 생명력만큼은 전보다 더욱 강렬해져 있었다.

그제야 안도하는 루인.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과연 검술왕다웠다.

“시체야. 나의 동생아.”

한쪽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데인이 짐승처럼 루인을 노려봤다.

루인이 새하얗게 웃었다.

“어떠냐? 내가 널 다시 기사라 불러도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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