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318화. 마스터 랭크 데뷔전 (3)
검수지옥(劍樹地獄).
그 음산한 숲 깊은 곳으로.
“음…….”
5미터에 달하는 웬 거구의 존재가 작은 침음을 흘린다.
그의 굵직한 손가락이 제 팔꿈치를 툭툭 칠 때마다.
둥둥.
묵직한 울림이 들려왔다.
이내.
“아직인가?”
거구에 걸맞게.
공기마저 짓누르는 중저음이 흘러나왔고.
“예. 룽트니르 님.”
곁에 있던 같은 크기의 거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확인을 하는 중입니다만…….”
바윗덩이를 펼쳐놓은 듯한 손바닥.
그 큼직한 손위로.
흐으으…….
검붉은 돌멩이가 망자의 신음 같은 이명을 흘리고 있었고.
그것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거구는.
“넷 중 셋은 반응이 없습니다.”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러자.
쾅!
곧바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온다.
놀랄 법도 하건만.
보고를 한 거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머저리 같은 것들!”
이 갑작스러운 폭음의 주범.
룽트니르라 불리는 거인을 바라봤다.
“이래서 저열한 종족들과는 상종해서 안 되는 것이다. 그깟 돌 하나 가져다 놓지 못해선!”
“진정하시지요. 사실 그리 기대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연한 소리! 반쪽짜리가 되다 못해, 퇴화까지 한 버러지들을 내가 왜 기대하겠나?”
“한데 왜 그린스킨을 이용하자고 한 것입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반문에.
“벨야치…… 네놈이 지금 날 책망하는 것이냐?”
화아아아.
룽트니르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온다.
쩌적.
주변 바닥이 금이 가고.
키이이…….
그 악랄한 검수들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물렸다.
하나 이 무시무시한 기세에도.
“오해이십니다. 룽트니르 님.”
벨야치라 불린 거인은 검붉은 돌.
발설지옥석을 수거하며.
“전 단지 진심으로 궁금하여 여쭈어본 것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중한 자세로 슬쩍 고개를 숙였고.
그런 벨야치의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진 것인지.
“……아무리 저열한 종족이라 해도, 명색이 마스터 랭크이니 쓸모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룽트니르는 무시무시하던 기세를 거두곤.
“어차피 그놈들은 우리의 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답했다.
“하긴…….”
그 말에 찬찬히 고개를 까딱이는 벨야치.
“열화되고 퇴화하였어도, 그린스킨에겐 아직 우리의 인자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 잃을 게 없는 도박인 게지. 한데…….”
룽트니르는 말끝을 흐리더니.
까득.
바윗덩이 같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도박의 성립조차 되지 않을 줄이야.”
아무리 거인족의 퇴화종이라지만.
위대한 거인의 피가 섞여 있을진대.
고작 돌 하나 운반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할 줄이야?
“벨야치. 만약 남은 한 놈마저 실패하면 어떻게 되나?”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발설지옥으로 가는 비밀 루트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벨야치의 시선이 옆을 향한다.
고오오오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시커먼 문.
그 중앙엔 작은 홈이.
그래.
딱 벨야치가 쥐고 있는 발설지옥석이 들어갈 만한 홈이 자리하고 있었고.
벨야치는.
“여기서 아무리 난리를 떨어도, 길은 열리지 않을 겁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그에.
“쯧!”
룽트니르의 얼굴에 짙은 짜증이 어린다.
“그럼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냐?”
무리도 아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랜드 마스터에서 이곳까지 내려왔는데……!”
이번 일을 위해 무려 랭크 다운까지 하지 않았나?
그 페널티만 해도 상당히 뼈아팠거늘.
게다가.
“날 데뷔전에 입장시키기 위해, 염제신농께서 여러모로 힘을 쓰신 마당이다.”
현 거인족의 성좌 중 하나로 자리한 염제신농.
그가 직접 손을 쓴 상태 아닌가?
한데 이 임무를 실패한다?
그 뒷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는.
“……아마 문책만으로는 끝나지 않겠지요.”
벨야치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룽트니르 님. 혹여나 마지막 녀석까지 실패한다면. 그땐 제가 직접 제물을 잡아 바치겠습니다.”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고.
“그럼 룽트니르 님만이라도 발설지옥으로 입장해주십시오.”
“……괜찮겠나?”
룽트니르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야 랭크 다운을 했다지만. 여긴 벨야치, 너의 데뷔전이지 않나?”
벨야치는 그랜드 마스터에서 내려온 자신과 달리.
이제 마스터 랭크로 승급한 이 아니던가?
애당초 벨야치는 정당한 데뷔전의 참가자였기에.
염제신농의 힘을 빌려, 룽트니르가 이번 데뷔전에 입장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의 무게는 자신보다, 벨야치에게 더 무거울 터.
하나.
“어차피 이번 임무를 맡은 시점에서 데뷔전은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 성격만큼이나 냉철한 것일까?
“거기다 실패가 문제인 거지. 임무만 제대로 성공하면, 데뷔전도 알아서 정리되지 않습니까?”
벨야치는 차분한 눈으로 말을 이었고.
