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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12화 (12/187)

<12화>

츠츠츠츠츠-

농밀한 투기의 장막이 쉴 새 없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투기를 확장하여 일정 영역 안의 모든 공간을 의지로 통제하는 경지.

명백한 절대자의 상징이요, 인간의 경지를 돌파한 위대한 무인의 권능이었다.

“초인……!”

카젠이 진득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경외의 마음보다 더 앞선 것은 아들에 대한 걱정.

아무리 소드 힐의 초인이라지만 감히 하이베른가의 영역 내에서 대공자를 인질로 잡고 시야와 음파까지 모두 차단하는 것은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스르릉-

카젠의 검이 뽑혔다.

빛의 포말에 부서지며 눈부신 자태를 드러낸 가주의 상징 ‘사홀의 용맹’이었다.

척!

지근거리에서 비밀리에 카젠을 호위하던 유카인도 도착했다.

차앙!

“감히……!”

유카인의 타오르는 눈동자.

그 역시 초인의 권능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하나 왕국을 수호하는 기수의 대지에서 무력을 투사하는 자는 그 대상이 누구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유카인이 이를 깨물며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네하릴을 보냈습니다 가주. 곧 본 가의 최정예 기사들이 당도할 것입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떡이는 카젠.

상대는 소드 힐의 초인이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희생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함께 목숨을 걸자 유카인. 우리의 상처가 깊어질수록 살릴 수 있는 기사들이 늘어날 것이다.”

“충! 하이베른가에 영광을!”

주군이 자신의 피를 원하고 있었으나 유카인은 활기로 불타올랐다.

주군과 등을 맞대고 전장에서 함께 전사한다는 것은 평생을 꿈꿔 온 명예의 완성.

더구나 초인의 검에 자신의 마지막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기사로서 더없는 긍지다.

‘유카인…….’

활화산처럼 강렬한 유카인의 투기가 카젠 역시 반가웠다.

하이베른가의 모두가 변한다고 해도 그만은 끝끝내 변치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카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왜 내게 얘기하지 않았나 유카인.”

질문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유카인이 힐끔 카젠을 쳐다봤다.

“무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 가문의 기사들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나 묻고 있다네 유카인.”

유카인이 미간을 구겼다.

“어떤 자의 일탈을 지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 해도 소수입니다. 부정을 발견하셨다면 가율로 처벌하시면 될 일. 기수의 깃발 아래 긍지로 살아가는 기사들을 모두 모욕하진 말아 주십시오.”

카젠은 강하게 부인하는 유카인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자신과 가장 닮아 있는 친구라는 것을.

꿈꿔 온 이상도 숭배했던 가치도 모두 자신과 똑같았던 생의 동반자.

‘가율에 따른 처벌이라…… 친구여.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네.’

썩은 부위를 도려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가문에 뿌리내린 부정은 가율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가율을 앞세운다면 이 가문의 주축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하이베른가는 더 이상 존속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카젠이 복잡한 심정으로 검을 들고 있을 때 최정예 기사들이 속속들이 유폐지에 도착했다.

차앙!

차앙!

하나같이 검을 빼 들고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으나 그들의 눈빛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초인이 내뿜고 있는 엄청난 투기의 파장!

그 상상할 수 없는 압박감은 그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였다.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을 겨우 견디며 네하릴이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충……! 현재 가용할 수 있는 기사들은 모두 왔습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던 유카인이 사자와 같은 포효성을 내지른다.

“적은 소드 힐의 초인이다! 하이베른의 용맹한 기사들이여! 나와 함께 피를 흘리자!”

와아아아아-!

기사들이 외침으로 화답한다.

상대의 강함은 저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투쟁심의 발로는 오직 상대가 하이베른가의 명예를 짓밟은 적이라는 것뿐.

그렇게 맹렬히 군세가 피어오르자.

“…….”

말없이 기사들의 열기를 바라보고 있던 카젠이 뜨거운 감정에 북받쳐 격동한다.

하이베른가의 명령에 복잡한 계산 없이 검을 치켜드는 이들.

저들만큼은 명예를 저버리지 않았다.

저들이 가문의 소수이건 다수이건 상관없었다.

기사의 혼은 이렇게 아직도 가문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대형을 갖추어라! 일진은 투기의 여파를 대비한다! 이진은 검을 벼리며 대기하라!”

“충!”

“충!”

