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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2화 (2/187)

<2화>

“오래 버티시지 못할 겁니다.”

하이베른가의 친위 기사 유카인의 담담한 음성이 울려 퍼지자 카젠이 어두워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곧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침상으로 향했다.

온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루인.

‘어떻게…….’

체내의 혈류 마나석을 감지할 정도의 감응력을 갖추려면 적어도 7성 이상의 고위 기사나 되어서야 가능한 일.

하지만 루인은 7성 기사는커녕 수련 기사의 역량조차 갖추지 못한 병약한 소년에 불과했다.

“가주님. 이제 결단하셔야 합니다.”

“그만.”

“카젠!”

친위 기사 유카인의 전신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른 강렬한 투기.

하이베른가의 친위 기사를 결심한 후 단 한 번도 사적인 감정으로 가주를 부른 적이 없었던 유카인이었다.

그의 강직하고 올곧은 심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카젠은 다소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유카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것이 보이지 않는가! 카젠!”

유카인의 시선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직도 루인이 손에 꼭 쥐고 있는 혈류 마나석.

“대공자는 자신의 혈관을 통째로 베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진정 모르겠는가!”

혈류 마나석에 매달린 가느다란 실들 사이로 복잡한 마력회로가 그려진 금줄하나가 숨어 있었다.

그 금줄의 끝단은 루인의 굵은 혈관과 강력하게 흡착된 상태.

마법적 권능으로 이어진 매개였기에 강제로 떼어 낸다면 혈류 마나석의 마력이 모조리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떼어 냈다면 분명 대공자에게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을 테지! 하지만 대공자는 혈류 마나석의 잔류 마나를 지켜 내기 위해 자신의 혈관까지 통째로 도려냈다!”

혈류 마나석이라는 금단의 고대 시술을 재현해 내려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다.

그 절대량이란 왕국의 기수라 불리던 카젠의 모든 기량을 앗아 가기에 충분했던 것.

루인은 그런 아버지의 소중한 마나를 되돌려주기 위해 자신의 혈관까지 통째로 베어 낸 것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기사도요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절절한 효심이다! 대공자의 마음을 외면하지 마라 카젠!”

시간이 얼마 없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혈류 마나석의 잔류 마나를 모두 잃어버리게 될 터.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나오는 마나로 인해 점차 혈류 마나석이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카젠!”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가 억척스럽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카젠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마나를 취한다면 저 못난 놈에게 다시는 기회가 없네.”

혈류 마나석에 남아 있는 마나를 다시 취한다 해도 이룰 수 있는 것은 전성기 기량의 절반 수준.

설사 최전성기의 기량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아들의 목숨과 맞바꾼다는 것은 카젠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

죽어 가는 루인을 다시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카젠.

발현되는 순간부터 천천히 생명력이 고갈되는 이른바 ‘하이베른가의 저주’는 긴 세대에 걸쳐 무작위로 발현되어 온 가문의 저주받은 질병이었다.

“마탑의 늙은이들이 지금 당장 달려온다고 해도 가망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수백 년 동안 잠잠했던 하이베른가의 저주가 루인에게서 나타났을 때.

카젠은 오래전부터 가문에 내려오는 혈류 마나석의 마력 도식을 손에 들고 왕국의 마탑을 향했었다.

마력 도식을 본 마탑의 마법사들은 한결같이 이 세계의 지식이 아니라며 경악했고.

그렇게 현자를 중심으로 고위계 마법사들이 모조리 매달렸음에도 삼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고대의 혈류 마나석을 재현할 수 있었다.

“동맥이 통째로 잘려 나갔네! 어째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그 긴 시간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미 동맥이 잘려 나가 혈류 마나석을 루인의 몸에 다시 연결할 수도 없는 상황.

이성적으로는 혈류 마나석의 마나를 취하는 것만이 분명 최선이었다.

하지만 카젠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마탑에 전령까지 보낸 상태.

언제까지고 그는 석상처럼 이곳에 서서 마탑에서 올 소식만을 기다릴 것이었다.

결국 유카인은 결단했다.

스르릉-

유카인의 섬뜩한 칼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카젠 쪽이 아니었다.

츠캉-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정확히 사선으로 갈라진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카젠의 약해진 기량을 감추어 주던 환혹계 아티펙트 ‘여리고의 환영’이었다.

“유, 유카인! 이게 무슨 짓인가!”

멱살이 잡힌 채 뒤흔들리고 있었으나 유카인의 눈빛엔 한 점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함 그뿐이었다.

기사의 예법을 다해 담담한 얼굴로 롱 소드를 바치는 유카인.

“무례를 물으신다면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가주.”

“너…… 너 이놈!”

분노로 몸을 떠는 카젠.

쪼개진 아티펙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아티펙트 ‘여리고의 환영’이 사라졌다는 것.

그것은 르마델의 기수이자 하이베른가의 가주 카젠이 재기 불능의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왕국 전역에 알리는 꼴이었다.

귀족 사회의 동요는 물론, 왕국의 권력 지형까지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

저주에 빠진 대공자의 몰골이 소문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었다.

이제 카젠에게 더는 대안이 없었다.

여리고의 환영 없이는 가주로서의 그 어떤 활동도 무의미했으니까.

결국 카젠은 목숨마저 도외시한 오랜 친구의 결단을 외면하지 못했다.

“녀석이 살아나길 빌어라, 유카인.”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참이나 유카인을 노려보던 카젠.

그가 곧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루인이 손에 쥐고 있던 혈류 마나석을 취한 후 유폐지에서 멀어져 갔다.

