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기량을 회복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정원 앞 공터로 나서던 루인이 카젠을 발견했다.
루인은 아버지가 언젠가 자신을 다시 찾을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그것도 직접 찾아오시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루인이 옷을 추스르며 예를 갖췄다.
“기별이라도 넣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차도 준비 못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고맙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유폐지의 땅을 바라보는 카젠의 눈동자가 더없이 음울해진다.
“과연 망가져 있더구나. 나는…… 나는…… 더 이상 가주의 자격이 없다.”
묵묵히 아버지의 시선을 좇아 함께 흙바닥을 바라보는 루인.
드디어 아버지께서 영광으로 쌓아 올린 기수가의 성 위가 아닌, 성벽 아래의 처참한 진창을 바라보셨다.
이 가문의 일원들은 더 이상 명예와 긍지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각자의 잇속을 위해 삶을 살아가는 그저 흔한 인간 군상들.
여타의 귀족들처럼 뱃속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 오래전부터 하이베른은 그렇게 평범한 귀족가로 전락해 있었다.
“모르고 계셨다고 말하진 마십시오.”
루인의 눈빛도 함께 음울해졌다.
“보기 싫으셨던 겁니다. 외면하신 겁니다. 그 명예로운 소로드가, 그 충직한 이든이, 그 열혈의 웨거에게 그런 위선이란 말도 안 된다고 여기신 겁니다.”
“…….”
“분명 무수한 징후가 있었을 겁니다. 단지 그 모든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셨던 아버지만 계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사의 예법을 다해 무릎을 꿇는 루인.
“아버지를 약하게 만든 저의 죄를 먼저 벌하여 주십시오. 이 나약한 아들의 육신이 아버지의 마음을 흐린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루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카젠.
곧 그가 차마 말로 형용하지 못할 복잡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넌…… 그럴 수가 있느냐?”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가문으로부터 짊어진 천형과도 같은 저주.
그런 처절한 병마를 무려 십 년 이상 견뎌 온 어린 영혼.
가문과 세상을 향한 증오로 온 마음이 비틀렸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판국이었다.
한데 이 와중에 오히려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는 루인.
이건 재능이나 기량의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
도저히 저 나이대에 품을 수 있는 인격이 아닌, 마치 세상을 달관한 현자, 아니 그 이상의 존재 같았다.
루인이 고개를 들어 희게 웃었다.
“아버지께선 어떨 것 같습니까?”
“무얼 말이냐?”
마치 타인의 몸을 관찰하듯, 천천히 자신의 육체를 쓸어보기 시작하는 루인.
“아버지께서도 전장을 아신다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듯한 기사들의 각성을 무수히 경험하셨을 테지요.”
카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의 삶이 고결한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체득할 수 없는 것들을 전장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전장의 처절함, 그 경험의 각별함이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죽음의 공포를 십 년 이상 매일매일 겪는 인간의 경험은 과연 어떨 것 같습니까?”
순간 흔들리던 카젠의 동공이 멈춘다.
“그 마음은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그리 다채롭지 못합니다. 물론 처음엔 세상을 향한 증오와 원망이 가득하겠죠. 하지만 그건 살아야겠다는 처절한 갈망에 비하면 찰나지요.”
자신의 팔을 아버지에게 내보이는 루인.
“서서히 생명력이 말라 가는 육신을 관찰하다 보면 잡다한 생각은 잦아들고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만 남습니다.”
흔들흔들.
“더 꿈틀거리자. 더 흔들자. 작은 움직임들에 안심하고 또 희열하죠. 움직인다는 건 살아 있다는 거니까.”
“그만…….”
카젠이 눈을 질끈 감았으나 루인의 음성은 잦아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눈을 감지 않고 잔 적도 많습니다. 그게 가능하냐? 의문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더군요. 삶을 향한 인간의 집착은 생각보다 일관되고 끈질깁니다.”
