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거울 속의 자신은 의외로 담담했다.
힘없는 눈동자.
뼛속까지 보일 듯한 창백한 피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이면서 동시에 치욕을 상징하는, 몸서리치게 저주했던 그 옛날 그대로의 얼굴이었다.
힘겹게 뻗어 보는 앙상한 팔.
내부를 휘몰아치던 막강한 마나의 와류(渦流)는커녕 기초적인 근력조차 희미하다.
“…….”
마침내 해냈다는 성취감이 온 마음에 열꽃처럼 피어오를 만도 하건만.
잔혹했던 동료들의 죽음이, 그 아비규환의 절규가, 아직도 검붉은 피처럼 온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거울 속의 자신이 어느덧 입매를 비틀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표정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이내 그는 기다란 앞머리를 헝클어 자신의 메마른 웃음을 지워 냈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후…….”
쓰린 마음을 삼키던 그가 곧 비척거리며 걸음걸음 나아갔다.
바로 저 문만 열면…….
그곳에.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이.
쓰러지듯 위태롭게 손잡이에 매달린 그가 마침내 문을 열었다.
덜컥-
루인 사드하 월켄 드 베른.
평화로웠지만 폭풍전야 같은 그 옛날 과거로…….
그가 돌아왔다.
* * *
여타의 국가들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르마델 왕국은 기수(旗手)를 여러 명 두지 않는다.
왕국의 금린사자기를 어깨에 메고 전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광.
그것은 오직 왕국 내 최고의 기사에게만 허락된 영예이며 그 전통이란 천 년 이상 불변했다.
하이(High).
긴긴 세월, 그런 엄청난 영예를 열 번 이상 거머쥔 가문에게만 허락된 칭호.
베른가(家)는 자타가 공인하는 르마델 왕국 최고의 기사 가문 중 하나이자 검호들의 신성(神性)이었다.
하이베른.
눈부신 기사의 명예, 그런 유구한 영광의 그늘 아래 살아가는 이들.
종복들조차 자부심으로 가득한, 그 고고한 성소의 중심에서 한 소년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척- 척-
단지 걷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비를 쏟아 내고 있는 소년.
위대한 하이베른가의 장자였으나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이름뿐인 대공자.
가문의 모두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이자 나약함의 상징.
이른바 하이베른가의 치욕.
이미 오래전 유폐당한, 모두의 기억 속에 사라져 간 그가 종복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대공자님!”
참지 못한 집사 아길레가 흐트러지는 몸가짐도 불사하고 루인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절도 있는 예법으로 하이베른가의 혈족들을 보좌하는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지만 명령을 어기고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을 활보하는 것은 가문의 율법을 무시하는 행동.
“헉헉…… 아길레…….”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루인.
이내 그의 힘없는 동공에서 희뿌연 습막이 차오른다.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아길레의 눈가, 특유의 살가운 그 얼굴이 자신의 회귀(回歸)를 실감케 했다.
그렇게 루인의 두 눈에 음울한 감정이 서리기 시작하자 아길레는 황급히 그를 몸으로 가렸다.
“대공자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나약한 이름이나 엄연히 하이베른가의 존귀한 핏줄.
그는 이 많은 종복들이 보는 앞에서 결코 눈물을 보여선 안 될 사람.
“아버지…… 나는 지금…… 아버지께 가야 한다.”
“대공자님!”
상상만으로 두렵다는 듯 온몸을 벌벌 떠는 아길레.
유폐지를 벗어나 가문을 활보한 것만으로도 어떤 잔혹한 형벌이 기다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주는 그야말로 철혈.
혈족이라고 해도 가율을 어긴 자를 결코 용서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 안 됩니다 대공자님!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은 루인의 건조한 웃음.
비틀리고 메마른, 소름이 돋을 만큼 삭막한 그의 조소에 순간적으로 아길레가 주춤 물러났다.
“대, 대공자님?”
또다시 흘러나오는 무심한 음성.
“죽음이라.”
셀 수 없는 동료들의 죽음을 타고 넘으며 스스로도 수백 번을 죽어 가며 지금 이 순간 과거로 올 수 있었다.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웠던 자신.
무너질 것만 같은 자아를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긍지였기에, 함부로 죽음을 말하는 아길레에게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모멸에 가까운 심정.
“형벌 따위를 죽음에 비유하지 마라. 아길레.”
하지만 아길레가 자신이 지나온 지옥을 알 턱이 없다.
문득 시선을 옮겨 정원의 끝을 바라보는 루인.
‘형벌이라…….’
순간 루인의 표정에서 말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이 떠올랐다.
고작 이 비루한 몸뚱이를 견뎌 온 삶 정도로는 아버지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었다.
다만 두려울 뿐.
비참한 결말을 모두 봐 버린, 이 황무지 같은 마음을 들켜 버릴까 다만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던 루인이 아길레의 손길을 뿌리치며 다시 걸음을 옮기자.
소식을 들은 하이베른의 혈족들이 하나둘 정원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말? 저게 루인 형이야?”
하이베른가의 막내 위폰이 경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시푸른 눈, 화려한 금장 드레스의 소녀 데아슈가 대답했다.
“응. 여전히 볼썽사납지만 그가 맞네. 저게 대공자, 우리 오빠야.”
자신의 오빠를 입에 담고 있었으나 전혀 상관없는 타인처럼 대하는 어투.
더러운 오물이라도 본 듯, 경멸에 가까운 눈빛을 하고 있던 그녀는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랜만에 본 자신의 오빠는 더 이상 사람의 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기 때문.
