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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3화 (3/187)

<3화>

놈은 용(Dragon)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 끝에 마침내 내린 쟈이로벨의 결론이었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일.

놈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진명만이 아니었다. 분명 마계의 사정까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인간에게 마계(魔界)란, 범접할 수 없는 권능의 영역이자 소스라치는 공포이며 헤아릴 수 없는 미지.

인간의 역사 중 최고라 불렸던 현자들 몇몇이 마계를 탐험하겠다고 꼴깝을 떨어 댔지만, 놈들이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끝없는 절망뿐이었다.

마나를 다루기 시작한 지 만 년도 채 지나지 않은 미약하디 미약한 종족.

그것도 고작 백여 년 사는 것이 전부인 필멸자의 영혼으로, 무한 그 자체인 마계의 진실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더 당황스러운 것은 베른 놈들의 머나먼 시조와 자신 사이에 얽힌 사연까지도 놈이 꿰뚫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치욕적인 사건은 오직 당사자인 자신과 베른가를 세운 시조 사이의 비밀스러운 일.

인간계는커녕 마계에서조차 아는 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놈은 정말 용인가?

‘존재들’의 비호를 받으며 인간계를 관장하는 그들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세계의 주시자(注視者).

초월적인 지혜로 섭리에 개입해 온 그들만이 오직 마계의 사정과 인간사를 관통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놈의 강인한 생명력이란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역동적인 것이었다.

베른가 역사상 가장 눈부신 먹잇감.

녀석의 탄생 순간부터 숙주로 삼았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의 일생을 빠짐없이 관찰해 왔기에 놈이 용의 영격을 지녔거나 그 화신체라면 진즉에 눈치채고 경계했을 터였다.

“드래곤 아니다.”

순간 멍해진 쟈이로벨.

마치 자신의 머릿속까지 들여다본 듯한 놈의 말에 가히 기가 질릴 지경이다.

-무, 무슨 소리냐?

“네놈의 논리적 접근이야 뻔하지. 원래 본인을 잘났다고 믿는 놈들이 다 그래. 스스로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비현실을 찾게 되는 법이거든. 그래. 내가 어딜 봐서 드래곤의 화신체냐?”

-다, 닥쳐라!

“흐암.”

한껏 기지개를 켜던 루인이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그만큼 생명력을 골수까지 빨아 먹었으면 복구는 제대로 해 놔야지. 이게 뭐야? 말라비틀어진 힘줄은 그대로고 근육도 제멋대로 뒤틀려 있고…… 풋! 마신?”

-감히! 이 빌어먹을 놈이!

쟈이로벨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무슨 소꿉장난인가?

생명은 섭리다.

동원할 수 있는 진마력의 거의 전부를 희생했을 만큼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고 겨우 살려 놓았거늘 저런 무식한 망발을!

분노로 들끓는 쟈이로벨의 음성이 다시 루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넌 도대체 누구냐? 말하라! 어찌해서 마계…… 아니 본 마신의 사정을 죄다 알고 있단 말이냐!

“내가 왜 말해 줄 거라 생각하지?”

-기필코 네놈의 영육(靈肉)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이는 나 쟈이로벨의 진명으로 확언하노니……!

“거기까지.”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루인의 얼굴.

“여기 마계 아니다. 기껏해야 강림체에 불과한 놈이 약해지지도 않은 멀쩡한 숙주의 영혼을 찢어? 신종 자살이냐?”

순간 쟈이로벨은 전율했다.

이제 확실해졌다.

놈의 지식은 겉만 핥고 있는 허세 수준이 아니었다.

분명 마계의 지식 체계 전반을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진마력까지 죄다 털렸잖아? 회복만 한 달은 걸릴 거면서 허세 부리지 마. 매번 그 허세 때문에 망했으면서 그렇게 못 고치냐.”

그 후로도 루인은 쟈이로벨의 아픈 곳을 살뜰하게 찔러 댔고, 결국 주도권은 루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알려 줄 생각이 없으니까 괜히 발악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루인은 쟈이로벨의 호기심이 길게 유지되면 될수록 자신의 이득이 커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독히 두려워하며 고통받았던, 놈에게 당하기만 했던 과거의 개고생을 생각하면 이 정도쯤은 소소한 복수에 불과했다.

아직도 루인은 그때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곧 루인의 투명한 동공이 향한 곳은 유폐지 내부의 전경이었다.

작은 별장 앞, 쓸쓸한 호수.

오랫동안 가꾸지 않아, 어지럽게 자란 수풀과 화초로 가득한 정원.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한 이 단출한 공간은, 쓰라린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짓씹으며 견뎌 온 그 모진 기억과 슬픔들이 파고들듯 시야에 담겼다.

피식.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은 절망으로 밤을 지새웠던 나약한 영혼이 아니었다.

흑암(黑暗)의 공포.

단 한 사람의 힘이 웬만한 왕국의 군사력과 비견되었던 그 강대한 이름.

대륙에 무수한 공포와 충격을 선사했던 경외의 존재.

대마도사 루인으로서 살아온 경험, 그 억척스러운 삶들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남아 있었다.

‘최대한 빨리.’

마법을 회복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지금 이 시절의 동료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단수의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존재.

동료들의 재능을 인도하여 최대한 일찍 초인급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물론, 대륙 전체의 역량까지 모조리 끌어올려야 했다.

참담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이룬다고 해도 승리의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후우…….”

수백, 수천의 인마들을 벌레를 짓이기듯 쓸어버리는 그의 신적인 권능.

아니 단지 수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는 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신보다 눈부신 것은…….

“처절하기 때문이지.”

