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0화 (10/187)

<10화>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쉴 새 없이 흐느끼고 있는 데아슈.

그런 그녀의 침대 주위로 화려한 옷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 찢긴 조각들이 데아슈가 가장 아끼던 금장 드레스였다는 것을 알아챈 한 중년의 레이디가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데아슈. 너는 또 왜 이러고 있는 거니?”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더욱 서러움이 밀려온 듯 데아슈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흑! 고모!”

“그래그래 데아슈. 고모가 왔단다.”

다정다감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데아슈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는 여인.

소에느 프란시아나 베른.

대 하이베른가의 숨은 권력자.

그녀의 감정 없는 차가운 입술에서 또다시 이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네 오빠도 그렇고 오늘 너희들 조금 이상하구나.”

데아슈가 울음을 멈추고 소에느를 바라봤다.

“데인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테네브 경의 만류도 뿌리치고 검은 수리 계곡으로 들어갔다는구나.”

“검은 수리 계곡……?”

커다랗게 뜬 데아슈의 두 눈에는 어느덧 두려움이 가득 물들어 있었다.

그곳은 하이베른가의 기사들이 겪는 최후의 시험 장소.

살아나올 수만 있다면 반드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전설적인 곳이었다.

문제는 노련한 기사들에게조차 너무나도 위험한 장소라는 것.

“미쳤어! 다 큰오빠 때문이야! 그 미친놈 때문이라구!”

“루인? 대공자……?”

소에느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 비슷한 것이 어렸다.

또 대공자라니?

최근 들어 그녀는 대공자의 소문을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터무니없는 억측으로 생각했다.

저주받았던 그가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부터가 믿기 힘들었다.

하물며 월례 회의에서 뛰어난 안목을 뽐냈다니.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예법과 격조.

가문의 원로들이나 할 법한 고루한 말투.

예사롭지 않은 기세,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권위까지.

들려온 소식들은 하나같이 의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하이베른가에서 자신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란 없었으므로 이제는 슬슬 그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시점이었다.

“이 고모에게 자세하게 말해 주렴.”

“네! 그게 고모…….”

그간에 있었던 일을 빠르게 설명하는 데아슈.

듣고 있던 소에느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데인을 제압했다고?”

“응! 그것도 두 합 만에요!”

“두 합?”

믿을 수 없었다.

올해.

성년이 되기 전의 데인에게 기사의 작위가 내려졌다.

그 꽉 막힌 국왕이 관례를 깼을 만큼, 왕국 전체가 공언한 검술 천재가 바로 데인.

그가 스무 살을 넘긴다면 이 하이베른가의 기사들 중에서도 그의 검을 받아 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두 합 만에 제압이라…….

그것은 적어도 5성 이상의 고위 기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수련장이라면…… 본 사람은 없니?”

“네! 수련 기사들은 모두 훈련에 참가하고 있었어요!”

다행이었다.

정보란 독점할 때 빛을 발하니까.

“고모는 우리 데아슈가 당분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버지에게도요?”

화사하게 웃고만 있는 소에느.

곧 그녀가 데아슈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천천히 일어나 뒤돌아선 소에느의 얼굴이 다시 유령처럼 차갑게 변했다.

변수가 상수로 변하는 것만큼 꺼림칙한 것은 없다.

이제 직접 대공자를 확인해야 했다.

“고모! 어디 가세요?”

싱긋.

“이 고모가 금방 다시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렴, 데아슈.”

대공자 루인.

그는 자신의 팔다리를 옥죄고 있는 최근의 기이한 일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에느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

루인이 소에느의 희고 가냘픈 목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쥐어 비틀어 버릴까.

하지만 막상 그녀를 직접 만나 보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분명 살의로 들끓어야 정상인데,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세월이란 것이 이토록 무서웠던가.

그 처절했던 증오가 고작 세월 앞에 무뎌지다니.

홱.

미련 없이 돌아선 루인이 자신의 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버릇없이!”

그렇게 내뱉고 나서야 소에느는 금방 후회했다.

‘다 사실이었어!’

그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간의 소문이 모두 진실이었다는 것을.

대공자가 그저 무심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인데도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쉴 새 없이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소에느는 대공자를 향해 거칠게 화를 내고 나서야 그 감정의 실체가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인이 다시 뒤돌아서서 소에느를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지? 아, 별로 의미 없는 질문인가.”

아버지의 부재를 틈타 이 철혈의 가문을 암중으로 장악해 버린 여인.

표면적으로야 복잡한 권력 구도가 생겨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모두 저 소에느가 짠 판이다.

그런 그녀에게 가율을 무시하고 유폐지에 드나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

루인의 씁쓸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당위가 있지. 그래서 정말 궁금해.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거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루인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른의 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도 마다한 냉혈의 화신.

모정에 목마른 베른가의 아이들을 유혹해 온 지독히 비틀린 모성애.

힘을 가진 사내 앞에서라면 스스럼없이 옷을 벗을 수 있는 위험한 강단.

공작가의 영애로 살아온 여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삶이란 욕망의 화신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단순한 욕망 때문에 그 모든 일을 벌였다?

대체 그 욕망이 얼마나 처절하면 그런 치욕과 인내를 모두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대공자. 언행이 지나치세요.”

고운 이마를 찌푸리다 입을 가리는 소에느를 바라보며 루인이 피식 웃었다.

역시 보통의 여인이 아니다.

그렇게 동요하더니 금방 가면을 쓴다.

자신의 하대(下待)로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다면 방금처럼 또 버릇 운운했을 테지.

