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루인이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가문으로 퍼져 나갔다.
함부로 감정을 내보였다간 경을 치는 하인들이야 내색하지 못했지만 혈족들, 특히 루인의 형제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형이 돌아왔다고?”
“그렇다니까! 지금 큰오빠를 수련장에서 보고 오는 길이야!”
“수련장……?”
“응! 병도 다 나았데!”
데아슈의 맞은편에서 굳어 버린 소년은 차남인 데인 베른.
루인과는 달리 천재적인 검술 재능을 지닌 그는 하이베른가의 새로운 후계자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걸림돌이라면 오직 나이.
베른가의 성년을 상징하는 십오 세가 되면 그가 차기 대공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가문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기억 속의 형 루인은 언제나 해골이 연상되는 처참한 몸으로 누워만 있던 사람이었다.
보고 있는 사람까지 힘들 정도로, 동정하는 마음조차 생기기 어려운 참혹한 몰골 그 자체였던 사람.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이어 가던 형이 갑자기 건강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데인은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직접 봐야 되겠어. 안내해.”
“응!”
데인이 데아슈의 안내를 받아 수련장에 도착했을 때, 루인은 그저 수련장 한가운데 서서 담담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묘한 얼굴의 데아슈.
“아직도 저러고 있네.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어.”
그런 루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데인 역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계속 저렇게 서서만 있었다고?”
“응. 아침부터 꼬박.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어.”
역시 묘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데인.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가문의 수련법 중에서는 저런 모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긴 가문의 비전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라면 수련 기사들이나 사용하는 수련장에서 하진 않았을 것이다.
“형……?”
루인의 투명한 시선이 동생들에게 향한다.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무의미한 눈동자.
데인은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는 자신을 겨우 통제했다.
‘뭐, 뭐야!’
그것은 투기도 뭣도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사람의 기세.
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리며 불과 십사 세의 나이에 3성 기사의 경지를 이룩한 자신이 느낄 위압감은 결코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
데인은 건강한 형의 몸을 보고 있자니 막상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흉측한 골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몸이었다.
형의 몸 곳곳에서 펄떡이던 핏줄을 보며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나 완전히 달라졌다.
비록 마르고 생기 없는 모습은 여전했으나 탄탄했고 또 강해 보였다.
“용건이 없다면 방해하지 말고 물러들 가거라.”
이번에도 순간적으로 물러날 뻔했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데인이 진득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바위처럼 무거운 압박감.
그것은 분명 아버지나 유카인 삼촌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권위와 기세.
이게 하이베른가의 치욕이라 불리던 형이라고?
그렇게 루인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인은 결국 오기를 부렸다.
“방해하겠다면?”
맹렬한 투기를 드러내고 있는 데인을 무심히 바라보는 루인.
“타인의 수련을 방해하는 기사라…….”
데인이 피식 웃었다.
“그까짓 게 수련일 리가 없잖아?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게 수련이라면 숨을 쉬는 것도 수련이겠지.”
루인이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데인의 어린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는데 역시 좋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검술왕(劒術王) 데인.
르마델 왕국이 자랑하는 천재 기사.
하이베른가 역사상 최연소 가주.
하지만 그는 희대의 초인, 검성(劒聖)이라는 이름에 눌려 평생토록 스스로를 할퀴던 안타까운 무인이었다.
머나먼 시간을 되돌아와 이렇게 마주하는 동생이 반가울 만한데도 루인의 두 눈이 한없이 차가운 이유.
하이베른가의 멸망.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검술왕 데인의 죄업 때문이었다.
‘후…….’
이렇게 과거로 돌아와 그의 타오르는 눈을 직접 보고 있자니 알 것 같았다.
인간의 심성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해충, 오만(傲慢).
저 옹졸함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올무처럼 그를 옭아맬 것이고 또 그의 시야를 흐릴 것이다.
언제고 그 단단해진 오만이 검성이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게 된다면 이번에도 데인은 끝없이 스스로를 할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루인이 바라지 않는 일.
“어리석은 놈.”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데인.
“뭐라고?”
아버지에게조차 들어 보지 못한 치욕적인 언사, 자신에게 어리석다 운운한 사람은 지금까지 가문에 아무도 없었다.
