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5화 (5/187)

<5화>

하이베른가의 가주실.

카젠을 바라보는 집사 아길레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렸다.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그의 분위기는 분명 강건했던 그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몽델리아 산맥의 지배자 카젠.

그렇게 평생토록 카젠을 보필해 온 집사 아길레가 가장 민감하게 그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는가?”

“예, 가주님.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 하이베른가의 월례 회의가 열리는 날.

광활한 영지로 흩어져 있던 가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의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다.

카젠이 묵묵히 왕국의 기수를 상징하는 사자관(獅子冠)을 머리에 썼다.

“가지.”

가주실을 나선 그가 기다란 회랑을 지나자 종복들이 황급히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

사자관을 쓰고 금린사자기를 손에 든 카젠은 더 이상 일개 가문의 가주가 아니었다.

왕국의 권위 그 자체를 대변하는 존재.

금린사자기에 속한 막강한 군권은 가히 국왕의 권력에 비견될 정도다.

끼이이익-

덜컹-

대회의실에 앉아 있던 가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굽힌다.

용맹한 기사가 아닌 자가 없었으나, 감히 금린사자기를 마주 바라볼 순 없었다.

가주좌에 착석한 카젠.

그가 금린사자기를 깃대에 걸자 그제야 가신들이 허리를 폈다.

“얼굴이 보기 좋군, 소로드. 아들이라지?”

카젠의 시선을 받은 기사 소로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예. 부끄럽습니다.”

“하하!”

카젠이 웃음을 터뜨리자 여기저기에서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십 줄을 바라보는 소로드가 마침내 아들을 맞이한 것은 모두의 경사이자 축복이었다.

“이든 경이 이를 갈겠군. 내기에서 졌으니 일 년은 금주가 아닌가?”

씨익 웃으며 이든을 바라보는 소로드.

“잘된 일입니다. 헤네스 포도밭의 절반은 녀석이 해치우던 마당이니 영지민들에게는 축복이지요.”

“뭣이!”

“하하하!”

이어 카젠은 다른 가신들과도 모두 안부의 인사를 나누었다.

가신들의 사소한 사정까지도 잊지 않고 보살피는 그의 덕망이란 하이베른가를 향한 강력한 충성심의 원동력.

하지만 그렇다고 월례 회의가 마냥 회포를 푸는 자리만은 아니었다.

“포돔 지역의 상황은 좀 어떤가? 아직도 그대로인가?”

굳은 얼굴로 카젠에게 서류를 내미는 소로드.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야말로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이제 영지민보다 유랑민들의 수가 더 많을 지경입니다.”

그의 곁에 있던 기사 웨거도 거들었다.

“그 여파가 저희 리타 지역까지 미쳤습니다. 점점 유랑민들이 남하하고 있습니다, 가주.”

“으음…….”

카젠이 굳은 얼굴로 고심하기 시작하자 소로드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습니다. 목책을 두르고 경비병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유랑민들을 더 받았다간 영지의 치안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동의한다는 듯 웨거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에 세금 한 푼 내지 않던 유랑민들을 계속 구휼해 주고 있으니 영지민들의 불만도 만만치 않습니다.”

카젠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더러 지금 왕국 내부에 국경을 만들란 말인가. 비록 유랑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하나 그들 역시 왕국의 신민. 왕국의 기수를 자처하는 하이베른이 백성을 내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한정 받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주. 이대로 방치한다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만. 보웬 공 쪽은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소로드가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웬 공에게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리오네 남작가는 이미 파산입니다. 그에게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 많은 영지민들을 부랑자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가문을 정리하고 왕국 밖으로 도주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소로드를 바라보는 카젠.

“그게 사실인가?”

“아직은 소문이지만 그동안의 행적을 살펴봤을 때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쳤군.”

다리오네 남작가는 왕국의 무수한 길드와 은행들에게 빚을 졌다.

그런 막대한 채무를 뒤로한 채 무책임하게 왕국 밖으로 도피를 하다니!

귀족의 명예도 남작의 권위도 모두 버릴 만큼 절박했단 말인가?

“으음…….”

카젠의 답답한 신음성.