신이 완벽할 순 있겠으나 인간처럼 처절할 순 없다.

시간(Time).

세계를 관조하는 ‘존재’들마저도 허물지 못한 그 절대성을 정복하고.

과거로 돌아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바로 그 치열한 증거.

최후의 최후에 서서 승리를 거머쥘 존재란 틀림없이 인간이라는 것을 루인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어 묵묵히 정원 앞 공터로 걸어간 루인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체술도 아닌, 어쩌면 묘기처럼 보이는 그 기괴한 동작들을 확인하던 쟈이로벨이 경악했다.

-네, 네놈이 어찌!

마계의 이름 높은 수련 방식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마공.

그것은 다름 아닌 진마력을 다루기 위한 최상의 마체(魔體)로 거듭나게 해 주는…….

-네놈이 어찌 나의 혈주마공(血朱魔功)을 알고 있단 말이냐!

혈주마공은 마신의 권능을 가능케 해 준 비전.

휘하의 마장들은 물론이거니와 혈족들에게도 전수해 주지 않은, 그야말로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는 보물이었다.

“이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뭣!

만약 유출된다면 마계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마계 최고의 비전이었다.

그럼 엄청난 비전을 뻔뻔하게 도둑질한 것으로도 모자라 쓰레기인 양 폄하하다니!

하지만 분노보다 앞선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의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놈을 숙주로 삼으면서 자신의 기억이 일부라도 전이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부작용이 존재했다면 무한의 시간을 지나 왔던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정신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법.

이번이 그 첫 사례라고 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놈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도둑질을 해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우습구나. 넌 필멸자다. 그 미욱한 정신으로 어찌 무한의 증오를 담을 수 있단 말이냐. 네놈은 결코 혈주의 사념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어, 그래.”

루인은 쟈이로벨이 떠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동작만 연계할 뿐이었다.

-핫하! 단지 동작만 시늉하고 있구나! 인간 세상에 널리고 널린 체술을 익히는 편히 오히려 체력 증진에 도움이…… 음?

우득-

사무치는 원한을 입에 물고 짓씹는다.

하늘 끝에 닿은 원념을 폐부에 담아낸다.

피를 게워 응어리진 증오를 되새기고 비루한 육체를 찢어발겨 공포를 거스른다.

툭- 툭-

우드득-

흡사 부활하는 스켈레톤처럼, 루인의 온몸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그러다 곧 그의 모든 모공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다.

진마력을 담아내기 위한 첫걸음.

혈주신(血珠身).

이미 한 번 지나왔던 길이요 평생을 다뤄 온 힘이었기에, 루인에게는 마치 옷을 다시 입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

더 이상 쟈이로벨의 영언은 이어지지 못했다.

단언컨대, 무한에 가까운 그의 생(生)에서 지금이 가장 충격적인 순간.

루인이 자신의 육체를 진마력의 그릇으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십 분.

있어서도,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빠짐없이 지켜보고도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의 원념(怨念)이……!

자신의 강대한 정신으로도 수천 년 동안 증오를 갈고 닦아 겨우 완성한 사념.

아무리 인간의 감정이 다채롭다지만, 무수한 마계대전으로 벼려 온 마인의 증오심, 그 처절한 적의보다도 깊을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무한한 증오를 담아냈다고 해도 진즉에 미쳐 버릴 일.

인간의 허약한 정신 체계로 그 아득한 증오심을 버텨 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넌 누구지?

쟈이로벨의 영언은 한층 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을 깔보기만 했던 힐난조의 어투가 아니었다.

동격(同格).

어느새 그는 루인을 동격으로 대하고 있었다.

루인이 자신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진득한 피를 혀로 핥았다.

“말해 줄 생각 없다니까.”

-이익!

흑암의 공포.

대마도사 루인.

대륙의 그 어떤 현자와 초인들도 넘지 못한 거대한 벽.

쟈이로벨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그’를 제외한다면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고도 남았을 루인의 진면목이었다.

스스스스-

서서히 기화되기 시작하는 루인의 피.

아지랑이처럼 흩날리다 루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검붉은 기운이 점차 그의 몸으로 갈무리되었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쟈이로벨.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른 의문.

겨우 그릇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이 인간계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진마력(眞魔力).

마계에 너르게 퍼져 있는 농밀한 힘의 집합체.

마나의 순수성과 절대성, 그 질적 차이는 인간계의 마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계에 퍼져 있는 마나로는 결코 완성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필멸자의 미약한 수명 역시 걸림돌.

“역시 그게 궁금하겠지?”

피식 웃던 루인이 다시 핏빛 아지랑이를 일으켜 정원의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 냈다.

후우우우-

잦아든 먼지.

어딘가 모르게 묘한 위화감이 드는 문양.

루인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던 쟈이로벨에게서 기괴한 투의 영언이 흘러나왔다.

-설마 저것은!

강마(降魔)의 진!

그것은 마계 초월적 존재들의 사념을 소환하는 초고위계의 마법진이었다.

더구나 진마력 없이 강마의 진을 발동하려면 인간이 지닌 수명의 절반을 바쳐야 했다.

-도대체 누굴!

“네놈 밑천은 이미 다 알아서 말이지. 게다가 숙주 신분으로는 한계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대체 어떤 놈과 계약하려는 것이냐!

퉁명스레 흘러나온 루인의 대답.

“발카시어리어스.”

-뭐……?

루인의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빛났다.

“대악(大惡). 네놈들 대장.”

발카시어리어스.

태초의 어둠이라 불리는 마계 최강의 포식자.

-이, 이런 미친놈이!

경악한 쟈이로벨은 루인의 영혼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모두 진마력을 소진한 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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