“그 간단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냐? 멍청하기까지 하군.”
“뭐……?”
뿌득.
얼마나 세게 짓씹었는지 찢어지고 만 데인의 입술.
위대한 하이베른가를 긍지로 삼아 온 이상, 기사의 명예를 한시도 잊어 본 적 없는 데인이었기에 더없는 모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곧 데인이 차가운 눈으로 장갑을 벗어 루인을 향해 던졌다.
툭-
자신의 몸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무심히 응시하는 루인.
“혈족 간의 결투는 가율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닥쳐! 우리 하이베른가는 가문으로부터 유폐된 자를 혈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차앙-
데인이 검을 뽑아 들자 루인이 피식 웃어 버렸다.
“명예마저 버린 놈이구나.”
“뭐?”
순간, 루인의 전신에서 말할 수 없는 광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상대에게 무기가 없음을 알고도 검을 뽑는 기사란 없다. 기사도를 버린 자와 검을 섞는 것만큼 무가치한 일은 없겠지. 꼴도 보기 싫으니 그만 꺼져라.”
자신의 검마저 모욕당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데인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씹어뱉듯 말했다.
“검 가져와.”
루인의 입가에 또다시 떠오른 비웃음.
“이제 와서 명예를 챙길 셈이냐. 가상하구나. 그나마 부끄러움은 안다니.”
“닥치고 검 가져오라고!”
나직이 고개를 가로젓는 루인.
“기사도도 모르는 애송이와 검을 섞는다라.”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루인이 진마력 대신 자신의 생명력을 혈주신의 권능으로 서서히 치환하기 시작하자.
-진정 너는 죽고 싶은 게로구나.
루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쟈이로벨.
이미 그는 강마의 진을 소환함으로써 생명력의 절반을 소진한 상태.
한정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필멸자인 이상, 어떤 존재들보다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터.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기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네 하찮은 삶이 다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 없다. 하지만 그렇게 반복적으로 생명력을 치환했다간 네 혈주신이 깨어질 수도 있다.
루인이 피식 웃었다.
저 자존심 강한 마계의 마신은 지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인의 비전이 저런 애송이에게 깨질 수도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도 각오하지 않았다면 과거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이어진 루인의 더욱 진득해진 비웃음.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셈이냐.”
순간 하이베른가의 마샬 워 소드(Martial War Sword)의 검세가 데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다.
사자검(獅子劒)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 왕국 최고의 검술은 공간을 장악하는 데 특화된 검술.
소름 돋을 만큼 완벽한 궤적을 뽑아내는 데인의 검을 바라보며, 루인의 입가에 순간이나마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촤아-
눈부신 검광이 루인의 얼굴을 스친다.
결국 데인은 보고 말았다.
검날에 비친 그 의미 모를 미소를.
완벽하다고 생각한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는 충격보다, 그가 웃고 있다는 점이 더욱 기괴했다.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쭈뼛 설 만큼.
“으아아아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공세를 이어 나가는 데인.
그의 검에서 상서로운 빛이 일렁이기 시작하자 루인의 두 눈이 잔뜩 이채를 머금었다.
‘벌써 스피리츄얼 오러(Spiritual Aura)를 느끼기 시작했단 말인가?’
기사의 혼, 스피리츄얼 오러.
아직은 미약했지만 그것은 분명 스피리츄얼 오러의 기운이었고, 이는 데인이 4성의 경지를 문턱까지 넘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검술!
과연 르마델 왕국의 천재, 하이베른가를 이을 재목이었다.
그러나.
우드득!
순식간에 빈틈을 파고들어 데인의 겨드랑이를 움켜쥔 우악스러운 손길.
데인은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으나 그 고통은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악!”
너무나도 담담한, 한 올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루인의 눈빛.
“빈틈투성이. 네놈의 검은 겉멋만 잔뜩 들어 있다.”
지금 루인의 한 수 한 수는 대륙의 초인들조차 혀를 내둘렀을 만큼 강력하고 잔인한 체술이었다.
오히려 전장에서 그의 마법보다 체술에 죽어 간 이가 더욱 많았을 정도.