회의장의 분위기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가주가 왕국의 권위를 짊어진 기수로서의 책임을 운운하는 마당에 마땅한 대책이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

그저 밀려들어 오는 유랑민들을 기존의 영지민과 마찰 없이 지낼 수 있게 독려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때.

끼이이익-

회의실의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오는 소년.

그를 보자마자 카젠이 의자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루인!”

카젠의 외침에 모두의 고개가 루인을 향해 꺾어졌다.

대공자 루인.

이름만 들어 봤을 뿐 이곳에서 대공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만을 추리자면 카젠의 최측근 가신들과 집사, 그리고 직계 혈족들 정도가 전부였다.

모두 쉬쉬하고 있었지만 대공자가 유폐된 신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불치의 병이 원인이든 저주를 받았든, 가주가 입을 다문 이상 이들은 단 한 번도 대공자의 안위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대공자가 월례 회의에 나타난 것이다.

드르륵-

십 년 이상 공석이었던 의자가 처음으로 주인을 맞이했다.

사자의 갈기로 장식된 후계자의 자리.

하이베른의 적법한 대공자로서 행하는 루인의 첫 번째 의식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동요를 참아 내는 카젠.

“네가 여기에 어떻게……?”

어제까지만 해도 시체처럼 누워 있었던 루인이었다.

고목처럼 말라 가던,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던 아들이 갑자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나다니!

“앉을 자격이 없는 겁니까?”

어처구니없는 루인의 대답에 카젠은 기가 찼다.

월례 회의의 참가 자격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카젠은 그저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루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일단 먼저 몸을 살피거라. 집사!”

하지만 루인의 투명한 시선은 원탁 위의 서류로 향할 뿐이었다.

묵묵히 읽어 내려가는 루인을 신기한 동물 보듯 쳐다보고 있는 카젠.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꼼꼼하게 서류를 살피던 루인이 문득 아버지를 응시했다.

“가문의 회계를 열람하겠습니다.”

“뭣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루인.

“자격이 없는 겁니까?”

비상시 가주의 직위를 대리하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다. 가문의 장부를 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유랑민이 넘쳐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가문의 회계를 열람하는 것이 굳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다.

그러나 대공자의 자격을 내세우며 해 온 요청. 마땅히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회계 장부를 가져오라.”

조용히 허리를 굽히며 회의실을 빠져나간 집사 아길레가 잠시 후 한 아름 회계 장부들을 안고 나타났다.

“지금 모두 살필 것이냐?”

대 하이베른가가 집행하는 예산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모든 결산 분야를 살피려면 적어도 사흘 정도의 시간을 통째로 비워야 가능할 것이다.

“개략적인 정도만 보면 됩니다.”

휙휙.

눈부신 속도로 장부를 넘기기 시작하는 루인.

과연 읽어 가며 넘기는 건지 그냥 넘기는 건지, 회의실에 모인 기사들의 표정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아? 저는 상관 말고 회의 진행하시죠.”

월례 회의에 처음으로 나타난 대공자가 갑작스레 회계 장부부터 열람하고 있는데 무슨 회의가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

가주 카젠조차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신들이라고 상황이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텁.

회계 장부를 덮은 루인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카젠의 굵직한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이제는 말해 보거라. 갑자기 가문의 회계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루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공자로서 가주님께 제안드리겠습니다. 첫째, 기사들의 훈련 빈도가 너무 잦습니다. 줄여야 합니다.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만 집중하시죠. 당분간 훈련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합니다.”

“그게 무슨……?”

하이베른은 기수가다.

왕국 최고의 무력을 상징하는 가문.

한데 그런 가문에 속한 기사들의 훈련을 삼가라니?

“둘째,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 외의 사치품들은 가문 내 반입을 금지할 것 역시 제안드립니다. 혈족들이 누리는 사치품목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루인이 기사들을 둘러봤다.

“셋째, 가신 여러분들께서 보유하고 있는 전마(戰馬)와 병기들의 규모도 너무 비대합니다. 유사시도 아닌데 엄청난 유지 비용을 굳이 감수할 필요가 없지요.”

소로드가 발끈했다.

“대공자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말을 살찌우며 전쟁을 대비하지 않는 기사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루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곳곳에서 새고 있는 가문의 재정을 빠짐없이 집어내고 있었다.

