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6화
296화. 듀오 (1)
녹음의 빛이 사방으로 아른거린다.
하나 녹음하면 떠오르는 여느 자연의 싱그러운 그것과 달리.
이곳의 녹음은 독 같은 것들을 연성시키는 듯.
짙고 매캐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 중심.
거대한 산과도 같은 그곳에서.
[꺄아아아악!!]
골이 얼얼할 정도로 강렬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아직도 저 꼴인가.”
이를 보던 검푸른 눈의 남자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대한 산.
아니.
거대한 동체의 존재가 저토록 비명을 질러댄 지.
“어머니, 시간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꼬박 하루가 넘었다.”
벌써 하루가 넘었으니까.
고로.
“하루라…… 그럼 곧 쓰러지겠군요.”
검푸른 눈의 남자가 한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정신을 잃을 터.
아니나 다를까.
[끄…… 끄으으…….]
쉴 새 없이 메아리치던 비명이 사그라든다.
이내.
쿠그그그그그.
거산과 같은 동체가 완전히 바닥으로 쓰러졌고.
“쯧.”
가볍게 혀를 찬 녹회색의 중년 여성은.
“복구.”
쓰러진 거체를 향해 손을 내밀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자.
고오오오오!
가공할 만한 짙은 녹색의 기운이 파장을 그리며, 쓰러진 거체에 스며들었으나.
파츠측!
격렬하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솨아아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반쯤 날아가 버린 거체의 하반신은 회복될 일말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에.
“쯧, 오기 전부터 듣기는 했습니다만…….”
검푸른 눈이 자리한 거친 눈매가 더욱 일그러진다.
“정말 어머니의 힘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한가 보군요.”
그 말에.
“어쩔 수 없지.”
한숨 같은 말을 내뱉는 중년 여성.
“일반적인 부상도 아니고, 신성에 타격을 입지 않았느냐?”
“그래도 어머니의 영역에서라면, 신체 정도는 회복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무려 미카엘의 성화다. 니드호그.”
그녀는 고개를 슬쩍 저으며.
“그 지독한 힘을 정면으로 맞이했으니. 아무리 잉태의 성소라 한들, 쉬이 복구할 순 없음이야.”
녹회색의 눈으로 쓰러진 거체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심지어 미카엘의 성화만 작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예? 그럼 무슨…….”
“넌 느끼지 못하겠지만, 브리트라의 부상엔 또 다른 권능이 자리하고 있다.”
녹색의 기운이 쉼 없이 빨려 들어가는 거체의 절단면이라고 해야겠지.
“미카엘의 힘이 대단하다지만, 나와 성소의 힘을 집중한다면 신체 정도야, 어느 정도 복구가 가능하니라. 하지만…….”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하지만?”
니드호그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되물었으나.
대답은 그녀가 아닌.
-상극. 혹은 멸의 개념에 가까운 권능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뒤편의 묵직한 목소리가 대신했다.
시선을 돌리자.
-특히나 상극인 용살의 권능이라면 더더욱…….
파충류 특유의 기다란 동공.
그것을 지닌 검붉은 눈동자가 떠올라 있었다.
“오셨소.”
“1용제.”
이를 본 에키드나와 니드호그가 가벼운 예를 취한다.
하나 지난번과 달리.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그런 것일까?
-어떻습니까. 어머니.
크루아흐는 여느 때처럼.
1용제로서의 위엄을 내보이지 않았고.
“크루아흐. 너도 보아서 알겠지만, 저 아이는 이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에키드나 역시 2용제가 아닌.
-역시…… 신성의 유실 때문입니까?
“그렇단다.”
어미로서 크루아흐를 맞이했다.
“유실이 커도 너무 커. 절반 이상의 신성을 잃어버렸으니까.”
“향락의 요람으로 내 급히 가 보긴 했으나, 브리트라의 신성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소.”
이어지는 니드호그의 말에.
-그럴 테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는 크루아흐.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알아차렸으니…….
애당초 차원을 넘나드는 제약을 받는 것도 아니고.
브리트라가 자신의 영역으로 직접 행차를 한 상황이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영역에 있는 브리트라가 이리도 무참히 당해, 가까스로 생환해 올 거라 생각했겠는가?
당연히 주인은 물론이고.
어디 잠시 깃들어 있을 매개체도 없는 그녀의 신성은.
-용살의 권능이 깃든 미카엘의 성화에 모조리 타버렸겠지.
아무리 상위서열 성좌의 신성이라 한들.
상극의 힘을 담은 천사장의 성화 앞에선 꼼짝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브리트라를 바라보던 크루아흐의 시선이 녹회색의 중년 여성.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머니.
에키드나를 향한다.
