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349화. 1차 성장 (1)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드넓은 초목의 세상.
자연을 아는 이라면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이 광경에서는.
“세상에…….”
철목왕이라 불리는 김무열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꺄하하!
-히히~.
허공을 노니는 활기찬 정령들은 둘째 치더라도.
이곳을 가득 채운 초목은 그 하나하나가.
‘하나같이 생명력이 엄청나다.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야…….’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SS급 특성인 식물의 지배자.
아니.
이젠 SSS급이 되어버린 특성의 보유자인 김무열의 입장에선.
‘황홀하군.’
그저 이러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는 건만으로도.
형용키 힘든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이렇게 숨을 들이켜고 내뱉기만 할진대.
‘전신이 정화되는 기분이야.’
지난날까지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 노화의 징후까지.
평생 지워지지 않던 그것들이 모조리 씻겨져 나가는 기분 아닌가?
전신에 생명력이 충만해져,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은 아니었다.
당장.
“저쪽이에요.”
길을 안내하는 저 괴물 같은 조카…… 라 할지도.
이 싱그러운 충만함을 전혀 못 느끼는 눈치 아니던가?
김무열은 그런 시문의 뒤를 따르면서.
저도 모르게 치솟는 SSS급 특성 ‘식물의 지배자’를 담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스르륵.
천이 스치듯.
주변의 풀과 꽃들이 김무열의 손끝을 간질인다.
어디 손끝뿐이던가?
티 하나 없이 광택이 나는 구두부터, 양복까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마저, 살갑게 반겨오는 자연에 눈을 감은 채.
그 환대를 한껏 음미하는 김무열.
해서 보지 못했다.
어느 최애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자신을 향해 우르르 휘어져 오는 일대의 자연과.
‘과연…… 내 선택이 옳았어.’
묘한 미소로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문을 말이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일대의 영역과 원 없이 교감하던 김무열은.
“다 왔어요. 숙부.”
들려오는 시문의 말에 눈을 떴다.
그리곤.
“아…….”
또다시 흘러나오는 감탄.
무리도 아니었다.
‘어마어마…… 하군.’
감히 한눈에 다 담을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크기.
제법 장신인 김무열로서도.
감히 그 끝을 올려다볼 수 없는 나무는 그 크기도 크기지만.
샤르릉.
흘리고 있는 기운 역시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척 봐도.
‘이 나무가 이곳의 중심이로군.’
이 불가사의한 세상의 핵심이 되는 존재란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내.
‘음?’
감탄이 흘러나오던 김무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뭔가…….”
말끝을 흐리는 김무열.
그는 목을 거의 직각까지 꺾어가며, 세계수의 꼭대기부터.
가장 아래 뿌리가 드러나는 부분까지.
몇 번을 오가며 세계수의 전신을 훑고는 말했다.
“이상하군.”
“이상해요?”
“이만한 존재라면 이 강대한 생명력이 쉬지 않고 순환되어야 할 텐데…….”
마치 텁텁한 무언가가 목구멍에 들어선 듯.
답답함으로 얼룩지는 김무열.
“멈춰 있다. 꼭 어딘가 막힌 것처럼.”
그의 말에.
“역시…….”
탄성 어린 감탄을 흘린 시문은.
“숙부를 모셔 오길 잘했네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고.
김무열은 그런 시문을 다소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이 나무의 문제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호오? 숙부 입에서 안 된다는 말이 나와요?”
능글맞은 미소로 묻는 시문.
그에.
“말장난 말아라.”
김무열은 단호하게 답했다.
의외로 식물에는 진심인 것일까?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
그는 평소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지금 이 나무의 문제는 지구의 어느 누가 와도 해결이 불가능해.”
심드라실의 상태에 대해 읊었고.
“푸흐! 하하하!”
시문은 고개까지 숙여 가며,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본 김무열의 얼굴은 급속도로 굳어간다.
하나 이는 잠시일 뿐.
“아뇨. 숙부,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요.”
웃음을 갈무리한 시문의 이어지는 말에.
“이 나무의 문제는 지구에서 오직 숙부만이 해결할 수 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냐?”
김무열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
“그렇죠? 에르넨.”
그런 시문의 시선이 옆을 향한다.
마찬가지로 시문의 시선을 따라가던 김무열은.
“흡!”
두 눈을 부릅떴다.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온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어, 어느 틈에!’
