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297화. 듀오 (2)
분명 사람의 손으로 빚어진 선일 텐데.
하얀 목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검은 실선은 미세한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래.
마치 한 분야의 장인들처럼.
수많은 행위의 반복으로 단련된 듯 말이다.
고로.
타인들이 보기엔.
이미 끝난 싸움으로 보였다.
아니.
이미 끝난 것을 넘어.
곧 목에서 쏟아질 피 분수에 안색마저 파랗게 질리겠지.
하나.
“호오.”
“어머.”
이 결투극의 관람자 중.
시문과 이유정은 눈을 반짝일 따름이었고.
“세상에!”
그나마 올리비아만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 당장 치료를…… 음?”
물론 그녀의 경악 역시 삽시간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까각.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
그것이 고말숙의 목에서.
정확히는 그녀의 목을 가로지르는 검은 실선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슈아악!
박진욱은 곧바로 단검을 내지르며, 연속 공격을 이어가려 했으나.
“칫.”
짧게 혀를 찬 그는.
타앗.
곧바로 바닥을 박찬 채.
유려한 움직임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곤.
“허 참…….”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는 박진욱.
무리도 아니었다.
“호신강기라니…… 야 말숙아. 너 이제 갓 다이아에 오른 거 아니었냐?”
호신강기.
기의 형상화의 산물인 강기를 이용하는 기술.
특히나 호신강기는 무구에 강기를 집중하는 것과 달리.
방어할 위치에 해당 강기를 둘러야 했기에.
그 난이도는 여타 기의 형상화 기술들보다도 고난도에 속했을뿐더러.
‘그것도 공격 지점만 정확히 막아 냈어.’
저렇게 공격 지점을 정확히 강기로 막아 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SSS급 특성 밤의 가호를 이용한 기습 아니던가?
그런 상황에서 저만한 강기 컨트롤을 보여 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재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박진욱의 눈에 희미한 난색이 깃든다.
‘상성만 놓고 보면 내가 불리한 싸움이라, 최대한 초반에 조져놓으려고 했는데…….’
전투계와 암살계.
예로부터 암살계에게 불리하기로 유명한 매칭.
따라서 기습적인 공격으로 강력한 대미지는 물론.
기세도 어느 정도 꺾어놓고 들어가려는 심산이었거늘.
‘제대로 말아먹었군.’
보기 좋게 날려 먹고.
괜히 상대의 경계만을 돋워 버렸다.
하나 이리 쓰린 속내와 다르게.
“말숙이 너…… 좀 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답하는 박진욱.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헹! 근육 아재야말로. 나 방금 모가지 날아가는 줄 알았다고.”
고말숙이 이러한 박진욱의 심리는 전혀 읽지 못한 채.
“설마 진짜 죽일 셈이었던 건 아니지?”
코를 슥 쓸며 단순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
‘단순한 것. 그래, 이래야 말숙이지.’
조금이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박진욱은.
“음, 반쯤은 진심이긴 했지.”
“뭐? 야이 미친 인간아! 뇌까지 근육으로 됐냐?! 이거 대련이라고!”
“알아, 그리고 네 입으로 전력을 다하랬잖냐.”
“아무리 그래도……! 아 씨! 몰라. 나도 살수 쓴다? 엉?”
“쓰시던가.”
고말숙의 성격을 시원하게 긁어주고는.
“그럼 제대로 간다. 조심해라.”
스으으.
SSS급 특성 밤의 가호.
그것을 몸에 두르며 곧장 은신 상태로 접어드는 박진욱.
그에.
“X.”
짤막하게 욕을 내뱉은 고말숙이 주먹을 움켜쥔다.
그녀는 벽면에 있는 창문을.
정확히는 창문 밖의 보랏빛으로 물드는 저녁노을을 바라봤다.
‘하필 시간도 저 인간이 날뛰기 딱 좋은 시간인데…….’
밤의 가호라는 이름답게.
밤에 가까울수록 그 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특성.
고로 해가 저무는 이 시간대는 박진욱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해는 이제 지기 시작했어.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저 망할 근육 아재는 더 강해지겠지.’
지금은 밤이 아닌 ‘저녁’ 아니던가?
막말로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
가벼운 견제만 날리며 시간만 질질 끌어도.
박진욱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그리고 꽤 오랜 세월 다이아 최상위권을 구가해 온 네임드 암살계.
박진욱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아니나 다를까.
피잇.
날카로운 파공음에 고말숙은 곧장 어깨를 꺾으며, 마기를 휘감은 주먹을 내질렀다.
깡.
짧고 강렬한 금속음이 흘러나온다.