척척척!

유카인의 명령에 기사들이 질서 있게 대형을 갖추기 시작하자 카젠 역시 기수의 권위를 드러냈다.

카젠이 육중하게 발을 굴렀다.

콰아아아앙!

지진을 만난 듯한 투기의 파동이 유폐지 전체에 드리워지자.

“대 하이베른.”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기수의 검.

“개전(開戰)이다.”

카젠의 등을 바라보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전율했다.

왕국을 수호하는 기수와 함께 전장을 누비는 영광.

그들은 이 전율이 그동안 너무나 그리웠다.

“가, 가주!”

갑작스럽게 들려온 유카인의 다급한 외침.

카젠이 금방 그의 시선을 좇아 초인의 투기 장막 쪽을 바라본다.

이내 유형화된 투기의 장막이 부서지며 점차 초인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루인!”

카젠의 표정에 안도가 스쳤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루인이 무사했다.

루인과 초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카젠이 다시 검을 들어 기사들의 진군을 멈추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루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 있다면 들어와 봐. 어디 그 잘난 초인의 실력을 한번 구경해 보지.”

-미친놈! 그러다가 저 인간 초인놈이 정말로 덤벼들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루인이 내심 웃었다.

‘그때는 다시 날 되살리면 되는 것이다. 쟈이로벨.’

-뭣!

쟈이로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루인을 한 번 되살리느라 진마력이 거의 바닥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혼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고통을 딛고 적멸의 어스름마저 새긴 마당.

거기에 방금 무리하게 강림체까지 현신했으니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 있던 힘까지 깔끔하게 사라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 인간 초인 놈을 맞상대한다?

그럼 끝이다.

루인의 영혼을 숙주로 삼고 있는 이상, 자신의 유희도 함께 끝나는 것이었다.

‘걱정 마라. 쟈이로벨.’

루인이 쟈이로벨에게 무리한 현신을 부탁한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역사를 후대에 전승하는 것에 어떤 종족들보다도 집착하는 것이 인간.

인간의 역사에 새겨진 마계에 대한 공포는 생각보다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

노인은 우두커니 선 채로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투기를 드리워 아무리 살펴봐도 눈앞의 소년은 평범, 아니 그 이하였다.

풍겨 오는 마나도 미약했다.

신체적인 역량 역시 살피기가 민망할 정도다.

지금이라도 의지만 일으키면 저런 나약한 녀석의 목 따윈 가볍게 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신의 소환자.

마신의 현신을 다름 아닌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목도했다.

역사 속에서 마왕은 초인 서넛의 합공으로도 대적이 불가능한 존재.

그런 마왕을 수도 없이 거느린 마신의 전능함이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소년이 그런 마신의 도움으로 수도 없이 부활할 수 있는 불사의 인간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때는 어떤 적대 행위도 무의미했다.

오히려 조금 전 녀석의 꺼림칙한 선언대로 소드 힐의 존속을 더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노인을 바라보고 있던 루인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히죽.

“이제야 소드 힐의 다른 늙은이들을 걱정하기 시작한 거로군.”

속내를 들키자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죽여도 죽여도 마신의 권능으로 살아나는 불사의 인간.

그런 전능한 자란 역사와 신화를 아무리 살펴봐도 지금껏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신의 권능을 두려워하기 이전에 저 무시무시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어린 녀석이 오히려 더 꺼림칙했다.

“미거하나마 이 늙은이는 이 땅의 안위를 살펴야 하는 수호자라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던 것뿐. 그래도 마뜩잖다면 한 늙은이의 추레한 객기라고 용서해 주게.”

“이미 내 이름을 걸었다 늙은이.”

이미 노인은 초인으로서의 자존감 따윈 깔끔하게 잊은 상태였다.

“소드 힐은 반드시 존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네. 부디 무례를 저지른 나 하나로 끝내 주게나.”

루인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대마도사 루인이 이름을 건 맹세를 철회한 적은 단연코 없었다.

그렇게 무르게 살았다면 애초에 흑암의 공포라 불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대 한 사람의 명예가 대륙의 명운보다 중하다는 뜻인가?”

“……대륙의 명운?”

노인은 르마델 왕국 하나가 아니라 대륙 전체의 명운을 운운하고 있었다.

루인의 기억 속에 그런 위험한 일은 오직 ‘그’와 관련된 사건밖에 없었다.

