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6화 (6/187)

<6화>

심호흡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다스린다.

의식을 깊게 드리워 수집한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나눈다.

무수히 분화된 경우의 수를 일일이 확인하여 부정적인 변수를 제거하고.

열화(劣化)시켜 쓸모없다고 판단 내린 방향성들까지 잊지 않고 다시 한번 되짚는다.

마침내 도출된 결론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수없는 검증으로 괴롭힌다.

대마도사의 삶 속에서 습관적으로 얻게 된 루인의 마인딩 기법.

복잡한 마력회로를 돌리는 듯한 이 특이한 과정은 어떤 논리적 결함도 허용하지 않았다.

초고위계 마법사들이 현자(賢者)라 불리는 이유.

강력한 마법보다 오히려 그들의 현명함, 그 놀라운 지혜와 안목이 더욱 가치 있기 때문이다.

이름 높은 왕들은 현자들을 조언자로 맞이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카젠이 바보가 아닌 이상 루인에게서 그런 현자의 면모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월례 회의를 종료한다. 모두 돌아가 명령을 기다리도록.”

가신들이 엄정하게 예를 표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카젠이 사자관을 벗어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의 반응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루인.

“그럴싸하나 단편적이다. 왕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빚을 진다는 것. 이 왕국의 기수(旗手) 카젠이 고작 하찮은 광산 하나 때문에 왕가에 빚을 지란 말이냐.”

굳건히 드러난 자부심.

그것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었다.

르마델 왕국의 하나뿐인 공작가.

군권의 절반을 쥐고 있는, 천 년 이상 지속되어 온 기수가의 긍지가 그의 명예 위에 철갑처럼 덧씌워져 있었다.

루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루어스 대평원 끝자락까지 닿아 있던 광활한 강역, 삼만에 달했던 거대 병단, 이백육십만의 인구, 세금을 바치지 않는 완벽한 자치권, 그 옛날 베른 공국(公國)의 위상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카젠의 동공이 완연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루인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이 좁은 봉토로 만족하시려거든 지금처럼 그렇게 기수의 긍지만으로 사십시오. 이름뿐인 대공(大公)이니 이젠 한물가 버렸느니 하는 귀족들의 수군거림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선을 넘지 마라. 루인.”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카젠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투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빛.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버지였으나 막상 저 무시무시한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루인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과거와는 달리 대마도사의 고고한 자아를 품고 있는 자신이었기에 그것은 적잖은 파문이었다.

과연 대 하이베른가의 가주.

왕국의 기수다운 기도다.

그러나 루인은 아버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검이 품고 있는 것이, 고작 기수가의 긍지가 전부라면 굳이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할 필요도 없었다.

“광산 하나를 차지하는 것만으로 진정한 대공가로 거듭날 수 있단 말이냐.”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것은 기사도 전마도 아닙니다.”

“그럼?”

“밀(Wheat)과 철(Iron). 작은 시작이겠으나 무시할 수 없는 기반이 될 겁니다.”

전황을 바꾸는 힘이란 강력한 기사도 전마도 아닌 밀과 철이라…….

그런 루인의 말은 카젠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은 무인이 아닌 전략가의 시선.

기수가의 대공자라면 강력한 무위와 정신으로 전장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그밖에도 파네옴 광산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여러 가지입니다. 파네옴 산과 인접한 영지는 세헬. 렌시아 놈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지요. 렌시아가의 동향을 지근거리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

“또한 광업에 관련된 길드들을 우리 영향력 아래 흡수하는 것도 굉장한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촘촘한 정보망만큼 힘이 되는 것도 없지요. 능력 없는 보웬 공에게 빌붙어 살던 자들이니 다루기도 쉬울 겁니다. 적당히 회유책을 제시하거나 압박을 가하면 쉽게 부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조금씩 분노를 가라앉히던 카젠이 다시 예의 냉랭한 눈빛을 발했다.

“또?”