하지만 저 소에느는 지금 자신을 탐색하고 있었다.

루인은 그녀의 탐색전에 굳이 어울려 주기 싫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역겨우니까 빨리 끝내지. 잘 들어. 돌려 말할 생각 없으니까.”

“…….”

루인이 아무리 가주의 권위를 대리하는 대공자라지만 그래도 소에느는 혈족의 어른.

그녀로서는 대공자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적대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들어나 보죠.”

순간, 루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오늘부로 우리 형제들에게 관심을 거둬야 할 것이다.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을 멈추란 뜻이다.”

이 여자를 이대로 둔다면 은막의 뒤에서 검술왕 데인을 조종하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될 것이다.

눈꼬리를 파르르 떠는 소에느.

루인이 더욱 차갑게 웃었다.

“또한 파반 경과의 관계를 끊어라. 둘 사이의 더러운 사생아를 은밀히 지원하는 선까진 허락한다. 더 이상 가문의 재물을 착복한다면 당신은 물론 파반 경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 전부를 벨 것이다.”

순간, 소에느의 두 눈이 더는 크게 뜰 수 없을 만큼 치켜떠졌다.

누구도 알아선 안 될 자신의 비밀이 새어 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재빨리 평정을 회복했다.

“날 가문의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 고작 그거였니?”

가면을 벗고 진득한 욕망을 얼굴에 드러낸 소에느를 보고도 루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실체는 이미 질리도록 겪어 왔다.

이 가문에서 가장 완전한 위선자.

지금 이 순간에도 하이베른가는 저 여인의 욕망으로 더럽혀지고 있었다.

“아니.”

소름 돋을 만큼 차가운, 기괴하게 비틀린 루인의 미소.

“어떤 자식도 어머니를 죽인 당사자를 향해 예를 갖추지 않아. 그 더러운 얼굴을 당장 갈아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히 만용이고 예의지.”

사실은 더 먼 과거로 오고 싶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그때, 그 전으로.

하지만 그 모든 희생을 짊어지고 도착한 곳은 여기, 바로 지금 이 순간.

오랜 세월, 희석되고 망각하였다 여긴 분노는 역시 사그라지지 않았다.

삶의 활력처럼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한 분노는 자신이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서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 주었다.

“그나마 그 성이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조용히 숨만 쉬고 살아야 할 것이다. 다시는 무언가를 도모하려 들어선 안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루인은 침묵하며 기다렸다.

이제 저 욕망의 화신에게 뒤란 없다.

실체가 모두 드러난 이상 반드시 자신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스스스스-

소에느의 수신호에 따라 십여 명의 기사들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짙은 암갈색 후드를 뒤집어쓴 채 하나같이 얼굴을 감추고 있었지만, 루인은 그들의 면면을 모두 알고 있었다.

루인의 음울한 눈빛이 허공을 향한다.

‘고작 저 정도 놈들에게 가문을 내주셔야만 했습니까. 아버지.’

함께 대공자를 살해해야만 결속을 유지할 수 있는, 서로를 향한 불신 위에 서 있는 배덕자들.

고작 저런 비열한 놈들의 욕망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루인은 온몸의 피가 소용돌이쳤다.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폭탄을 터뜨릴 때가 되었다.

“과연 아버지는 모르실까?”

천천히 다가오던 배덕자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춘다.

히죽.

“과연 내 저주는 진실이었을까?”

순간, 소에느의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뭔가가 터져 나갔다.

대공자!

설마 저 루인이 자신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그 오랜 세월 동안 연기를 해 왔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대공자가 저주에 걸린 건 무려 십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대공자의 나이는 고작 일곱 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그 어린 나이부터 해 왔다고?

더욱이 그동안의 처참했던 몰골은 또 뭐란 말인가?

“여러분! 수작입니다! 당장 죽이세요!”

“당신이 어머니께 먹였던 그 옐콕 스프 말이지.”

“뭣!”

한없이 투명한 루인의 얼굴.

“그날. 나도 먹었다.”

이것은 진실이었다.

가슴을 쥐어짜며 쓰러지신 어머니를 앞에 두고 루인도 함께 죽어 갔었다.

그렇게 루인이 약해져 있을 때 쟈이로벨의 강림이 시작된 것이 문제였지만.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났다.”

“마, 말도 안 돼!”

옐콕 스프에 담겨 있던 독은 무려 헬락트의 침샘.

한 방울만으로도 오우거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그런 극한의 맹독을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공자의 처참한 육체를 생각하니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주장.

“난 분명 그날의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칩거로 위장하고 가문을 조사해 오셨지. 내가 당신에게 말했던 비밀들은 모두 아버지께 들은 거니까.”

배덕자들이 몸을 벌벌 떨기 시작한다.

소에느 역시 사고가 마비된 듯 털썩 주저앉았다.

“어째서…….”

“왜 지금까지 지켜보고만 계셨냐고? 썩은 감자 몇 개 뽑아낸다고 영지에 퍼진 마름병이 다 낫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 거지. 어디까지 번졌는지 파악을 한 후에야 한꺼번에 밭을 불사를 수 있거든.”

진득한 루인의 비웃음.

“배덕자들아.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리거라.”

드디어 가장 중요한 일이 끝났다.

이제 저들은 아버지의 눈빛만 봐도 오금이 저릴 것이다.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가 저들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 것이다.

숨을 쉬어도 사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송장 같은 심정으로 매 순간이 지옥일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께 이 더러운 것들을 보여 주기 싫었다.

배덕자들의 실체는 지금의 아버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추악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후련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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