루인이 작은 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혹시 당신들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찾고 있나?”

너울거리는 그림자.

‘그’가 나타나기 전 암중으로 각 국가의 중추를 장악한 의문의 존재들.

너울거리는 그림자란 호칭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과거에도 그들의 진실된 단체명은 끝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의 목 뒤에 형태를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검은 표식만 발견될 뿐이었다.

“그대가 그걸 어떻게……?”

마신을 보았을 때보다도 더욱 놀라고 있는 노인.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루인이 씁쓸하게 자조했다.

“……그랬던가.”

문득 동료들의 한 맺힌 목소리들이 떠오른다.

그분들이 무사히 살아 계셨다면.

그분들의 인도만 있었더라면.

그런 아쉬운 자조 속에 담겨 있던 존재들 중 하나가 바로 저 소드 힐일지도 몰랐다.

조금은 놀라웠다.

이 이른 시점에서 ‘그’의 동향을 파악하고 대비하고 있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하긴 과거, 이때의 자신은 몸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후로도 이십 년이 지나서야 쟈이로벨의 정체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으니 지금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자신이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켜켜이 쌓여 있던 오해가 풀리자 루인의 표정이 조금은 편해졌다.

‘이 늙은이들은 너무 일찍 그의 눈에 밟힌 것이로군.’

소드 힐의 역량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결코 한 단체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어설프게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추적했다가는 결국 저들은 모두 분쇄될 운명인 것이다.

“당분간 그 추적을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힘을 기르며 후일을 대비해.”

노인은 루인의 말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 왕국의 왕족들은 그들에게 포섭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각국의 수호자들과 마탑의 숨은 현자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대륙 전체가 전례 없는 혼란에 휩싸일 것이었다.

“뜻을 접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굳이 내 이름을 걸 필요도 없었겠어.”

“무슨 뜻인가?”

루인이 히죽 웃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소드 힐의 늙은이들이 모두 죽는다는 얘기지.”

“그게 무슨……!”

말문이 막혀 버린 노인.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허투루 들어 넘길 수는 없었다.

눈앞의 소년은 겉으로 드러난 외모나 나이를 깔끔하게 무시할 수 있는 마신의 소환자.

더구나 세계의 비밀, 너울거리는 그림자의 정체를 아는 것까지…….

무엇 하나 범상치 않은 것이 없었다.

루인에게서 강렬한 적의가 점차 사그라들자 그제야 노인의 얼굴이 좀 편해졌다.

“자주 찾아와 자네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거절하지. 내 목숨을 위협한 상대와 함께 나눌 이야기 따윈 없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루인.

비록 오해가 풀려 대마도사의 맹세를 철회할 순 있어도 살아온 인생의 철칙까지 수정할 순 없었다.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던 노인이 다시 물끄러미 루인을 바라봤다.

“한 가지만 대답해 주게. 이 하이베른은…… 아니 자네는 르마델 왕국의 적인가?”

루인은 순간적으로 모멸감을 느꼈지만 저 노인이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는지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신을 소환할 수 있는 인간이 왕국 내에 존재함을 확인한 마당.

저들이 수호자 집단이라면 이제 발을 뻗고 편히 잘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루인.

비록 대마도사의 길을 걸었다고 해도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베른가의 것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실없는 소리. 하이베른은 언제나 르마델 왕국의 기수다. 기수가의 충심을 의심하는 건가?”

조금은 안도한 듯 얼굴이 풀어지는 노인.

“아닐세. 믿겠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그렇게 소드 힐의 초인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천천히 검을 거두는 카젠과 유카인.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모두 현실임을 자각하기까지 그들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초인을 고작 말 몇 마디로 물리는 것이 어디 가능한 일인가?

더욱이 그들의 대화 속에 담긴 내용들은 하나같이 의문투성이.

카젠이 천천히 루인에게 다가갔다.

“모두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약속하셨잖습니까.”

“무얼 말이냐?”

루인이 환하게 웃었다.

“기사의 비밀이란 신념의 또 다른 이름. 지켜 주신다면서요.”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미간을 구기고 있는 카젠에게로 집사 아길레가 황급히 다가왔다.

그의 귀엣말을 모두 들은 카젠이 더욱 황당하다는 눈으로 루인을 쳐다봤다.

“데인이 검은 수리 계곡으로 갔다는 건 또 무슨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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