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4화 (4/187)

<4화>

마계의 잔인한 마왕(魔王)들.

그런 패자들 위에 군림하는 마신.

그러나 그는 차원이 다르다.

태초의 어둠.

유일무이한 절대악.

마계 최강의 포식자.

마신이라 불려 온 자신조차도 비견될 수 없는 그 아득한 격(格).

마계의 권력 지형과 같은 하찮은 잣대로는 평가하기 힘든 진정한 의미의 악신(惡神).

그것이 바로 발카시어리어스(Balka serious)라는 이름이 주는 절대성.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온통 영혼이 녹아내릴 만큼, 그 전율적인 공포가 쉴 새 없이 쟈이로벨을 짓누르고 있었다.

루인의 시야를 통해 마법진을 바라보던 쟈이로벨이 처참한 신음성을 흘린다.

-크으윽!

그의 권좌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신마력(神魔力)이 마법진에 서리기 시작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마신은커녕 마왕과 계약한 인간만 나타나도 이 연약한 대륙은 처참하게 유린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저 미증유의 신마력을 품어 내고 있는 마법진.

강림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이치도 살필 수 없다.

수만 년에 달하는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살펴봐도 저런 기괴한 형태의 마법술식은 처음 보는 것.

도대체 이 인간의 정체가 뭐길래 마신에 이른 자신의 지혜로도 해석할 수 없는 마법진을 그려 낸단 말인가?

-다, 당장 중단하라! 넌 네 동족들이 걱정되지도 않는단 말이냐?

그의 신마력이란 그야말로 절대(絶對).

미세한 차원의 틈에서 스며드는 가벼운 신마력만으로도 이 인간계는 용암이 들끓는 지옥처럼 변해 버릴 수도 있었다.

“지껄이지 말고 잘 숨어. 이미 ‘존재들’의 주시가 시작됐을 거다.”

그 말에 뭔가를 느낀 듯, 쟈이로벨이 혼비백산하며 루인의 영혼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비록 사념체일 뿐이라도 마계의 절대악을 소환하는 것은 세계의 섭리와 인과율을 단숨에 거스르는 일.

순간.

발광하던 마법진으로부터 흘러나온 칠흑(漆黑)이 촉수처럼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간다.

다채롭게 발광하며 세상을 수놓던 빛들이 순간적으로 사멸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도 동시에 멎어 버린다.

오직 루인.

그만이 너울거리는 칠흑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겨울 하늘의 차가운 별처럼, 한없이 투명한 루인의 동공에 창백한 점 하나가 상으로 맺혔다.

<흥미롭다.>

서슬 푸른 날붙이처럼 일렁이고 있는 발카시어리어스의 사념은 분명 식어 버린 마법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저 마법진은 자신의 지식으로부터 뻗어 나간 파편.

허나 다른 이, 그것도 하찮은 필멸자 따위에게 전한 기억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차원 권역을 해석하는 지식의 일부를 인간에게 전했을 리 만무한 일.

발카시어리어스는 단숨에 루인의 본질을 직시했다.

<놀랍군. 시간을 거슬렀구나.>

발카시어리어스는 억겁의 권태를 잊을 만큼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 그 미약한 그릇으로 파편이나마 자신의 지식을 해석했다는 것은 가상한 일.

물론 그것보다도 더욱 근원적인 의문은 남아 있었다.

<인간이, 내가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는 수준이었단 말인가.>

순간, 루인의 얼굴이 악마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저 사악한 존재의 단순한 흥미를 위해, 무수한 초인들의 영혼이 허무의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코 다시 환생할 수 없는, 한 줌의 의식으로도 남지 못한 완벽한 소멸.

순백의 아르디아나, 그 처연했던 성녀의 마지막 미소가 아른거리자 루인의 입가가 더욱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있지. 억겁의 권태를 견디게 해 준 네 존재력의 본질. 나는 그런 네놈의 의문을 해결해 주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불가(不可).>

분노한 듯 더욱 세를 불린 어둠의 촉수들.