-분명 용살의 권능을 지닌 신물들은 오래전, 조약으로 모두 봉인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한데 저건 무엇이란 말입니까?
브리트라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는 크루아흐.
“나도 무척이나 당황스럽구나. 보아하니 아스칼론 같은데, 저건 7마제의 몰락 이후 분명…….”
-그뿐만이 아닙니다.
에키드나의 말을 잘라내는 크루아흐.
-제 전령에게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람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의외의 내용이었는지.
“그, 그람도?”
“그게 정말이오?”
에키드나는 물론.
니드호그까지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물었고.
크루아흐는 말없이 두 용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1용제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믿기 힘들군.”
무언가 아는 것이 있는 건지.
“시구르드가 그람을 사용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니드호그의 얼굴은 조금 더 어두워졌고.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크루아흐가 말했다.
-그 일은 데피나에게 일러두었으니, 니드호그. 넌 검은 제련소의 재건을 서둘러라.
“알겠소.”
-그리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브리트라를 회복시키십시오. 필요한 건 모두 허하겠습니다.
묵묵하게 말을 내뱉는 크루아흐.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서늘한 뜻을 알아차린 에키드나는 짐짓 망설이듯.
“어떻게든…… 말이냐.”
내키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고.
그런 어미의 망설임을 간파한 크루아흐는.
-이번 일로 거인족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아직은 놈들이 필요하니. 어떤 식으로든 브리트라의 건재함을 대외적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녀의 망설임을 단호하게 끊어내었다.
크루아흐의 뜻을 읽은 에키드나는.
“알겠구나. 그리하겠다.”
애써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달래듯.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어머니. 어차피 저 자리에 앉을 이는 많지 않습니까?
자연스레 이어지는 아들의 말에 몸을 흠칫했다.
다행히도.
스륵.
저 말을 끝으로 크루아흐의 눈동자는 사라진 상태.
그렇게 아들의 눈동자가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던 에키드나는.
“니드호그, 네가 이 어밀 좀 도와야겠구나.”
“……예, 어머니.”
그녀와 비슷한 얼굴의 니드호그와 함께.
“1용제가 명했으니, 용제의 보고를 열어야겠다. 적합도와 상관없이, 모아둔 신성들을…….”
걸음을 옮겼다.
* * *
조건 협력.
본격적으로 목숨을 거는 정규 아레나여서인지.
아니면 그 실패의 여파가 범상치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정규 아레나의 등장 이후.
저랭크보다 오히려 다이아 랭크대 이후로 꽤나 자주 등장하는 아레나 조건이었다.
하나 비정규 아레나 시절 때부터 그랬듯이.
아레나에 입장 전부터, 이렇게 조건을 강제하던 적은 거의 없었기에.
‘마스터 랭크 승급전인 것도 그렇고, 이번 아레나 난이도가 상당한가 본데?’
전생의 기억을 지닌 시문으로선.
이번 승급전의 난이도가 상당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었다.
물론 2인 협력 조건도 강제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혼자 클리어할 자신이 있는 시문이었기에.
뛰어난 무력의 소유자보단.
등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믿을 만한 이를 물색했고.
다행히도 이러한 조건을 부합하는 이가 2명 있었다.
같은 다이아 랭크이자, 심드라실 길드의 간부.
동시에 전생의 기억에서도 믿을 만한 인물이었던, 밤사냥꾼 박진욱과 윈터퀸 올리비아 덴슨이었다.
아.
하나 더 추가.
“나! 나! 나! 나아!!”
세계 3대 미친년 중 하나였던.
“나도 이번에 다이아 찍었어! 데뷔전까지 싹 끝내놨다고!”
천마 고말숙까지.
천마신공의 경지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SSS급 특성인 천살성 때문일까?
“밤사냥꾼이니 원터퀸이니. 이름이 너무 높잖아! 너 같이 성질 더러운 놈이 막 대하기엔, 내가 딱이라고!”
화아아.
그녀는 흉흉한 기운을 펄펄 흘리며, 눈을 번뜩였고.
“말숙아, 뭔가 말이 잘못된 거 같은데.”
그런 그녀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시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너 같이’ 성질 더러운이 아니라, ‘나 같이’ 성질 더러운이겠지.”
흥분한 말숙이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당연히.
“그래! 나 같이 성질 더러운…… 아니! 이 새끼가 또!”
그녀의 흉흉했던 기세가 살기로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나.
딱 거기까지.
당장이라도 내지를 듯.
주먹을 불끈 쥔 그녀는 핏줄까지 선 주먹과 맞지 않게.
“……어쨌건.”
몸을 슬쩍 떨며, 씹어 삼키듯.