암기였다.
이내.
피핏.
또다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암기들이 날아든다.
노련하게도.
다각도에서 날아드는 암기들은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렸을뿐더러.
정밀한 기계처럼 시간 차를 맞추어 날아들었고.
“이!”
전부 쳐낼 수 없음을 깨달은 고말숙은.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억제(抑制).
쿠웅!
크게 발을 굴러, 천마군림보의 억제력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위협적이던 궤도와 달리.
채챙!
손쉽게 바닥으로 처박히는 암기들.
하지만 고말숙의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당연했다.
‘벌써부터 마기를 털어 내면 안 되는데…….’
천마신공.
신왕급 성좌 천마의 무공인 만큼, 그 무학의 깊이나 위력은 상당했으나.
그만큼 마기를 많이 잡아먹는다는 단점이 있다.
해서 확실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천마신공에 수록된 초식, 보법 등의 기술들은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았거늘.
그간 같은 길드에서 부대끼고 살았다고.
이러한 천마신공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피피핑!
스아악.
박진욱은 얄미울 정도로 암기와 밤의 기운만 날려댈 뿐.
강기의 사용마저 최소로 하며, 은신이 발각될 최소한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에.
“X! 이 망할 근육 아재가!”
기어코 성을 터뜨리는 고말숙.
그녀는 천마신공의 초식은 자제하되.
“당장 안 튀어나와?!”
콰광!
사방으로 마기를 흩뿌리며, 어떻게든 은신 위치에 대한 단서를 얻어내려 애를 썼다.
하나.
피핑!
스아악.
지독할 만큼 기계적인 패턴만 고수하는 박진욱.
이러한 소모전이 길어지면.
결국 수비하는 쪽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고.
“으아아아!”
몸 곳곳에 점차 생채기가 늘어가는 고말숙은.
“거 X발! 대련 진짜 X같이 하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성을 토했으나 그뿐.
-어. 칭찬 고맙다.
돌아오는 건 밤의 기운에 숨겨진 박진욱의 목소리뿐이었다.
그 얄미운 대답에.
“이익!”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전신으로 마기를 끌어올리며, 사방으로 기세를 뻗어내는 고말숙.
하나 거기까지.
‘망할! 말려들면 안 돼.’
들끓는 감정과 달리.
이성을 확실히 붙잡은 그녀는 감각을 최대한 곤두세운 채.
밤하늘처럼 어둑하게 깔린 밤의 기운을 경계했다.
‘시간이 저쪽 편이라 해도, 막 움직이다간 결국 내가 당한다.’
밤사냥꾼 박진욱.
그는 여타 그녀가 상대해오던 다이아들과는 급이 다른 인물이었다.
안 그래도 날고 긴다는 다이아들 중에서도 최상위권.
거기서도 네임벨류가 있는 암살계 아니던가?
지난 여러 번의 친선 대련도 그렇지만.
‘냉정하게 따져서. 스펙이든 경험이든, 모든 면에서 내가 근육 아재보다 밀려.’
박진욱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고말숙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 내가 앞설 수 있는 건 정면 싸움뿐.’
그러니.
‘최대한 맞서서 싸우는 방향으로 가야 해.’
어떻게? 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당장 전투 경험이든, 플레이어로서의 스펙.
혹은 저 빌어먹을 은신의 꿰뚫어 볼 감각까지.
그녀에겐 이것들을 한 방에 타계할 방법이 있었으니까.
단지.
‘진짜 뒈질 정도로 아픈 건 싫은데…….’
그 힘을 얻어낼 방법이 무척이나 고될 뿐.
이내.
“하.”
작게 코웃음을 흘리는 고말숙.
그녀는 저 멀리.
그러나 두 눈에 확실히 들어오는 관중석의 한 남자를 힐끔했다.
‘X발. 그동안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긴 했네. 아픈 게 싫어? 내가 언제부터 몸을 사렸다고.’
저 남자가 그동안 자신에게 주었던 것들이 떠오른다.
수천억대를 호가하는데도 자리가 없어 난리인 경험치 버프부터.
귀한 장비들의 지원과 돈을 줘도 못 구한다는 스탯 증강제까지.
어디 그뿐이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랭커들을 알게 되었고.
다소 불편?한 관계라곤 하나.
정계까지 손을 뻗은 무소불위의 협회장이라는 뒷배까지 있다.
그리고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특히나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알게 모르게 그녀의 스펙이 되어 주었고.
실제로 이를 대놓고 체감하고 있는 고말숙이었다.
‘실버 트롤따리에서 여기까지. 팔자가 좋아지긴 했지.’
