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9화 (9/187)

<9화>

루인이 오드를 매개로 고리를 맺기 시작한 지 사흘째가 되던 날.

믿기 힘을 정도로 응축된 그의 새로운 마나홀을 바라보며 쟈이로벨은 전율하고 있었다.

고작 2위계에 해당하는 경지였으나 오드에 모인 마나의 절대량과 영성(靈性)이란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결과.

츠츠츠츠츠츠-

영롱한 빛을 내며 도도하게 회전하고 있는 무한한 힘!

-진마력에 비해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힘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마신의 핵 오드(Ord).

인간의 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효용 가치를 지닌 마나 매질.

뛰어난 성과가 뒤따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제야 쟈이로벨은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의 루인이 이루었던 경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네놈…… 인간의 굴레를 벗었던 것이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의 정점인 초인(超人).

그런 초인의 경지조차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돌파한 위대한 인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

그들 대부분은 머나먼 옛 신화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로, 인간들에게는 신(神)과 동일시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루인의 삐딱한 눈빛에는 자신의 새로운 마나홀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정도가 한계란 말인가.”

쟈이로벨은 어이가 없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지?

마력에 자신의 영성을 담아냈다는 것은 그 기질이 종주에 이르렀다는 가장 완벽한 증거.

끝 모를 도야(陶冶)의 도정, 그 무한한 마법의 길을 홀로 오롯이 걸어가는 존재.

이론이 규정하고 있는 모든 정석과 체계 위에 군림하며, 자신만의 마법을 새롭게 완성해 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구도자(求道者).

그런 위대한 현자들은 더 이상 마법사라 불릴 수 없었다.

현자라는 이름으로도 도전할 수 없는, 이미 마법의 역사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존재.

경배와 찬미로 대변되는 그 이름은 마도(魔道).

마법의 길(道)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다.

-네놈…… 진정 마도사의 경지에 이르렀던 놈이구나.

인류가 보유한 역사의 질곡, 그 치열한 시간 속에서 대마도사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간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인류에게 마법을 전한 위대한 존재.

-미친놈……!

저런 무시무시한 마법의 가능성을 지니고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다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악신 발카시어리어스를 소환하는 인간.

섭리를 거스르는 시간 여행자.

이제야 루인의 실체적 역량을 납득하는 쟈이로벨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는 무리다.”

뿌드득!

이를 악다물며 무시무시한 눈빛을 빛내는 루인.

과거와 동일한 경지로는 결코 ‘그’와 대적할 수 없었다.

자신 같은 대마도사가 열 명이 있다 해도 막을 수 없는 그야말로 반인반신의 존재.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대체 대악신 발카시어리어스와 계약한 인간이라니. 그자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각성하였기에 대마도사인 네놈이 이토록 경계한단 말이냐?

“인간계에 네 본체를 강림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그놈과의 승부는 장담할 수 없다.”

-뭣이!

루인의 대답에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격정을 토해 내는 쟈이로벨.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마왕들을 다스리는 마계의 절대자 마신이다.

그런 자신의 힘과 대등하거나 능가하는 역량을 지닌 존재라?

그것도 인간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발카시어리어스의 계약자라고 해도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필멸자의 수명으로 마신을 뛰어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단 말이다!

피식 웃는 루인.

“그놈의 계약 기간이 필멸자의 수준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뭐라……?

한없이 투명한 루인의 동공이 다시 허공으로 향했다.

“난 말이지.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그놈의 생애가 시작됐다고 해도 믿을 수 있다.”

인간이 초인의 경지를 뛰어넘어 아무리 수명을 거스른다고 해도 종의 한계란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만큼 긴 수명을 지닌 존재란 말도 안 되는 일.

신이 설계한 섭리를 부정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신이기 때문이다.

“이봐. 나도 이렇게 과거로 왔잖아.”

-…….

쟈이로벨은 그런 루인의 말에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고 있었다.

여기 섭리를 부정한 또 다른 인간을.

자신의 관점에서는 발카시어리어스 계약자나 시간을 거스른 루인이나 비슷한 것.

그때, 루인이 허공에서 둥실거리고 있는 오드를 다시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나저나 적어도 ‘적멸의 어스름’을 오드에 새기기 전까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군.”

-적멸의 어스름?

적멸(寂滅)의 어스름.

모든 물리력을 상쇄하는 효과와 동시에 8위계 이하의 마법까지 모두 방어할 수 있는 마계 최강의 대마법 절대방어룬(Rune).

곰곰이 생각해 보던 쟈이로벨은 루인의 고민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군. 위력이 반감되겠구나.

소환되기 전까지의 오드는 시전자의 영계(靈界)에 스며들어 있다.

지금이야 외부에 소환되어 진마력과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기존처럼 흘러나오는 진마력을 수습하는 방식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루인은 직접 마나 서클을 만들었다.

그 말인즉, 이제 스스로 마나의 고리를 끊임없이 순환해야 한다는 뜻.

오드를 마계와 인간계의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영계에 보관해 온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꼭 이렇게 허공에 꺼내 위험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는가? 몸에 품고 있어도 큰 무리는 없을 텐데?

“날 바보 취급하는 거냐? 내가 안 해 봤을 거라 생각해?”

-해 봤다고?

“후. 마나가 몸으로 스며들지 않아. 아무래도 혈주신(血珠身)이 원인인 것 같군.”

마계의 마법과 인간의 마법이 각기 흑백(黑白)의 마법이라 불리는 이유는 지독히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성의 기질 때문.

혈주마공에 의해 진마력을 받아들이기 위한 최적의 육체가 되어 버린 루인의 몸이 이 세계의 마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마나홀을 외부에 소환할 수밖에 없는 마법사다.”