“잡일이든 뭐든, 뒤처리해 주는 데 나만 한 애가 어디 있냐? 저 두 사람은 이름값이 있잖아.”
말을 내뱉었고.
이글거리는 그녀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문은.
‘뭐,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긴 한데…….’
의외로 일리 있는 고말숙의 말에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뒤편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고말숙이 나타나기 전.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던 박진욱과 올리비아였다.
그중.
“딱히 네임벨류에 대한 자부심은 없습니다만.”
각진 안경을 슬쩍 치켜올리는 올리비아는.
“아직 인계받은 길드 업무에 부족한 부분이 많아, 승급전 듀오는 힘들 것 같습니다. 거기다…….”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같은 계통…… 뭐, 네. 사전적으론 같은 마법계이기도 하니. 저와의 듀오는 비효율적이라 생각되는군요.”
조금은 허탈한 미소로 부정을 표했다.
하지만.
“시문 님, 저도 이름값인지 뭔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곁에 있던 박진욱의 뜻은 달랐다.
“저 박진욱. 시문 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발닦개도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전쟁에 나가는 군인처럼.
엄숙하고도 진중한 눈으로 답하는 박진욱.
그에.
“나, 나도 발닦개가 될 수 있어! 아니! 때수건으로 써도, 찍소리도 안 해!”
대번에 고말숙의 반박이 날아들었고.
너무나 어처구니도 없는 발언에.
“말숙아, 갑자기 무슨…….”
시문의 말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그럼 전 때수건을 넘어서! 1회용 물티슈도 될 수 있습니다!”
고말숙보다 더한 박진욱의 발언이 튀어나왔고.
“이 X발! 그럼 난!”
그보다 더한 고말숙의 반박이 이어지려는 순간.
“그만.”
이젠 유치함을 넘어.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멈춰 세운 시문은.
“이게 뭐라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이렇게 하죠.”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 * *
랭커팰리스의 대련장.
검성 김시혁과 성녀 이유정을 대상으로 건축된 이곳은 그 목적과 달리.
앞서 여러 차례 제3의 인물로 인해 박살 난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범인.
“다시 말하지만, 위험하면 바로 손을 쓸 겁니다.”
시문은 대련장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남녀.
“그리고 공평하게 실력으로 해결하는 거니까, 둘 다 뒷말은 하지 말고요.”
박진욱과 고말숙을 바라봤고.
“예.”
“엉.”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확인하곤.
관중석으로 몸을 물렸다.
“후, 그냥 아레나로 대련하면 될 텐데. 왜 이리들 현실 대련에 목을 매는지…….”
짧게 한숨을 내쉬는 시문.
그런 그의 귓가로.
“그러면 관전하는 사람은 현실감을 못 느끼잖아요.”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철벽의 성녀 이유정이었다.
“두 사람 다, 오라버니에게 현실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거죠. 그리고 너무 걱정 마세요.”
그녀는 특유의 청아한 미소를 지으며.
“저도 얼마 전에 마스터 랭크로 승급했거든요. 스펙도 많이 올라서, 어지간한 부상은 다 커버할 수 있어요.”
조곤조곤 말을 이었고.
“그래서 더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 내 줘서 고맙다. 유정아.”
시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를 표했다.
이미 비정규 아레나부터 동생 김시혁과 쌍두마차를 달리던 유정이다.
물론 전생에서야 ‘그 사건’으로 인해, 하이랭커가 되는 모습까진 보지 못했으나.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동생 시혁이와 함께 그랜드 마스터 랭크까지 손쉽게 뚫어 낸 실력자였다.
당연히.
“후후, 아니에요.”
그때까지도 성녀라는 별명을 유지했던 그녀의 회복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터.
“저도 최근 아레나만 뛴 터라, 마침 현실에서는 신성 마법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하던 참이거든요.”
혹여나 시문이 부담을 느낄까.
부드럽게 말해오는 이유정의 배려를 느낀 시문은.
“고맙다.”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대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름 심판의 위치로 앉아 있긴 하나.
따로 신호를 줄 필요는 없었다.
이미.
“어이, 근육 아재. 서로 피 볼 거 없이, 깔끔하게 포기하지 그래?”
한껏 불이 붙은 고말숙과 박진욱은 이미 결투를 시작한 상태였으니까.
“말숙아,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손에 쥔 단검을 빙글 돌리며.
“너 이제 갓 다이아에 오른 거다?”
턱을 까딱이는 박진욱.
이내.
스륵.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지는 박진욱.
그러곤.
“난 다이아 최상위권이고.”
고말숙의 귓가로 파고드는 속삭임과 함께.
서걱.
고말숙의 하얀 목에 검은 실선이 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