“지금까지 제가 말한 모든 이득보다 더 대단한 효과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뭐란 말이냐?”

루인의 침잠하는 두 눈.

“귀족가의 암투를 늘 고고하게 관망만 하던, 그토록 고상하기만 했던 하이베른가도 이제 제 이득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왕국 최고의 귀족인 대공(大公)이 속물처럼 변할 수도 있다.”

루인이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왼쪽으로 기울였다.

“추가 기울 겁니다. 기수가의 놀라운 변신은 반드시 기존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렌시아 놈들에게 줄을 섰던 이들이 이제 눈알을 굴리기 시작하는 거죠.”

이 대목에서만큼은 카젠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코 지혜라는 단순한 잣대로써 설명할 수 없는, 도저히 그 나이의 안목이라고는 믿기 힘든 면모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루인을 응시하는 의뭉스러운 눈빛.

“이렇게까지 생각한 너라면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보웬 공의 광산을 수습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왕국의 기수 하이베른.

다리오네가와 길드들 사이의 채무 따위는 충분히 조율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검술 명가.

하이베른가가 보증을 서거나 채무를 떠안는 조건으로 보웬과 협상을 한다면 분명 광산을 헐값에 매입할 수 있는 터.

이미 다리오네가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본 가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그래서 묻겠다. 네 재정안은 지나친 긴축. 혈족과 가신들을 옭아매려는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냐?”

루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영지 순찰은 언제였습니까?”

“영지 순찰……?”

환혹계 마법이 서린 여리고의 환영은 매우 민감한 성질을 지닌 아티펙트다.

고정된 곳이 아닌,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선 하마터면 환영 마법이 깨질 수 있었으니 웬만해선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한 카젠이었다.

“힘을 다하신 아버지께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주좌에 앉아 그저 귀를 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세월만 십 년. 그렇게 아버지와 제가 바보로 있는 동안 삼촌들은 힘을 키웠고 고모들이 이권을 차지했죠. 각 지역의 가신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지나친 물자 비축, 과도한 훈련 비용, 회계의 기본을 깔끔하게 무시하는 출납기록까지. 이건 단순히 방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왜 그들의 창고를 한 번도 들여다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서류로만 접하는 세출을 정말 온전히 믿으셨습니까?”

“그들은 기사다.”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가는 루인.

“후…… 기사도 인간입니다. 거친 푸성귀보단 부드러운 고기가 더 먹고 싶고, 배에 기름이 끼면 서는 것보다 눕는 것이 더 편한 인간 말입니다.”

아들이 순결한 기사도를 모욕하고 있었으나 카젠은 감히 반박할 순 없었다.

인간의 완악한 본성, 그 깊은 내면의 욕망들은 고결한 기사라고 비껴가진 않았다.

“그들이 진정…….”

“아버지께서 수에 밝으셨다면 진즉에 파악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곳곳에 조작의 흔적이 역력하니까요.”

사실 카젠은 회계 장부를 신경 써서 들여다보진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고 있었던 루인.

드높은 명예도 강력한 검술도 녀석의 불치병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세월 앞에 얄팍해지는 법.

어깨를 짓누르는 기수의 무게가, 영지를 살펴야만 하는 대공의 책임이, 자신의 슬픔을 나약함이라 여기도록 만들었다.

유폐의 명을 내린 것 역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 어쩌면 자신을 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보지 않는 것이 그나마 견디기 쉬웠으니까.

카젠이 고개를 들어 다시금 자신의 아들을 바라본다.

단지 유랑민에 관련된 보고서 한 장과 회계 장부를 들여다본 것만이 전부.

한데 모든 사안의 해법을 넘어, 가문이 나아갈 방향성까지 제시하고, 왕국의 기수를 자처하던 자신의 정신까지 일깨운다라…….

“이제야 묻겠다. 넌 누구냐.”

