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291화. 갈무리 (1)
백금색.
보기만 해도 찬란하고도 거룩한 그것이 시야를 꽉 채운다.
하나 마냥 찬란하고 거룩하다고만 느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는 빛을 방자한.
화라라라라락!!
명백한 화염이었으니까.
열기가 어찌나 강력했던 것인지.
주르륵.
시문의 볼을 타고 목 아래까지.
액체가 여러 줄기로 흘러내린다.
하지만 땀은 아니었다.
미카엘의 배려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말한 ‘정화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인지 몰라도.
애당초 세상을 불사르는 이 백금의 불길 속에서.
시문은 어떤 열기나 뜨거움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타른헬름’이 본 주인 성좌 알베리히에게 역소환됩니다.]
일련의 메시지가 액체가 흐르는 원인을 알려온다.
성좌 알베리히에게 대여받았던 신화급 무구 타른헬름이었다.
‘일시적인 대여라고 하지만, 신화급 무구가 녹아 내릴 정도의 위력이라니…….’
녹아 내린 젤리처럼.
줄줄 흐르는 타른헬름의 흔적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던 시문.
그런 시문의 앞으로.
[성좌 알베리히가 ‘하필 미카엘을…… 대여로 끝나길 다행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성좌 알베리히의 반응이 떠오른다.
‘이렇게 녹긴 했어도, 다행히 타른헬름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보네.’
이를 본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고.
그런 그의 귓가로.
[끼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파고들었다.
시문은 이 백금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검분홍색을 유지하는 거대한 존재를 바라봤다.
[그만! 그마아안!!]
천지를 뒤흔들 정도의 강렬한 외침.
하나 상위서열의 진신쯤 되면.
이는 단순한 외침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일까?
키이이잉!
브리트라가 지닌 특유의 검분홍색 용력이 오오라처럼.
그녀의 전신에서 뻗어 나왔고.
화락!
지금껏 그녀를 유린하던 백금의 불길이, 뻗어 나오는 용력에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정을 되찾은 것일까?
검게 타고 녹아 내린 브리트라의 육신이 삽시간 복구된다.
그녀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볼을 쩍 벌린 채.
[미카엘! 정말 끝을 보자는 거냐?!]
범인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 버릴 정도로.
[너희 천계는 아직 7마제의 여파를 다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강렬한 안광으로 미카엘을 노려보았다.
하나.
“시끄럽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일축한 미카엘이 다시 한번 브리트라를 가리켰고.
그녀의 용력에 밀려났던 백금의 불길은 기름을 더한 듯.
화라라락!
한층 더 세차게 타오르며, 브리트라의 거체를 압박해갔다.
[꺄아아악!]
또다시 터져 나오는 브리트라의 비명.
하지만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입과 달리.
미카엘을 쏘아보는 검분홍빛의 안광은 한층 더 흉흉했다.
비록 이렇게 전신이 불타고 있다곤 하나.
‘앞으로 많아야 한 번…….’
과거.
수많은 전투부터 7마제의 사건까지.
보고, 듣고, 때론 겪기까지 해왔던 미카엘의 성화는 브리트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 악명 높았던 위력에 비하자면야.
‘앞으로 한 번만 더 넘기면…….’
작금의 성화는 사실상, 어린아이의 불장난 같은 수준.
그리고 이런 위력의 원인은 다름 아닌 인과의 양.
즉 화력에 필요한 ‘연료의 부족’일 터.
당연했다.
애당초 신왕급 성좌인 미카엘의 진짜 성화를 접했다면.
그녀는 진즉 신성에 강대한 타격을 입고.
앞서 잿가루가 되어버린 케찰코아틀처럼.
간신히 성좌를 면하고 있는 비루한 존재가 되었을 테니까.
고로.
‘미카엘에게 부여된 인과의 양은 곧 끝이 난다.’
일찍이 미카엘의 강림 때부터.
예측했었던 인과에 대한 질과 양의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뜻이 되고.
이는 곧.
‘이렇게 최대한 방어에 전념하다가…… 놈에게 부여된 인과가 끝나는 순간!’
기회는 그녀를 반드시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그럼 나 브리트라가…… 최초로 천계의 신왕을 쓰러뜨린 존재가 되는 거야.’
신왕을 잡아내고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은 가히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을 터.
물론 일시적인 강림에 온전한 미카엘의 진신과 맞붙지는 않았다지만.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결과니까.’
그렇게 이를 갈고.
진신을 갉아먹으며, 끔찍한 작열감을 최대한으로 버텨내는 브리트라.
얼마가 흘렀을까?
화륵.
전신을 불사르던 성화의 일렁임이 한층 잦아든다.
그에.
‘지금이다!’
검분홍빛 안광을 번뜩인 브리트라는.