자신조차 풀지 못한 섭리의 난제를 미천한 인간의 지혜로 가늠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루인이 이죽거리며 식어 버린 마법진을 응시했다.

“그래? 그럼 어째서지? 저건 분명 네놈의 파편일 텐데. 절대악이라는 네놈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인간과 거래했다고? 개소리!”

한낱 마계의 마물들조차 인간에게 힘을 내어 줄 때는 조건을 거는 법.

감정의 일부를 내어 주고 영혼을 저당잡힌 흑마법사들의 이야기는 인간들의 소설책에서조차 흔한 소재였다.

하물며 그런 마계의 정점에 있는 절대악임에 그 치밀한 탐욕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역시 놈은 참지 못했다.

지금의 이 한마디를 위해 죽어 간 모든 동료들.

루인이 마침내 씹어뱉듯 말했다.

“너와의 계약을 희망한다, 발카시어리어스. 매질을 원한다면 내 영력의 전부, 그것도 모자란다면 내 사후의 시간을 모두 네게 저당잡히겠다.”

사후의 영혼, 그로부터 억겁 동안 이어지는 노예의 길.

그의 권좌 아래 영원히 귀속될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제안이었다.

물빛처럼 투명한 루인의 두 눈.

죽어 간 모든 초인들의 의문이, 전 인류가 알고 싶었던 진실이, 마침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질문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절대악 발카시어리어스와 계약하여 ‘그’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갖추거나.

남은 하나는…….

<불가. 섭리의 맹약에 따라 계약자가 둘일 순 없다.>

털썩.

굳은 얼굴로 주저앉아 버린 루인.

모두가 설마하며 우려했던,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

그 실낱같은 희망이.

모두의 염원이.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설마 진짜로 발카시어리어스가 ‘그’와 계약 관계였을 줄이야!

<인간, 다른 제안을 하겠다. 네 영육을 마계로 소환하여 내 지배권의 절반을 할양하겠다.>

루인의 영혼 깊은 곳에 숨어서 듣고 있던 쟈이로벨이 경악했다.

유일무이의 절대악 발카시어리어스가 지닌 지배권의 절반이라니!

팔대마신조차 휘하로 부릴 수 있는 미증유의 힘.

그것은 인간의 권력, 그 정점이라는 황제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권한이었다.

그러나 루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꺼져. 앞으로도 너는 영원히 내게서 답을 듣지 못할 거다.”

순간 발카시어리어스의 사념체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뿜어져 나와 루인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뿐.

맹약을 깨고 신마력을 투사하여 벌레처럼 죽일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한다면 영원히 의문을 풀 수 없었다.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인간.>

화악!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햇살이 유폐지에 드리워졌다.

참을 수 없는 열패감, 전부를 잃은 것 같은 허무함에 루인이 주저앉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최악의 상황.

희망이 아닌 절망만 더해졌다.

멍하니 두 손을 들어 바라보는 루인.

“제길…….”

마계의 고위 존재와 계약하여 진마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혈주마공이란 생명력만 갉아먹는 계륵.

이제 자신은 더 이상 흑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가문의 비전을 잇는다는 것은 더더욱 비현실적.

기사(Knight)?

마법이 아닌 다른 역량으로 ‘그’와 대적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익혀 온 흑마법의 지식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지나친 비효율.

진마력이 주는 실체적 효율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평생토록 확인해 온 자신이었다.

자신에게 흑마법이란 영혼을 다해 숭배해 온 가치, 즉 자아 그 자체.

흑마법에 절어 있는 자의식의 관성을 버리고 새로이 기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숨죽여 지켜보던 쟈이로벨이 갑자기 경악성을 내질렀다.

-설마! 네놈! 시간을 거슬렀단 말이냐?

발카시어리어스와의 대화를 침착하게 관찰한 끝에 내린 쟈이로벨의 결론이었다.

루인이 허무하게 웃었다.