시종들의 도움 없이는 홀로 식사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버린 대공자.
차라리 같은 혈족이기를 거부하고 싶은 심정.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 저주받은 병이 옮을까 데아슈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 있지……?”
처음으로 마주한 큰 형에 대한 반가움보다 어떻게 인간이 저런 몸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더욱 궁금한 위폰.
“그러게. 이제 그만…… 정말 그만해도 될 텐데.”
위폰은 마치 그의 죽음을 종용한 듯한 데아슈의 묘한 어조가 거슬렸는지 미간을 오므렸다.
“그래도 우리 가문의 대공자잖아.”
한숨을 쉬는 데아슈.
“휴우…… 바로 그게 문제야. 아버지가 왜 큰오빠를 유폐시켰겠어?”
“많이 아프니까?”
“바보. 저런 몰골을 하고 있는 우리 대공자를 렌시아 놈들이 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
“뭐?”
하이렌시아가(家).
하이베른가와 나란한 그 이름.
어린 나이에도 위폰의 두 눈에서 강렬한 투기가 피어오른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이제 알겠어?”
“…….”
루인의 비루한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 귀족 사회에 끼칠 파장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긍지 높은 하이베른가의 혈족이라면 결코 그런 끔찍한 일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였다면…… 벌써 가문의 명예를 지켰을 거야.”
그제야 위폰은 큰형을 향한 누나의 혐오를 이해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하이베른을 기사라 부를 수는 없는 법.
가문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겁쟁이.
어느덧 위폰 역시 데아슈와 똑같은 경멸의 눈이 되어 루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더없이 비루했다.
명예를 지키지 못한 자의 위태로운 발걸음이.
그럼에도 루인은 그 모든 오욕을 안고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도착한 가주실.
호위 기사 네하릴이 절도 있게 검을 치켜들었다.
“하이베른가에 경의를. 대공자를 뵙습니다.”
“가주님을 만나겠다.”
“죄송합니다.”
척.
롱 소드를 사선으로 내리며 루인을 막아서는 네하릴.
가문의 대공자이나 유폐된 신분이었기에 지엄한 가율을 대리하는 호위 기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루인이 그의 예리한 칼끝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을 때.
<들이라.>
너무나도 그리웠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러나 반가움보다 앞선 감정은 서글픔, 그리고 지독한 원망.
포효하는 사자가 양각된 가주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자.
끼이이익-
저 멀리, 그가 보였다.
카젠 사홀 몽델리아 진 베른.
엄청난 미들네임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왕국에 남긴 업적이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
사자의 갈기털로 치장된 저 커다란 가주좌가 작아 보이는 착시를 일으킬 만큼 가히 산과 같은 체구를 지닌 거인.
펜촉을 늘어뜨린 채 무심히 루인을 바라보던 그가 여느 때보다 무료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가율(家律)이 우스웠단 말이더냐.”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아버지 앞에 마주 선 루인이 웃고 있다.
자신을 속이려는 저 냉엄한 얼굴.
사실은 온 마음에 사랑을 안고 있으면서.
유치하게.
정말 바보같이.
저미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으며 더욱 활짝 웃어 보이는 루인.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왕국의 위대한 사자가.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신의 아버지가.
저렇게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 준 채 버티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텅 비어 버린 자신의 기량이 들킬까.
억척스럽게 아티펙트로 감추고 있는 저 미련한 아버지는.
여전히 미웠고, 또 사무쳤으며.
“왜 그랬어. 아버지.”
푹-
예전처럼 정겹게 아버지를 부르다, 준비한 단도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갈라 버린 루인.
“무슨 짓이냐!”
역시.
끝까지 숨기지도 못할 거면서.
“이놈이! 이놈이―!”
가주좌 밑에 숨겨 놓은 아티펙트의 영향을 벗어난 아버지는 역시 가빠진 숨과 창백한 얼굴.
루인은 저 미련한 아버지의 전부를 앗아 간 혈류 마나석을 그렇게 자신의 가슴 속에서 모두 도려냈다.
“끄으으윽…….”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으나 아버지가 보고 있었기에 루인은 얼굴을 찡그릴 수 없었다.
풍화된 석상처럼 굳어 버린 카젠.
상상해 보지 못한 현실, 갑작스레 벌어진 참극 앞에서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카젠이 아들의 가슴을 빠져나오려는 혈류 마나석을 서둘러 집어넣으려고 하자.
“하지 마. 아버지.”
“이, 이놈!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느냐! 놔라! 이것 놔!”
그 참혹한 저주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이상, 이 혈류 마나석 없이 루인은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다.
혈류 마나석으로 막고 있음에도 저렇게 처참히 생명력을 흡수당해 말라 가고 있는 마당.
그러나 이미 혈류 마나석의 연결 매개, 요정의 날개로 만든 가느다란 실들이 가닥가닥 끊어져 있었다.
매개가 끊어졌으니 더 이상 혈류 마나석은 루인의 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남은 건 얼마 없지만 다시 취해요. 그래야…….”
다시 아버지를 잃을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에 성공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
“무슨 소릴! 네 저주는 어쩌란 말이냐! 나는! 나는……!”
씨익.
‘저주가 아닙니다. 아버지.’
오히려 자신을 대마도사로 만든 대륙의 전설적인 마물(魔物).
“그만! 그만! 말하려 들지 말거라! 집사! 시종장! 아무도 없느냐!”
꺼져 가는 의식.
호들갑을 떠는 아버지가 점차 흐릿해진다.
‘그만 흔들어 아버지. 어차피 난 죽을 수도 없는 몸이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