“그렇기야 하다만…….”
그런 벨야치를 다소 놀란 눈으로 보던 룽트니르는.
흐아아아아!
갑작스레 들려오는 신음 같은 이명에 시선을 내렸다.
벨야치의 손에 들린 발설지옥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이어.
-서, 성공했어! 성공했다고!!
작은 환영과 함께.
발설지옥석 위로 웬 오우거의 모습이 출력되었다.
그는.
-이봐! 보고 있겠지? 너희가 내린 언약은 지켰으니! 약속대로 이 발설지옥석은 내 것이다!
하늘을 보며 환호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고.
“다행히, 모든 그린스킨이 저열한 건 아니었군요.”
이를 본 벨야치의 차분한 입가가 처음으로 슬쩍 곡선을 그렸다.
이내.
“전 약속은 지킵니다. 언약대로 아레나 계약은 정상적으로 만기, 그 발설지옥석은 당신의 것입니다.”
발설지옥석 위로 떠오른 오우거의 환영을 향해 말하는 벨야치.
그의 목소리가 전달된 것일까?
-으하하핫! 좋아! 이걸로 나도 10대 지옥에서만큼은…….
오우거 환영이 대소를 터뜨리는 순간.
스으으.
발설지옥석 때문일까?
-응?
오우거의 환영 주변으로 검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뭐, 뭐야! 이봐! 이건 무슨…….
당황하는 오우거의 환영은.
-끄아아아악!!
검붉은 기운에 휘감겨, 비참한 비명을 내질렀고.
까드득.
콰각!
섬뜩한 파육음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오우거의 비명과 파육음이 모두 가시자.
쿠그그그그.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시커먼 문.
발설지옥의 비밀 입구가 미약한 광채를 머금으며 진동했고.
“당신이 즉사 판정인 제물 의식에서 살아남는다면 말입니다.”
벨야치는 뒤늦은 말과 함께.
달칵.
쥐고 있던 발설지옥석을 문 중앙의 작은 홈에 끼웠다.
그리하여.
“가시지요. 룽트니르 님.”
“그러지.”
두 명의 거인족은.
흐아아아아아!
으어어어…….
고통 어린 망자의 신음이 흘러나오는 검붉은 문으로 향했다.
* * *
휘황찬란한 백금의 빛.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신령하고 고귀함이 절로 느껴졌으나.
“으, 으아아아!”
“끄르륵!”
백금의 빛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180도 달랐다.
독이 잔뜩 오른 독사처럼.
파지직!
휘황찬란한 색과 달리.
전신을 이리저리 꺾으며, 득달같이 날아드는 백금의 벼락 줄기들.
신왕의 무구가 무려 2가지나 섞여들어서일까?
“분명 성물을 바쳤는데 어떻게!”
“궈, 권능 저항력이…….”
“왜 못 막는 겁니까!”
점령지 내부에서 한창 권능전을 펼치던 플레이어들은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물론.
명색의 마스터 랭크.
그것도 나름 한가락 하는 플레이어들이 치르는 데뷔전인 만큼.
“이익! 이봐! 힘을 합치자고!”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냐!”
“전부 다 쏟아부어!”
몇몇 플레이어들은 일시적으로 티밍을 하거나.
“성좌시여!”
“이 유물도 바치겠습니다!”
배후성에게 여러 방향으로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뿐.
[성좌 키르케가 공물을 거부합니다.]
[성좌 시구르드가 급히 내려졌던 권능의 일부를 회수합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지금까지 잘만 후원해오던 성좌들.
그들 중 몇몇이 권능까지 회수해가며, 발을 빼기 시작하면서.
점령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파지직!
한 번 지정한 목표를 놓치지 않은 백금의 뇌전들은 이곳 검수지옥의 검수들처럼.
발악하는 플레이어들을 끝까지 뒤쫓았다.
결국.
“커헉!”
“아, 안돼!!”
“이게 마스터 랭크 맞…….”
하나둘씩 백금의 뇌전에 적중당해, 잿더미로 스러져갔다.
그 가공할만한 광경에.
-진짜 지린다…….
-이 기술은 진짜 볼 때마다 경이롭네.
-이 형 거 중에 안 그런 기술이 있냐? ㅋㅋㅋ
지구의 시청자들은 연신 감탄을 쏟아냈고.
타 차원의 시청자들은 감탄과 더불어.
=미쳤군. 방금 그거, 신화급 무구 같았는데?
=하지만 내가 알던 것과 똑같진 않았다. 저 뇌격도 생전 처음 보는 형태고.
=지난 방송들에서도 몇 번 신화급 무구를 사용하지 않았나?
=그때랑 아예 다르니 하는 소리다.
=유도성 있는 뇌전이라…… 확실히 들어 본 적 없는 무구다.
아르스 마그나로 빚어진 약속된 필중의 뇌격창에 대한 격한 토론을 벌였다.
물론 성좌들에게 채팅창을 맡기고 꺼놓은 시문은 이러한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음…….”
작게 침음을 흘리며, 넋이라도 달래듯.
치이이…….
