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8화 (8/187)

<8화>

진홍빛 노을이 잦아들자 밤이 찾아왔다.

어스름 속에서 저마다의 빛을 내기 시작한 무수한 별들.

루인이 수련장의 모퉁이에서 하늘을 바라본 것도 벌써 보름째였다.

쟈이로벨은 그런 루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놈이 보인 행동 패턴을 고려한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궁금해 미칠 수밖에.

-대체 뭘 보고 있는 거냐?

루인이 한껏 달아오른 쟈이로벨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꽤 오래 참아 냈군. 마졸.”

젠장! 빌어먹을!

왠지 뭔가 진 느낌이 들자 쟈이로벨은 질문하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새로운 호칭이 마음에 안 드나? 그나마 마물에서 마졸로 격상시켜 준 건데 말이지.”

-…….

도무지 정이 생기지 않는 놈.

자신의 미래를 다 알고 있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지닌 정보가 비대칭적이다 보니 매번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특히 머나먼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저 빌어먹을 말투.

쟈이로벨은 그것부터가 열불이 터져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루인이 하늘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며 수련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관찰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이냐?

쏟아지는 별빛의 포말들을 채취하듯, 허공을 향해 부드럽게 손을 뻗는 루인.

“마나(Mana).”

쟈이로벨은 어이가 없었다.

놈이 뱉은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놈은 무려 백 년 이상을 흑마법사로 살아온 인간이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

그런 놈이 고작 마나를 느끼기 위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왜지? 너라면 마나를 느끼는 건 일종의 요식 행위가 아니던가?

루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네 말대로 지금이라도 당장 마나를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가공하며 힘을 구현하는 건 가능하다.”

간단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마법사가 지향할 마력회로의 정석.

거기에 복잡다단한 도식을 더하고 시전자의 강렬한 염(念)이 언령으로 시너지를 일으킬 때.

비로소 마나는 파동하여 갖은 힘으로 치환되며,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술(術), 즉 마법술식이라 부른다.

-그럼 무슨 관찰이 필요하지? 지금이라도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쟈이로벨의 그 말에 루인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고민을 저 무식한 마신 놈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만무.

무한에 가까운 수명을 지닌 그의 관점에서나 간단한 일이지 인간인 자신에게는 결코 아니었다.

“확신이 생기지 않아.”

-확신? 무슨 확신 말이냐?

“지금의 나에겐 과거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

-음…….

비로소 루인의 고민을 이해하기 시작한 쟈이로벨.

무한한 수명을 지닌 자신의 입장에서는 강함이란 미래에 도래될 당연한 결과다.

반면 루인은 필멸자인 이상 반드시 시간의 효율을 따질 수밖에 없는 일.

루인이 다시 허공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진마력에 담긴 강렬한 마기를 제외하더라도 품고 있는 힘의 성질 자체가 극도로 단순하다. 너무 단조롭다고.”

사실 루인은 마나, 즉 마력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해 본 적이 없었다.

흑마법사의 특성상, 마음속으로 염(念)만 하면 계약을 맺은 당사자로부터 무한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힘이 바로 마나.

오드(Ord)를 통해 흘러나오는 강렬한 진마력을 술식으로 치환하여 발현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므로 루인이 평생토록 매달려 온 것은 마법술식 그 자체에 대한 이해.

만 년 이상 축적된 마신의 마법술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필멸자로서는 벅찬 일이었다.

이렇듯 진마력은 흑마법사에게 마땅히 보증된 힘.

하지만 루인은 막상 백마법의 길을 도모하자니 마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마법사가 마법의 근원인 마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인간계의 마나가 진마력에 비해 단조롭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가장 자연적인 형태로 보존된 그야말로 마나의 원형. 당연히 좀 더 순수할 수밖에.

인간계의 마나에 대한 쟈이로벨의 관점은 루인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평소 진마력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강변하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갑자기 인간계의 마나가 더 순수하다고 말하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진마력의 순수성은 네놈의 영혼에 새겨진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놈이 이제 와서 마나의 순수를 운운해?”

-미욱한 놈. 서로 다른 순수다.

루인의 표정이 더 황당하게 변했다.

순수(純粹).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는 고유한 성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로 다른 순수’라는 말은 성립될 수 있는 의미가 아니었다.

루인이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냐 그건?”

-오히려 내가 묻겠다. 마나란 무엇이냐?

순간, 루인의 두 눈이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초인들 위에 군림했던 대마도사에게 초보적인 마나의 이론까지 들먹이다니.

“자연의 음유(陰柔). 우주 만물을 아우르는 대원소들의 합(合). 태고 이래 존재해 온 가장 원형의 정기(精氣).”

기나긴 마법의 역사, 마나를 향한 현자들의 해석은 분분하지 않았다.

이미 하나의 완벽한 정설.

-하하! 역시 인간이군! 필멸자의 어리석은 시선이다!

드디어 루인을 이길 거리가 생긴 쟈이로벨.

“또 버릇 나온다. 허세 빼고 본론만 말해.”

연신 음침한 웃음을 날리던 쟈이로벨이 가르치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 그럼 설명해 보아라. 마나가 자연의 농축된 음유라면 왜 인간계보다 모든 면이 척박한 마계에 더 풍부한 마력이 존재하는지를.

뭐라 항변하려다 금방 인상을 찌푸리는 루인.

듣고 보니 그랬다.

그동안은 그저 마계라는 다른 차원의 특성이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마계의 자연이란 그야말로 황폐 그 자체.

그런 척박한 곳에서 진마력이라 불리는 농축된 마나가 무한히 퍼져 있다는 것은 이론상 성립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왜지……?”