1세대의 랭커이자, 현역이기도 한 김무열.
그런 그가 저 에르넨이라는 여성이 다가오는 동안.
‘분명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는데…….’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진즉 목이 날아갔을 터.
화아아아.
김무열의 전신에서 절로 범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온다.
그에 호응하듯.
사박.
일대의 식물들 역시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섰고.
그런 김무열의 경계를 눈치챈 것일까?
“진정하세요. 숙부, 에르넨은 적이 아닙니다.”
시문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런 김무열을 진정시켰다.
당사자인 에르넨 역시도.
“후후, 반가워요. 하이엘프 에르넨이라고 한답니다.”
온화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왔다.
둘이 노력이 먹혀든 것인지.
가득했던 김무열의 경계가 삽시간 줄어든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김무열이라 하오.”
놀라움이 대신한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토록 순수한 자연의 기운이라니…….’
비현실적인 외모만큼이나 맑고 싱그러운 기운.
흡사 뒤편의 저 거대한 나무가 품은 기운을 압축시켜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질 않는가?
물론 그 놀라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이엘프라니. 아레나에서도 소문으로만 듣던 귀한 존재를 직접 뵙게 되는군.”
하이엘프.
1세대의 랭커인 김무열조차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어느 전설 속의 인물 같은 존재이지 않던가?
그런 존재라면 이 낙원과도 같은 곳의 핵심인 저 나무와 비슷한 힘을 지닌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문제는.
“그런데…… 이 녀석과는 관계가 어찌 되는지?”
그런 존재가 왜 시문과 저리도 친해 보이냐는 것이다.
물론 그간 괴물 같은 저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아레나들을 보여준 시문이긴 했으나.
하이엘프는 또 궤가 다른 영역 아니던가?
하지만 이는 김무열만의 생각인 걸까?
“후후, 제 은인이시죠.”
에르넨은 여유로운 미소로 답해왔다.
“은인?”
“네, 둘도 없는 은인이요.”
“하.”
헛웃음을 흘리는 김무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도 감히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실력자 같은데…….’
단순히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한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다.
이는 에르넨이 자신의 힘을 은폐하다 못해, 완벽하게 다스린다는 증거.
당연히 시문보다도 강력할 것이 자명할진대.
저보다 약한 시문이 은인이라니?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답이었으나, 본디 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뿐더러.
작금의 상황에서 그럴 이유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군.”
김무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둘의 사이로.
“자, 그럼 서로 인사도 나누셨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시문이 익숙하게 파고든다.
에르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분 다, 절 따라오시겠어요?”
김무열과 시문을 안내했다.
얼마 가지 않아.
세계수의 거대한 뿌리 아래로 맑은 물가가 보였다.
세계수의 부산물인 세계수의 샘물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여기랍니다.”
세계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뿌리로 이루어진 제단과 같은 무언가가 자리했다.
그곳으로 다가간 에르넨은.
“시문 님, 이곳으로 세계수의 영체를 올려주시겠어요?”
뿌리로 이루어진 제단을 가리켰고.
“그러죠.”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곧장 뿌리 제단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시문의 뒤로.
“세, 세계수라고?!”
다소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나 잠시일 뿐.
“세계수라…… 그래. 그런 거로군.”
이 말도 안 되는 초목의 낙원부터 범상치 않은 나무, 그리고 하이엘프까지.
1세대 랭커답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김무열은.
“넌 세계수의 이…… 정체 상태를 회복시키려는 거로군.”
어느새 녹빛의 작은 세계수 형상을 꺼낸 시문을 바라봤고.
“맞아요.”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그러려면 숙부의 도움이 필요하죠.”
그 말에.
“……너답지 않군.”
김무열이 가라앉은 눈으로 답했다.
“뭐가 말입니까?”
“이렇게 다른 공간에 자리할 정도면, 네겐 이 세계수가 꽤 중요한 존재 같은데…….”
잠시 말끝을 흐리는 김무열.
가라앉던 그의 두 눈은 어느새 서늘함까지 품고.
“내게 이리 쉽게 알려서야 되겠나?”
시문을 노려봤고.
갑작스러운 김무열의 태도에 눈을 깜빡임도 잠시.
“안 될 거 뭐 있나요.”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은 채.
샤르릉.
뿌리 제단에 세계수의 영체를 놓으려 하자.
“왜지?”