츠측.
허연 김과 백금의 뇌기가 춤추는 점령지를 내려다보았다.
한순간에 수십 명의 플레이어를 탈락시켰을진대.
좀처럼 미소를 짓지 않는 시문.
이유는 간단했다.
‘10명 정도만 살아남을 줄 알았는데…….’
점령지 내부의 생존자.
약속된 필중의 뇌격창을 내지를 당시.
상위서열 성좌의 후원을 받은, 유달리 눈에 띄던 10명의 플레이어.
고로 약속된 필중의 뇌격창에서 살아남더라도.
딱 그 10명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라 예상했거늘.
‘16명이라…… 생각보다 많이 살아남았네?’
현재 점령지 위에 존재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총 16명.
많아야 10명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반절 이상 더 많은 결과였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뭐, 명색이 마스터 랭크 데뷔전인데. 아르스 마그나를 버틸 만도 하지만…….’
마스터 랭크로 승급한 이들 중에서도.
상위권인 이들이 치르는 것이 데뷔전 아니던가?
더군다나 점령지까지 도달한 이들은 하나같이 성좌의 지원까지 받는 상태.
당연히 신화급 무구를 위대한 진리로 합쳐낸 아르스 마그나라 한들.
어느 정도 저항이야 가능하겠지만.
‘살짝 짜증 나네.’
지금까지 대적자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간 최고로 인정받던 유망주였기 때문일까?
심기가 불편해진 시문은 눈매를 꿈틀했고.
그러한 눈과 별개로.
“마침 잘됐네요.”
시문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16명이나 남아서, 다른 분들의 위엄도 한 번씩 보여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뭐, 뭐야. 이형 갑자기 왜 웃어?
=웃는데 왜 무서운 것이냐?
=동감한다. 묘하게 싸늘하군.
-종족이 달라서 그런가요? 전 멋있기만 한데…….
-ㄴㄴ. 나도 사람인데 뭔가 무서움.
-22 음소거라 다행인 듯.
지구, 타 차원 할 것 없이.
시청자들도 느낄 정도로 분위기가 싸해진 시문이.
“우선. 오벨리스크로 능력치부터 깎고…….”
16인의 생존자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려던 찰나.
움찔.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잠시 후 아이템 ‘발설지옥석’이 사라집니다.]
트롤 플레이어에게서 얻었던 검붉은 지침.
거인족이 건넸다는 발설지옥석이 사라진다는 알림이 떠오른 것이다.
당연히.
‘뭐지?’
시문의 얼굴엔 의문이 어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제한 시간은 한참 남았을 텐데?’
처음 발설지옥석을 얻었던 당시.
제한 시간은 18분대.
그 후로 지금까지 넉넉히 잡아도 5~8분 정도 흘렀을 텐데.
벌써 아이템이 사라진다니?
하나 시스템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그렇군.’
시문은 곧바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거인족이 발설지옥석으로 해야 할 뭔가를 성공한 거야.’
검수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해 주는 발설지옥석.
그 귀한 것을 그토록 혐오하던 그린스킨에게까지 줘가며, 무언가를 꾸미던 일을 성공한 것이다.
고로.
점령전과 거인족의 일.
두 가지 모두를 잡으려는 시문의 입장에선.
‘발설지옥석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그리로 가야 해.’
발설지옥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당장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아르스 마그나도 버틴 것들에다, 점령전이니…….’
아르스 마그나를 버틴 채.
여전히 점령지 위를 밟고 있는 16인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업적 포인트를 마구 털어, 신화급 무구를 난사하기는 아까운 상황.
한데 정작.
‘뭐, 차라리 잘 됐다고 해야 하나?’
시문의 얼굴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언제 이걸 연성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왕들의 픽에 든 성좌들.
좀처럼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던 그들이 오랜만에 한 요청인 만큼.
최대한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여러분.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 좀 문제가 생겨서요.”
상황이 이러니.
“여러분의 전능함은 다음에 보여야겠습니다.”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다행히도.
[성좌 오딘이 ‘괜찮다. 거인족 그 망할 것들 조지는 게 먼저지.’ 어깨를 으쓱입니다.]
[성좌 천마가 ‘어차피 미션을 건 것도 아니니. 부담 갖지 말게.’ 수염을 쓸어내립니다.]
[당신을 주시하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들은 아무 탈 없이 이해해 주었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신…….”
시문은 미소를 머금으며.
“새로운 분을 초대할게요.”
따악.
곧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익숙하게 떠오르는 등가교환창.
시문은 망설임 없이 ‘예’를 택하자.
파츠측!
시문의 손끝으로 강렬한 연성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이내 하얗다 못해.
백금빛을 머금은 그것은 삽시간 하나의 작은 궤짝으로 조형되었고.
시문이 그것을 보며.
“이곳을 지성소(至聖所)로 지정한다.”
나지막이 읊조리자.
아아아~.
알아들을 수 없는 거룩한 찬가와 함께.
[성좌 미카엘이 ‘이거 참…… 오래도 기다렸습니다.’ 미미한 미소를 짓습니다.]
한 성좌의 반응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