마계의 절대자와 정식으로 계약하고 마침내 대마도사의 경지에 이른 루인의 과거가 평범할 리가 없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정신의 한계를 몇 번이고 부수며 쌓아 온 갈망의 집약체.
그게 바로 흑암의 공포, 대마도사 루인이 견뎌 온 삶.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견지하고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궁금해하시니 저로선 대답해 드릴 뿐입니다.”
카젠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자신의 삶을 전장의 참상을 겪는 기사에 비유하여 담담히 반추한다.
거기엔 별다른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듯한 지독히도 객관화된 시선.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소름이 돋을 만큼 투명한 아들의 눈빛에 카젠은 마치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아들 루인이 왜 그토록 다른 사람 같았는지.
“이래서 그분들이 너를 궁금해하는 것인가…….”
루인이 의문을 드러냈다.
“그분들?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드 힐(Sword Hill)의 존재를 아느냐?”
“그건…….”
그것은 왕국에 환상처럼 전해 내려오는 전설.
은퇴한 기사들의 집단 소드 힐!
마탑의 비밀스러운 곳에 존재하는 옴니션스 세이지(Omniscience Sage)들처럼, 그들 역시 엄청난 힘을 지녔으나 철저히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왕국의 은자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왕국이 멸망에 이른다고 해도 방관할 존재들.
루인은 이미 경험으로 그들의 철저하리만치 무관심한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루인의 표정은 금방 구겨졌다.
“구름 위에서 노니는 노인네들이 왜 날 궁금해하는 겁니까.”
“불경하다 루인!”
“…….”
단호히 루인을 질책하던 카젠이 곧 엄숙하게 말했다.
“어제 그분들의 시종이 다녀갔다. 곧 너를 만나겠다고 하셨으니 대공자의 예복을 입고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그럴 필요 없네. 가주.”
마치 환상처럼 일렁이며 나타난 한 노인.
카젠이 황급히 몸을 숙이며 예를 갖춘다.
“예를 물리게. 스스로 기사의 검을 부러뜨린 자가 어찌 기수의 예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럼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루인이 멀어져 가는 아버지에게 예를 표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끝없이 침잠한 두 눈.
감히 살필 수 없는 기질.
하나의 날카로운 검이 되어 버린 것만 같은 존재.
천천히 주변에 투기를 드리워 모든 음파와 시야를 차단하는 그 전능력은 마치 과거의 검성을 보는 것 같았다.
루인은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힘없어 보이는 노인이 바로 초인(超人)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런 엄청난 힘을 지니고도 끝내 왕국의 멸망을 외면했던 자.
당연하게도 루인은 그 어떤 예도 표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과연 대범하구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칭찬이기에 루인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인은 스스럼없이 흙바닥에 앉아 귀를 후벼 파며 말했다.
“세상에 관여할 수 없는 소드 힐의 규율까지 깨고 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느냐?”
“뻔해서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뻔해?”
피식 웃는 루인.
“초인의 초감각이라면 이질적인 시간의 비틀림을 느꼈겠죠.”
절대악 발카시어리어스가 강림했을 당시, 순간적으로 하이베른가 일대의 모든 시간이 멎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수준일 뿐 초인의 감각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네가 초인의 역량을 느낄 수 있다고?”
루인은 내심 우스웠다.
이렇게 대놓고 초인의 기량을 맘껏 뽐내고 있으면서 저런 실없는 소리라니.
“투기로 주변의 음파와 시야를 모두 차단하는데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마나의 세계를 보는 마법사의 눈을 회복한 이상 루인의 민감한 감각을 속일 순 없었다.
노인이 그런 루인의 기량을 인정하는 듯한 말을 했다.
“역시 넌 마법사였구나.”
그때, 노인의 얼굴에 서서히 두려움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위대한 존재가 강림했던 것이냐? 내 살아생전 그보다 더한 존재감을 경험한 바가 없느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금방 두려움을 걷어 내고 호기심을 얼굴에 드러내는 노인.
“소드 힐이 스스로 규율을 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이냐?”