마법사로서의 탐구열, 진득한 열망이 가득 담긴 루인의 질문.

-엘프라는 종족은 숲을 좋아하지. 숲에서 흘러나오는 풍부한 마나가 그들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설명인가.

“허세 부리지 말라고 했다.”

-참을성 없는 놈. 자, 그럼 묻겠다. 숲이 마나를 생성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마나가 숲에 모인다고 생각하느냐?

지극히 단순한 쟈이로벨의 말.

그러나 그것은, 루인이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의 해석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네 말은 설마?”

-그렇다. 마나란 우주 자연에 의해 발생하거나 순환되는 정기 따위가 아니다. 마나란 차원이 탄생했을 태초부터 설계된 신의 장난이며 객기. 그러므로 해당 차원에 속한 마나의 절대량은 언제나 불변(不變)한다.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차원에 속한 마나의 절대량이 이미 정해져 있다니!

마나가 우주 자연의 음유가 아니라 태초부터 신이 나눠 준 힘의 일부라고?

순수한 원소들이 쉴 새 없이 순환하며 뿜어내는 힘이 아니라?

-마나가 왜 숲에 모인다고 생각하느냐? 태초의 신이 스스로 창조한 것들 중 가장 흡족해했던 것이 바로 생명. 그것은 바로 생명을 아끼고 기꺼워하는 태초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마나는 신의 속성을 품고 있다.

-인간…… 너희들이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흥! 철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인간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인간 마법사는 왜 마나의 고리를 심장에 맺지?

“생명력…….”

-그렇다. 심장이란 생명력의 근원. 생명력이 강한 곳에 모이는 마나의 속성, 즉 신의 속성을 너희들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거대한 비밀을 알아 버린 기분.

루인이 넋 나간 표정으로 읊조렸다.

“그럼 마계의 진마력은……?”

-크흐흐흐! 마왕이 인간계에 강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대량 살상.

마왕이 강림하면 반드시 인간들의 생명을 무수히 앗아 갔다.

-우리가 다른 차원을 정벌하는 이유는 생명력을 포집하는 거점으로 삼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생명력으로 우리 세계의 형질 자체를 바꿔 버렸지. 마나가 더욱 잘 모이도록 말이다.

루인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설마…… 광활한 마계 전체를 마나 서클(Mana Circle)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냐?”

-그것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이지. 방금 듣지 못했느냐? 형질 자체를 바꿨다고.

뭔가를 깨달은 듯 루인이 벌떡 일어났다.

“설마! 마나의 형질을!”

-역시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놈이군. 맞다. 우린 마나의 형질을 바꿨다. 포집한 생명력으로 우리 세계의 마나를 가공한 것이지. 그렇게 가공된 마나를 우린 진마력(眞魔力)이라 부르기로 합의했다.

루인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저 미친 존재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품고 있는 마나 자체를 바꿔 버렸다.

생명력을 품어 버린 진마력은 더욱 많은 마나를 끌어모으는 선순환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마나가 섞여 진마력의 성질이 묽어질 때면, 또다시 생명력을 포집하기 위해 다른 세계를 침범했겠지.

비로소 루인은 마계(魔界)의 진면목, 무서우리만치 잔학한 진실을 모두 목도하고 말았다.

왜 쟈이로벨과 같은 마신이 ‘존재들의 맹약’, 즉 인과율에 제약을 받는지도 이제야 모두 이해되었다.

저 미친놈이 마왕들처럼 직접 인간계에 현신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재앙 수준이 아니라 멸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놈이 인간을 숙주로 삼고 생명력을 갈취해 온 것 역시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진마력을 영위하기 위한 우리의 각오와 열의란 그야말로 순수. 그것도 모르는 너희 인간들은 우리 마계를 그저 피를 즐기는 괴물들로만 인식하고 있지.

놈이 말한 순수가 그런 순수였을 줄이야!

“토할 것 같군. 확실히 너희 마족들은 선을 넘은 종족이다. 진마력이 그런 것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네놈과 결코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쟈이로벨이 비웃었다.

-오드(Ord)를 품고 있는 인간 주제에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크하하하!

“오드가 왜?”

-오드는 이 쟈이로벨의 근간, 즉 핵(核)의 일부를 떼어 내어 만든 것!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마신이 키운 핵이 얼마나 많은 생명력을 품어냈겠느냐?

“…….”

-크흐흐흐흘! 마신이 선사하는 진마력이 얼마나 가공한 힘인지 몰랐단 말이냐? 오드가 아닌 다른 진마력의 통로란 있을 수 없다. 웬만한 매질로는 너희들의 시간으로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몸에 오물이라도 묻은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루인.

그런데 그때.

별안간 루인의 머릿속에서 전광석화와 같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우웅-

갑자기 허공에 오드를 소환하는 루인.

이렇게 함부로 꺼낸다는 것은 과거의 삶 속에서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

흑마법사에게 있어 오드란, 파괴된다면 자신의 근원 자체가 사라지게 되므로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 같은 것이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자신의 본질을 보기가 껄끄러웠는지 쟈이로벨이 금방 역정을 냈다.

-치워라!

“잠깐!”

정말로 급속도로 모이고 있다.

진마력이 아닌.

이 세계의 순수한 마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쟈이로벨이 펄쩍 뛰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속셈이냐?

루인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감돌았다.

“과연 네 말대로 이 오드가 엄청난 생명력을 품고 있나 보군.”

-설마! 위대한 내 핵의 일부다! 네놈은 고작……!

씨익.

루인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마신의 핵(核) 오드(Ord).

인간의 심장이 품을 수 있는 마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초월적인 매질.

“고맙다, 쟈이로벨. 내 마나의 고리는 지금부터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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