김무열의 목소리가 그것을 잡아챈다.
어째서일까?
분명 철목왕 특유의 서늘한 시선일 텐데.
“대체 왜 나를 믿는 거냐.”
왠지 모를 절박함이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너와 내가…… 무슨 관계인지 어찌 알고?”
이유는 잘 모르지만.
김무열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
아마 그를 오랜 세월 알아 온 이가 아니었다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어릴 적부터 알아 온 시문은 미약한 떨림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고.
‘갑자기 왜 저래?’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그간 앙숙이었다 한들.
최근 숙부와의 관계가 예전과 다소 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않은가?
굳이 이 상황에서 그걸 짚을 필요는 없을진대.
“답해라. 김시문, 넌…… 뭘 알고 있는 거지?”
왜 저리 진지해져 있단 말인가?
샤르릉!
맑은 이명이 한층 더 격렬해진다.
세계수의 영체를 내려다보던 시문은.
“갑자기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죠.”
그것을 뿌리 제단에 놓으며 답했다.
“숙부는 절 배신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간의 협력 관계를 떠나서.
종리추 측에서 제작된 특성 향상제 DS.
그것을 복용하고 체내에 용력을 지니고 있는 이상.
‘어차피 내 사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김무열은 결코 시문을 배신할 수 없었으니까.
하나 그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간 것일까.
“넌 대체…… 설마…….”
철거되는 건물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김무열의 얼굴.
그가 답지 않게 입술까지 달싹이며 뭐라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샤르르르!
뿌리 제단과 접촉한 세계수의 영체에서 싱그러운 이명이 터져 나온다.
환한 녹음은 혈관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그것에 시선이 꽂힌 시문은.
“흰소리는 그만하시고. 잘 좀 부탁할게요.”
혼란에 빠진 김무열에게 그리 말하곤.
“아마 에르넨이 잘 이끌어 줄 겁니다.”
곁에 있던 에르넨을 잠시 힐끔했다.
“맡겨주세요.”
온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넨.
그렇게.
“그럼 시작할게요.”
따악.
손가락을 튕겨, 크로노스의 모래알을 연성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화아아아아악!
시문은 녹빛에 집어삼켜졌다.
* * *
쿠르르릉!
시커먼 하늘에 걸맞은 천둥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한데 어째서일까?
단순 먹구름이라기엔 지나치게 어둡고 불길했다.
시문은 단박에 그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기, 그리고 용력이야.’
사기와 용력.
대다수의 생명체에겐 극독이 될 수 있는 기운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으아아!”
“꺄아아악!”
여러 종류의 비명들이 쉬지 않고 터져 나온다.
“어버이를 지켜라!”
“간악한 용족 놈들!”
“귀쟁이들이 제법이구나!”
살기 어린 함성과 전투 소리가 함께 들려왔으나 그뿐.
시문은 그것들에 시선을 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실피드.”
윈터 퀸 올리비아 덴슨.
그녀보다도 차가운 서릿발과 같은 음성과 함께.
‘에, 에르넨?!’
에르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간 봐왔던 온화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전부 갈아버리세요.”
한 번의 손짓으로.
콰자자자작!!
물경 수백 마리의 용족을 한 줌의 살덩이로 갈아버리는 에르넨.
최상급 용족 역시 다수가 존재하고 있음을 떠올려 보면.
정말이지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위로.
“과연, 역대급 하이엘프라 불리는 실력다우시군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운다.
에르넨은 그곳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셀리온.”
차갑게 읊조렸고.
그와 함께.
쿠아아아앙!!
허공으로 화끈한 폭발이 터져 나온다.
어찌나 뜨거웠던지.
그 여파만으로 일대가 열기에 녹아내릴 정도.
하나.
“이런, 매서워라.”
정작 목표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는지.
“자칫 흔적도 없이 타버릴 뻔했군요.”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에르넨은 드디어 허공의 존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곤.
“당신은……!”
무미건조했던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리고 이는.
‘뭐, 뭐야?!’
시문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은인지 금인지 모를 가면을 쓴 인물.
“후후, 이제야 이야기할 마음이 드셨나 보군요. 에르넨.”
루시퍼와 똑 닮은 기운과 분위기를 품은 그는 다름 아닌.
“니드호그가 찾아오기 전에, 긴히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일전의 영원의 원자로에서 보았던 성좌.
‘솔로몬?’
솔로몬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