“알고 싶지 않습니다.”
“네 목숨이 달린 일인데도?”
루인의 표정이 기괴하게 구겨졌다.
“절 죽이시겠다는 뜻입니까?”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루인은 기가 찼다.
은퇴했다지만 그래도 고결한 기사였던 존재가 핏덩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죽음을 종용할 줄이야.
더구나 철저하게 왕국의 멸망을 외면했던 주제에 고작 자신 하나를 죽이기 위해 규율까지 깼다?
“본디 소드 힐은 설사 이 베른가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서지 않는다. 그것이 천 년 이상 지켜 온 힐의 규율. 하지만 너는 경우가 다르다.”
순간 노인의 눈빛이 변했다.
“베른가의 대공자가 어찌 마법을 익히고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그런 초고위 존재를 소환할 수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네가 재앙을 초래할 게 확실하다면 나는 소드 힐의 어떤 규율도 깰 것이다.”
루인은 역겨움이 치밀었다.
‘그’의 절대적인 마법 아래 죽어 간 초인들 중에 저들은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진짜 재앙을 맞이했을 때는 철저하게 몸을 숨겼던 자들.
그런데 뭐?
이제 와서 거창한 대륙의 수호자 놀이를 하겠다고?
루인은 노인을 비웃었다.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했다면 대화가 되었을 텐데. 쓸데없는 노인들의 호기심에 역겹게도 정의를 갖다 붙이셨군요.”
하지만 노인은 모멸감에 몸을 떨지도 두 눈에 분노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껄껄! 소드 힐의 은자(隱者)를 앞에 두고 감히 노인들의 호기심 운운하는 놈이 존재할 줄이야! 네 아비인 카젠, 왕국의 기수조차 몸을 숙이는 마당이거늘!”
은퇴 기사들의 성지 소드 힐이 이 르마델 왕국에서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지 아직 이 애송이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마법적 기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세상을 보는 눈은 마치 갓난아이 수준.
그렇게 노인이 마치 재미있다는 듯 루인을 쳐다보고 있을 때.
순간 루인이 마주 히죽 웃었다.
“나도 같잖은 연기를 거두지. 초인이라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겠다, 늙은이.”
스스스스-
악마의 형상 하나가 유령처럼 루인의 전면에 드러난다.
검붉은 피로 얼룩진, 도저히 이 세계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한 존재.
사방에 가공할 살기를 드리우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기괴한 표정으로 비웃고 있는 마신(魔神) 쟈이로벨.
노인이 본능적으로 투기를 일으켜 수십 자루나 되는 무형의 검을 소환한다.
모든 무형의 검에 겹겹이 스피리츄얼 오러를 덧씌운 노인이 곧 처참한 신음성을 흘렸다.
“……크윽! 마, 마왕?”
<틀렸다. 인간.>
이제는 루인이 노인을 향해 재미있다는 듯 이죽거리고 있었다.
“날 죽여? 어디 해 봐. 설사 내 목이 잘린다고 해도 영혼만 무사하다면 이 쟈이로벨은 언제든 날 부활시킬 수 있지.”
“쟈, 쟈이로벨?”
노인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 속, 세상을 어지럽혔던 무수한 마왕들 중에서 그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놈은 설마 아직도 날 마왕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권능을 고작 마왕 따위가 행사할 수는 없다.
그제야 깨달은 듯, 전의를 상실한 듯한 노인의 표정.
그렇게 정신이 붕괴되자 그가 소환했던 검들이 차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신?”
인간계에 고작 한 명의 마왕만 침입해도 수백 년간의 암흑기가 펼쳐졌다.
그런 마왕을 수십, 수백이나 거느리고 있는 존재가 바로 마신!
노인은 그런 엄청난 존재의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몇 번이고 되살아나 주지. 그리고 내 모든 것을 걸고 네놈의 소드 힐을 전멸시킬 것이다. 그 일에 내 이름을 걸어 주마.”
흑암의 공포가 자신의 이름을 걸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 노인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