아이러니하게도 회귀와 동시에 혈주마공을 몸에 새겼던 것이 최악의 실수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음…….

쟈이로벨은 루인의 착잡한 심정을 그제야 이해했다.

마법사가 외부에 마나홀을 소환한 채로 전투에 임한다는 건 단순한 약점 수준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단숨에 마법사의 역량 전부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

“거기에 하나 더 절망적인 게 있지.”

-……나 역시 짐작하는 바는 있었다. 발현(發現)이 힘든 것이냐?

파스스스-

루인의 수인이 맺히자 잠시 허공에 드러났다 사라져 버린 검붉은 불꽃.

“이 간단한 하기라덴조차 제대로 맺히지가 않아.”

하기라덴.

인간의 백마법으로 치면 파이어볼과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는 마계의 흑마법이었다.

-아무리 하기라덴이라고 해도 진마력일 때야 비로소 제 위력을 발휘하는 법. 재료가 다른데 같은 음식이 나올 수는 없겠지. 게다가 네가 이룬 마나는 뭔가 더 특별하다.

“그래.”

루인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대마도사에 이른 자의식으로 능히 마나를 이룰 순 있었으나 마법을 구현할 체계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자신은 이제 새로운 토대 위에 마법을 구축해야 했다.

-이 세계의 마나를 다뤄 온 것은 인간. 너는 역시 인간의 마법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구나.

쓰게 웃는 루인.

지금 당장 과거의 경지를 모두 회복하고 치밀하게 ‘그’를 대비해도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판국.

그런데 처음부터 마법을 다시 배워야 하다니.

“다른 방법은 없겠지?”

-나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로지 진마력만을 다뤄 온 자. 아무리 내가 마신이라고 해도 인간의 마나를 다루는 점에 대해서는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역시 그런가.”

그토록 오랫동안 준비해 왔는데 처음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루인은 허탈하고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체계를 새로이 쌓아 올린다는 것이 꼭 나쁜 점만 있진 않겠지. 오히려 다른 차원의 경지가 새롭게 열릴 수도 있다.

“후…… 문제는 시간이라고 멍청아.”

발카시어리어스를 소환하면서 이미 수명의 절반을 날려 버린 마당.

역사에 개입하여 ‘그’가 등장할 시간을 앞당긴다고 해도 그때까지 그와 대적할 경지를 이룬다는 것은 너무 지난한 목표였다.

아무리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려 본들 사실상 불가능한 일.

하지만 루인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이 소중한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마법은 당분간 잊는다. 일단 가문부터. 당면한 과제부터 하나씩 해결한다.’

문득 호수 밖 머나먼 남쪽을 바라보는 루인.

‘이제 슬슬 반응이 오기 시작하겠군.’

비밀리에 아버지가 움직였다.

이제 가문의 더러운 배덕자들도 위기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들은 제 주인에게 전력으로 달려가 가주의 변화를 낱낱이 고했겠지.

물론 너무나도 변해 버린 대공자의 이야기와 함께.

“후…….”

마법의 기반은커녕 몸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월례 회의에 참석한 이유.

이제 그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다.

뿌득!

루인의 악다문 잇새에서 처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소에느 프란시아나 베른!”

대 하이베른가의 숨은 권력자.

아버지의 부재를 틈타 이 철혈의 가문을 암중으로 장악해 버린 여인.

욕망의 화신, 그 배덕의 이름을 루인은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누굴 그렇게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냐?

히죽 웃고 있는 루인의 미소란 소름 돋을 만큼 무감각했다.

루인은 그녀에게 결코 그런 안락한 마지막을 선사할 수 없었다.

고작 죽음으로 용서받기엔 그녀가 저질렀던 죄업이란 너무나 극악했다.

“죽음이란 말이지. 누군가에겐 자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루인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내가 원하는 건 영혼의 말살. 과연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 과거로 돌아온 후 난 늘 그 생각만 해 왔지.”

마계의 잔인한 마왕 놈들에게서나 들을법한 대사에 쟈이로벨이 기꺼운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핫하! 아무리 봐도 넌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놈이다! 마치 인간의 탈을 쓴 마왕 같군!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흑암(黑暗)의 공포라 불릴 수 있었겠는가?

이죽거리며 오드를 바라보던 루인이 뱃속에서 더욱 음흉한 속내를 드러냈다.

“자, 이제 나의 새로운 마나홀에 적멸의 어스름을 새겨 보자고.”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적멸의 어스름은 8위계의 경지에 이르러야만이 시전 가능한 초고위계 룬마법.

이제 겨우 마나의 고리를 이룬 상황에서는 결코 펼칠 수 없는 권능이었다.

“8위계의 경지를 밟기 전에 초인이라도 만난다면 나보고 죽으라고? 설마 적멸의 어스름을 새기는 주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뭣……?

“진마력은 이제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텐데? 너 역시 내가 죽으면 별로 재미없잖아? 네놈이 아무리 길게 살아 봤자 시간을 거스른 인간을 또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까?”

-미친놈! 아직 회복이 덜 끝났다! 그리고 강림체로 진마력을 쓰는 것이 본체에 얼마나 무리를 주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 너는 그 고통을……!

“잘 알지. 탈피(脫皮)보다 더 고통스럽다더군.”

마족들의 탈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아는 놈이 이런 부탁을 한다고?

히죽.

“뭐?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있나? 난 네놈의 호기심을 잘 알아.”

-크아아아아아!

그렇게 한참이나 광분하는 쟈이로벨.

결국 그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루인의 오드에 룬을 새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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