일개 플레이어로선 감히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누려왔다.
그랬기에.
‘쥐뿔도 없는데.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마냥 이렇게 받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갓 다이아에 올랐음에도.
시문에게 그렇게 어필하며, 이리 박진욱과도 맞서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X발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사실 마음만 먹으면 거대 길드의 유망주로 남부럽지 않게 성장할 수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박혀 있던 그 모든 것들을 잊고.
이 뭣도 아닌 자존심마저 가져다 버렸다면 말이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이게 어쭙잖은 자존심인지.
아니면 늘 들어오던 멍청한 대가리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빚지곤 절대 못 살아.’
내가 베풀었으면 베풀었지.
이렇게 마냥 받기만 하고 살아갈 수 없었다.
그게.
“나 고말숙이라고!!”
지금까지 고말숙이라는 존재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랬기에.
콰직!
-무, 무슨!
이까짓 몸뚱어리쯤이야.
아니.
이거 하나 있는 몸뚱어리라도 있는 힘껏 굴려야.
-말숙아. 너 미쳤냐! 갑자기 자해는 왜 해!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제 손으로 직접 꿰뚫어버린 가슴에서.
“캬아아아악!!”
고통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치솟았고.
[SSS급 특성 천살성과 깊게 동화됩니다.]
[앞으로 SSS급 특성 천살성의 활성화 조건이 개선됩니다.]
제대로 읽어지지도 않는 메시지와 함께.
화아아아악!
그녀의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 * *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시문.
그만이 아니었다.
“마, 말숙아!”
“저런!”
곁에 있던 이유정과 올리비아 역시 놀란 눈으로 몸을 일으킨다.
단순히 대련 중이던 고말숙이 스스로 제 가슴에 손을 박아넣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이 경악의 도입부는 그녀의 충격적인 자해로 시작되긴 했으나.
작금의 경악은 전혀 다른 이유였다.
“이 기운은 대체…….”
랭커인 이유정마저 솜털이 오소소 돋아날 정도로 강렬한.
아니.
강렬하다는 말로는 차마 전부 표현할 수가 없는 시뻘건 기운.
피를 기체화시킨 듯한 그 붉고도 진득한 기운이 대련장을 가득 메운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파츠츠츠!
일찍이 대련장을 점거하고 있던 시커먼 연무.
밤의 기운을 마치 제 영역을 확보하듯.
연신 씹어 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전생의 기억이 있는 시문은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천살성이 벌써 제대로 활성화되다니…….’
SSS급 특성인 천살성.
동생 김시혁의 SSS급 특성인 천무지체와 맞먹는.
아니.
오히려 공격력 면에선 천무지체조차 압도해 버리는 천살성이 제대로 활성화가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물론.
‘비록 전생의 말숙이처럼 정돈된 느낌은 아니지만…….’
전생의 말숙이는 초월적인 이들의 아우라처럼.
또는 성좌의 후광처럼 은은한 오오라의 형태를 띠었으나.
지금 말숙이의 천살성은 짙은 혈무와 같이.
불규칙하고 무분별하게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시문이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하나.
‘천살성이 제대로 깨어나는 건, 마스터 랭크 이후부터일 텐데…….’
전생의 고말숙을 기준으로.
그녀가 천살성을 ‘제대로’ 다루게 되는 시기가 바로 마스터 랭크였기 때문이다.
한데 갓 다이아 초입에 오른 그녀가 벌써 천살성을 제대로 일깨우다니?
‘역시 말숙이다 이건가.’
그 어떤 지원도 없이 스스로의 몸으로.
특히나 ‘그 일’까지 겪으며, 기댈 곳도 없었던 전생과 달리.
지금껏 다양한 지원을 해 준 결과를 여실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 쭉쭉 더 성장한다면.
‘시혁이나 유정이만큼 성장하겠지.’
지금 대한민국의 쌍두마차를 달리는 랭커.
김시혁과 이유정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거듭날 터.
이를 증명하듯.
“캬아아악!”
화아아아아!
시뻘건 혈무만큼이나 격렬하게 타오르는 마기.
“찾았다! 이 개같은 근육 돼지!”
그것과 천살성의 기운을 전신으로 휘감은 그녀는 순식간에.
“헉! 어, 어떻게!”
밤의 기운을 몰아내고, 그 속에 숨어든 박진욱을 찾아냈고.
“뒈져 버렷!!”
우우웅!!
그 가공할 만한 기운이 순식간에 그녀의 주먹으로 응축되는 순간.
시문과 이유정.
“이런!”
“말숙아!”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관중석을 박찼고.
쿠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대련장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