지극히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이토록 사안을 폭넓게 조망하고 무수한 논리적 기재와 당위성을 만들어 내는 통찰력.

그것은 열일곱 소년으로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경험의 간극이었다.

무엇보다도 루인은 자신의 아들.

한순간도 병마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녀석의 영혼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었는지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황폐한 마음으로 어떻게 이런 지혜를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뜻입니까?”

“날 바보로 여기느냐?”

가망 없이 죽어 가던 루인이 살아난 것만으로도 믿기 힘들 지경.

하물며 아득한 현자가 되어 나타났으니 카젠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의심을 가지실 거면 제가 혈류 마나석을 도려냈을 때부터 했어야죠.”

씨익.

웃고 있는 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카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심장 어림의 동맥을 잘라 버린 루인.

평생을 고련해 온,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무장된 기사들에게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법.

“…….”

루인은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를 속일 순 있어도 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다.

하물며 이 못난 아들을 지키려고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아버지임에야…….

마음은 모두 말해 드리고 싶다.

적어도 이 바보처럼 억척스러운 아버지에게만큼은.

하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온 참혹한 저주가, 마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의 객기였다는 것을 과연 받아들이실 수가 있을까?

천 년 이상 하이베른가를 괴롭혀 온 저주의 정체가 모두 쟈이로벨의 장난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더욱이 그런 미친놈과 자신의 정신이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꽉 막힌 아버지는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섭리를 역행한 자신.

회귀에 얽힌 비밀은 세상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인.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겠다는 얼굴 같구나.”

카젠의 두 눈이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어설픈 핑계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게지. 네가 보여 준 통찰력은 단순한 지혜 이상의 것. 만약 십 년 이상 유폐지에서 지내는 동안 지식을 쌓았다느니 하는 허술한 거짓말을 했다면 나는 너를 가문에서 당장 추방했을 것이다.”

루인이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검 하나로 왕국을 짊어지고 이 나라 무력의 정점에 서 있는 기사.

이 눈앞의 거인은 자신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위대한 하이베른가의 대공이었다.

자신 역시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 대마도사.

그러나 아버지 또한 르마델 최고의 기사다운 안목과 권위를 지닌 절대자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돌아가서 쉬거라.”

미련 없는 담백한 아버지의 말투에 루인은 선뜻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문에서의 축출까지 언급한 마당에 이대로 돌아가라는 명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을 거두시겠다는 뜻입니까?”

카젠이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머리로만 이해됐을 뿐이다. 이 정도 지혜를 지닌 놈이라면 망설임 없이 가슴을 도려낸 것 역시 어리석은 만용이 아니라 계산이었던 게지. 반드시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루인이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카젠의 진중한 음성이 또다시 울려 퍼졌다.

“어째서 혈류 마나석을 알아차린 건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세월을 뛰어넘는 그 지혜는 또 무엇인지…… 이 아비는 어느 하나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허나…….”

카젠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한다.

“너의 몸짓과 숨소리, 또 말투, 그 눈빛까지…… 어느 하나 내 아들이 아닌 것 또한 없구나.”

루인이 욱하고 치미는 뜨거움을 겨우 참고 있을 때, 카젠이 그의 두 어깨를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이베른의 대공자여. 나의 장자, 나의 아들아.”

“아버지…….”

루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버지와 시선을 맞춘다.

“그저 네가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할 수만 있다면…… 오직 그것만이 이 카젠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잠시 욕심을 부린 못난 아비를 용서해 다오.”

자식은 특별히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단지 살아 있음에, 건강하기만 하다면 부모는 한없이 기꺼운 것.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아비의 마음.

“장성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게 비밀이 생겼다는 것은 기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

더없이 환하게 웃는 카젠.

“기사에게 있어 비밀이란 신념(信念)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더냐.”

세상의 모든 아비가 그렇듯, 그의 눈빛은 너무도 따뜻했다.

“이 아비는 기꺼이 네 신념을 지켜 줄 것이다.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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