유카인이 그의 커다란 등 뒤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군.”

분노로 몸을 데운 카젠을 다시 보는 것.

그것은 유카인에게 실로 반가운 전율이었다.

*   *   *

어두운 유폐지 내부.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루인의 정수리 부근에서 희미한 자줏빛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스스스스-

자줏빛 기운은 이내 핏빛으로 물들며 놀랍게도 어떤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검붉은 피로 얼룩진 그 존재는, 지독히 잔혹하고 섬뜩한, 도저히 이 세계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기괴한 표정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이……!>

지금까지 그 어떤 베른 놈도 스스로 제 심장을 갈라 혈류 마나석을 도려내는 미친 짓을 벌인 적은 없었다.

두고두고 만끽할 탐식의 즐거움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것이었다.

곧장 다른 베른 놈으로 숙주를 옮길 수도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마신(魔神)이라 불린다지만 ‘존재들의 맹약’마저 무시할 순 없었으니까.

자신이 빠져나가자 급속도로 죽어 가고 있는 숙주.

<어쩔 수 없군.>

아쉽지만 여기까지.

어차피 시간은 자신에게 무한하니 맹약에 따라 먼 훗날 다시 강림(降臨)하면 될 터였다.

그런데 그때.

-쟈이로벨.

한없이 냉랭한 울림.

그것은 분명 누워 있는 저 미친놈, 숙주의 영혼으로부터 전해진 의지였다.

<날 안다고?>

놈이 제 심장을 스스로 갈랐을 때보다 지금이 더욱 당혹스러웠다.

마계의 잔혹한 마인들조차도 함부로 말하길 두려워하는 공포의 이름.

다른 존재가 자신의 진명(眞名)을 언급하는 것은 수천 년 만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진명을 알 수가, 아니 알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가해(不可解)다. 어째서 하찮은 인간이 감히 나의 진명을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진명을 알고 있는 것을 떠나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 자체부터가 어리석은 자해였다.

인간의 연약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전율적인 공포.

허나 저 미친 숙주는 단지 이름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자아가 붕괴되어야 정상이거늘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병신.

순간 쟈이로벨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의 언어 체계를 의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지식을 확인해 봐도 놈이 구사한 언어는 병들어 축 늘어진 몸을 모욕하는 단어, 즉 인간의 욕설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마신.

같잖은 인간의 도발 따위에 평정심을 잃을 정도라면 마신이라 불리지도 않았다.

<미친놈. 이 강대한 기운을 보고도 병든 몸이라고 비웃는 것이냐.>

-어. ‘므드라’한테 쫄아서 평생 도망만 다니는 새끼.

<뭐, 뭐라고!>

대마신 므드라.

마계에서의 위계는 자신과 같은 반열의 마신(魔神)이었으나 그에게는 진명의 맨 앞에 대(大)라는 서술이 하나 더 붙는다.

<감히! 한낱 필멸자 따위가 본 마신을 능멸하는 것이냐!>

-하하! 반대로 묻지. 그 옛날 그런 필멸자 따위에게 본인의 강림신(降臨身)을 잃은 놈이 누구?

<헛!>

-고작 그런 일에 꽁해 가지고 쥐새끼마냥 그 가문에 숨어들고는 수천 년 동안 후손들의 생명력을 쪽쪽 빨며 복수해 온 네놈이 뭔 마신? 그냥 마졸…… 아니 그것도 과하지. 역시 마물(魔物)이 입에 착 감겨.

<크아아아아!>

저주받은 핏빛 기운이 거세게 일어나 유폐지를 온통 휘감는다.

그러나 루인.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쟈이로벨을 한껏 비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난 이만 죽어야 해서. 잘 놀다가 갑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하던 마계의 절대자 쟈이로벨은 그렇게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대마신 므드라에 의해 자신의 진마체(眞魔體)가 뜯겨 나갔을 때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놈! 감히 죽게 내버려 둘 성싶으냐!>

인간의 생명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권능, 마신의 순수한 진마력(眞魔力)이 루인의 육체를 휘감았다.

아무리 피조물이라 하나 인간의 생명을 되살리는 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일.

쟈이로벨은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는 한계치까지 진마력을 동원하고 나서야 손상된 루인의 육체를 겨우 복구시킬 수 있었다.

<억겁의 고통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살아 숨 쉬는 것을 세세토록 후회하게 되리라!>

서서히 눈을 뜨는 루인.

마치 오랫동안 반복한 일인 양 너무나도 태연한 그 표정과 몸짓에 쟈이로벨은 뭔가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본 마신의 다짐이 네놈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피식.

루인의 입가에 맴돌고 있는 것은 조소라기보단 반가움이었다.

처음엔 서로를 향한 적의(敵意)였으며 복수였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신을 위해 사멸해 간 영혼의 동반자.

<가, 갑자기 왜 우는 것이냐?>

환한 웃음 뒤에 이어진.

한없이 음울한 눈물.

천천히 몸을 일으킨 루인이, 핏빛으로 너울거리고 있는 쟈이로벨의 강림체와 마주 섰다.

“뭐 하고 있어? 이 세계에서 진마력을 그만큼 썼으니 이목을 끌 만큼 끌었을 텐데.”

<무슨 소리냐!>

“안 들어와? 숙주의 영혼 말고 네놈이 지금 숨을 곳이 어딨어? 존재들의 맹약이 안 무서운가 봐?”

아예 할 말을 잃어버린 쟈이로벨.

루인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지만 꼭 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와락!

너울거리는 핏빛으로 지은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반갑다 마물. 정말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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