잔인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대마도사 루인의 독문체술은 혈주투계(血朱鬪界).
마계의 투신 ‘그레고라’조차 인정한 대마인전 최강의 전투체술이었다.
물론 흑마법보다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겉만 핥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6성 이하의 기사들에게는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놔! 놓으라고! 으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데인의 머리를 움켜쥔 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아 버린 루인.
퍽!
“느껴라.”
데인으로서는 난생처음 맛보는 비릿한 흙내음.
자신을 죽일 것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데인을 바라보며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루인의 입매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거기가 바닥이다.”
피가 나도록 이를 깨무는 데인.
어느덧 터져 버린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화가 나느냐.”
“주, 죽여 버리겠어! 이 모욕! 언젠가 반드시……!”
“대상이 틀렸다 데인. 너는 스스로에게 화를 냈어야 했다.”
루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오러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고 맘껏 뽐냈을 테지. 그러나 현실은 이 정도가 네 역량이다. 투기도 마나도 없는 내게 단 두 합 만에 겨드랑이를 잡히고 머리채를 내어 준 형편없는 연습량. 박수갈채에 도취되어 버린 천재. 재능에 먹혀 버린 검술.”
“뭐, 뭐라고!”
“이 형이 왜 한 번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는 건지 진정 아무런 의문조차 없었느냐?”
“그, 그건!”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해 보지 못한 애송이일 테니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겠지. 수련 기사들이 합을 맞춰 상대해 주니 진짜 기사라도 된 듯 신이 나 있었겠군.”
타앙-
뚝-
루인의 손놀림에 데인의 검이 부러졌다.
“무, 무슨 짓이야! 내 검을……!”
데인은 화를 내려다 입을 꾹 하고 닫고 말았다.
형의 가벼운 손짓에 어떤 이치와 위력이 담겨 있는지 도저히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검을 들 자격이 없다. 도대체 너를 기사로 서임하고 진검을 내어 준 이가 누구더냐. 설마 아버지?”
“무슨 소리야! 왕께서 직접……!”
그제야 이 철없는 오만의 정체를 깨달은 듯 루인이 지끈거리는 미간을 매만졌다.
어린아이의 재롱은 언제나 늙은이들을 즐겁게 한다.
르마델 왕국 최고의 권력자가 왕국의 보배니 자랑이니 자신을 치켜세우며 기사로 서임해 줬으니 이 바보 같은 놈은 거기에 취해 버렸다.
“잘 들어라. 여기가 전장이었다면 네 목은 벌써 비틀어졌다. 전장의 차가운 흙바닥에서 비명도 없이 죽어 간 시체 중의 하나란 뜻이다.”
“…….”
루인이 쥐고 있던 데인의 머리채를 놓아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가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 당분간 널 ‘시체’라 부르겠다.”
“큰오빠!”
“너도 닥쳐.”
비운의 여인이었으나 데아슈도 가문의 몰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어리석은 동생이었다.
“……뭐라고?”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막말에 큰 충격으로 굳어져 버린 데아슈.
“가문은 네 허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데아슈. 네 영혼을 채우는 것이 고작 그 화려한 드레스와 액세서리들이 전부라면 차라리 성 밖으로 나가 이름 모를 방계로 살거라.”
“꺄아아아악!”
도저히 듣기 힘들었던지 데아슈는 두 귀를 막고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루인은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가문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네게 남는 것은 무엇이냐. 남자들의 눈에 띄기 위해 악착같이 사교계를 드나들어 본들 그 화려한 드레스 외에 누가 네게 눈길을 주겠느냐.”
루인이 데아슈의 화려한 금장 드레스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조소를 머금었다.
“너 역시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지금부터 ‘드레스’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너희들의 자유이니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마음껏 화내 보아라.
너희들의 한계를 스스로 저주하고 나를 마음껏 미워하거라.
그렇게 바닥에 밑바닥까지 가 보거라.
루인의 시린 두 눈이 다시 시푸른 창공을 향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밑바닥까지 가 본 인간이 얼마나 무섭게 변모하는지를.
동생들이 그 바닥에서 기어 나올 수만 있다면 대 하이베른가의 미래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