“금방 알게 될 거라고 했잖아.”

설마하니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 그것도 인간이 해냈다는 것을 쟈이로벨은 믿을 수 없었다.

-마법으로 시간의 권역을 해석하려고 했던 존재들은 모두 소멸되거나 미쳐 버렸었다! 도대체 어떻게? 불가능! 결코 불가능하다!

그래. 그렇게 네가 소멸되었지.

하지만 루인은 쟈이로벨에게 굳이 진실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 나와 계약하자! 숙주의 굴레를 풀어 주는 것은 물론 더없이 순수한 진마력을 공급해 주겠다! 대신 너의 모든 경험을 내게……!

그의 말에 루인은 차갑게 식어 버린, 이제는 그 기능을 다한 오드를 허공에 소환했다.

오드(Ord).

지배자와 계약자와의 약속.

영혼으로 맺어진 채 쉼 없이 타올랐을 그 화려한 불꽃이 그저 잿빛으로 식어 있었다.

“동일한 상대와의 계약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어. 영혼으로 맺은 계약은 시간의 역행으로도 깰 수 없지.”

타 버린 재처럼, 처연하고 쓸쓸한 그 흔적에 쟈이로벨은 숨이 막히는 심정이었다.

오드에서 미약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흔적.

-나…… 죽었……던 거냐?

이번에도 침묵하는 루인.

이래 봬도 쟈이로벨은 마신이었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 온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상상도 해 보지 않은 결말.

진실을 마주한다면 그 고고한 자의식이 깔끔하게 붕괴될 것이었다.

“몰라.”

그대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버린 루인이 어느덧 석양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슬픔, 비참한 감정이 솟구쳐 그대로 눈가로 흘러내렸다.

검성.

떠올리기도 싫은데 놈은 굳이 나타나 하늘에서 괜찮다고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점점 겹치기 시작하는 동료들.

노을 진 구름 위로 번져 가는 그 모든 추억들이 알알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이렇게 끝인가.

루인이 그렇게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 또다시 쟈이로벨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이 되찾고 싶어 하는 힘이 설마 마법이냐?

대답 없이 침묵하는 루인을 향해 쟈이로벨은 더욱 의문을 드러냈다.

-인간의 마법을 익히면 그만인 것을 고민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루인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동일한 위계라고 해도 흑마법사와 백마법사의 역량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왜?

적어도 마왕 이상의 고위 존재와 계약했다면, 최소 수천 년, 많으면 수만 년 동안 갈고닦아 완성한 그의 모든 마법 지식을 전수받게 되니까.

이렇듯 흑마법이 인간의 백마법보다 훨씬 강력하고 완성도 높은 것은 역사의 차이.

백만 년을 훌쩍 능가하는 마계와는 달리, 인간의 마법 역사는 고작 삼천 년이 전부였다.

더구나 인간계의 미약한 마나와 마계로부터 직접 공급받는 진마력 사이의 간극은 더 이상 말해 봐야 입만 아플 지경.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쟈이로벨이 저런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을 줄이야.

“헛소리 그만해. 쉬고 싶으니까 그 바보 같은 입 좀 닫고 있어.”

-흥, 누가 바보란 말이냐. 나와 계약했다면 내 지식 전부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뜻이거늘.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네놈의 마법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해서 없는 진마력이 갑자기 땅에서 치솟기라도 한단 말이야?”

쟈이로벨의 냉랭한 영언이 이어진다.

-머저리 같은 놈. 마계의 흑마법과 인간의 백마법은 각기 언어만 다를 뿐 분명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지. 물론 인간이 필멸자인 이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겠지만.

인간에게 마인만큼의 긴 수명이 주어졌다면?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었던 루인.

“그럼……?”

-그렇다. 네 지식으로 백마법을 쌓아 올린다면 너는 다른 인간과는 분명하게 다를 것이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루인에게로 쟈이로벨의 영언이 쐐기처럼 박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매할 뿐, 백마법이라고 해서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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