회의장에 모인 기사들.

유랑민 문제만 해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뜬금없이 숫자놀음만 해 대는 대공자를 그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재정을 긴축하면 반드시 불만이 터져 나오는 법. 그렇지 않아도 유랑민 문제로 뒤숭숭한데 가문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순 없다.”

아버지를 향해 의문을 드러내는 루인.

“그럼 파네옴 광산은 무슨 돈으로 수습하실 거죠?”

“뭐?”

모두 얼음이 되어 버린 회의장.

“파네옴 광산을 수습하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이냐?”

“다리오네가의 파산 이유는 방만한 영지 경영 때문입니다. 파네옴 광산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철광석만 믿고 모든 수익금을 펑펑 써 버린 것이 문제였죠.”

여기서 지금 그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존의 광구만 믿고 새로운 광맥을 개발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골드를 써 댔으니 당연한 결과.

이제는 말라 버린 우물이나 다름없는 파네옴 광산. 당연히 매입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쪽으로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 했다.

“여기서 보웬 공의 방만한 경영을 칭송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쓸모없어진 광산을 우리가 왜 수습해야 한단 말이냐.”

“그럼 유랑민을 끝없이 받아 주시든지요.”

“뭐라?”

카젠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파네옴 광산을 수습하는 것과 유랑민을 받아 주는 것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모두가 파네옴 광산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수의 광부들,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팔아 온 이들, 질 좋은 철광석을 매입하던 길드의 상인들, 대장장이들과 그들에게 숯을 납품하던 벌목꾼들까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루인.

“그들이 처음부터 유랑민이었습니까?”

그제야 루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한 카젠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모두 말라 버린 광산이다. 설사 우리가 매입한다고 해도 우리가 어떻게 광맥을 새로 개발할 수 있겠느냐?”

상인으로서 부를 쌓아 작위를 받은 다리오네가와는 달리, 하이베른가는 이름 높은 기사의 가문이었다.

왕국이 다리오네가에게 파네옴 광산을 맡긴 것은 그들에게 광산을 경영할 역량이 있었기 때문.

불행하게도 하이베른가는 복잡한 이권에 얽혀 상인들을 다루고 재물을 불리는 수완이 터무니없을 만큼 모자랐다.

“광맥을 왜 우리가 개발합니까? 빚잔치당하지 않기 위해 발 벗고 나설 이들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빚쟁이들.

카젠은 보웬 공을 죽어라 찾고 있을 그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또다시 떠오른 의문.

“나더러 광산을 사라고 했으면서 채권자들에게 개발을 맡긴다니? 남의 재산에 누가 발을 담근단 말이냐?”

“후우.”

도대체 얼마나 더 말해 줘야 이해를 할는지.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 버린 이 기사의 가문.

천 년 전만 해도 거대했던 가문의 봉토가 왜 이렇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었다.

“지금 그 광산을 가장 매입하고 싶은 사람들은 보웬 공의 채권자들일 겁니다. 타국에서 기술자를 납치해 오든 집채만 한 폭탄으로 광산을 통째로 터뜨리든 그들이 가장 먼저 광맥을 찾고 싶어 한단 뜻이죠. 그것이 빌려준 돈을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루인의 눈빛이 강렬해진다.

“하지만 그럴 수 없죠. 왜? 상인은 왕국의 재산을 함부로 탐낼 수 없으니까. 그래서…….”

루인이 소로드를 바라본다.

“경은 목책을 치고 경계를 설 것이 아니라 보웬 공 본인 혹은 가주인(家主印)을 지닌 후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지금 당장 왕성으로 출발할 채비를 하세요.”

“……왕성?”

“명분도 좋지 않습니까? 유랑민의 남하. 혼란스러운 영지를 수습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 이 모두를 국왕께 아뢰고 광산의 운영권을 받아 오십시오.”

모두가 멍하니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

한없이 사유(思惟)하는 존재들.

마법사의 정점에 선 자를 우리는 현자(賢者)라 부른다.

그리고 대마도사 루인은 그런 대륙의 현자들이 단 한 번도 넘어 보지 못한 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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