[캬하아악!]
짐승 같은 울음을 토하며, 참고 있던 모든 기운을 해방시켰다.
파아아아아!
검분홍빛의 기세가 삽시간 그 권세를 키워나간다.
손쉽게 밀려나는 백금의 성화는 그녀의 예상대로.
피시이이…….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는 불꽃처럼.
힘없이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역시!’
서서히 옅어지는 백금색의 불길에 환희를 짓는 브리트라.
이내.
그녀의 입과 커다란 두 개의 뱀 머리칼.
그리고 거대한 두 팔이 둥근 원을 그린다.
그 중심으로.
스으으으으읍.
깊은숨을 들이마시듯.
검분홍빛의 용력을 포함한, 일대의 모든 것들이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었다.
[멍청한 놈! 내가 몇 번이고 기회를 줬거늘!]
앙칼진 외침을 토하는 브리트라.
[애원해 봐야 이미 늦었어, 넌 내 손에 끝장날 거다! 미카엘!]
그녀는 환희와 탐욕.
그리고 쾌락이 어린 눈으로 성화를 잃은 미카엘을 노려봤다.
[그리하여 나…… 4용제 브리트라가 비상할 것이다.]
자신의 위에 있는 아포피스도.
용계의 대모라 칭송받는 자신의 어머니조차.
어쩌면.
아버지 티아메트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크루아흐조차.
‘모두…… 모두 짓밟아주겠어!’
자신을 우러러보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천계의 신왕 미카엘은 그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니까.
라고.
“정말 혐오스러울 정도로…… 멍청하군요.”
브리트라는 생각했다.
미카엘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말이다.
“제게 부여된 인과의 질은 높되, 그 양이 적다는 것쯤이야. 당연히 당신도 알고 있었겠죠.”
어마어마한 기운이 응축되고 있음에도.
“감히 천계의 자손을 둘을 납치했는데, 이곳의 지배자가 그 내막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미카엘은 정말이지 조금의 동요도.
사실 동요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미안할 정도로.
어떤 감정의 변화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해서 기다렸습니다. 그 오만한 계산에 빠져, 허우적댈 당신을.”
선고를 내리는 기계처럼.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갈 뿐.
그에.
[아하핫! 오만한 건 네놈이겠지! 이제 남아 있는 인과는 거의 없을 텐데. 이게 어디서 허세야!]
브리트라는 앙칼진 목소리로 보란 듯이.
우우우웅!
끌어모으던 힘을 더욱더 강렬하게 응축시켰다.
하나.
정작 이 막대한 기운의 목표인.
“전 잘 알거든요. 당신같이 오만한 이들의 행동 방식을.”
미카엘은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 그와 좀 다르긴 하군요.”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턱을 괴던 그는 고개를 슬쩍 갸웃하더니.
“그는…… 당신처럼 이리 대놓고 자신의 노림수를 보일 만큼, 멍청하진 않았습니다.”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치밀하고, 더 영악하고, 더 악랄했지요. 그래…… 그랬습니다.”
거대한 브리트라의 진신을 눈앞에 두고도.
누군가를 떠올리듯.
“그에 비하면 당신은…….”
저 혼자 읊조리는 미카엘.
그것이 무시로 보였던 것일까?
[천사장이 미친놈이란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눈에 불똥을 튄 브리트라는.
[아주 단단히 정신이 나갔군!]
그 거대한 몸신을 뒤로 죽 내빼더니.
[그냥 죽엇!!]
권능이 담긴 일갈과 함께 숨결을 내질렀고.
그것을 신호로 응축되었던 거대한 원은.
콰아아아아아아!!
그간 모아두었던 모든 것을 쏟아냈다.
하나.
“아, 딱 하나는 그와 똑같겠군요.”
여전히 영문 모를 소리를 읊조리는 미카엘.
그나마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오른손이 어느새 자신을 내리쬐는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
이내.
화륵.
작은 불씨 하나가 그의 손아귀로 떨어진다.
그것을 움켜쥐자.
화라라락!
순식간에 한 자루의 검으로 조형되는 불씨.
그의 날개만큼이나 거대한 검이었으나.
미카엘은 어떤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둘 다 결국 저의 징벌을 맞이한다는 것 말입니다.”
스릉.
아주 편하고 부드럽게.
쏘아지는 브리트라의 브레스를 향해, 그것을 휘둘렀고.
[아, 아스칼론?! 그게 왜 네 손에!!]
이를 확인한 브리트라의 경악을 마지막으로.
“참회하시길.”
서걱!
모든 것이 반으로 갈라졌다.
* * *
[말…… 도…….]
충격과 경악.
[아스칼…… 분명…… 소멸했…….]
죽음의 기운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까지.
스륵.
쏘아지던 검분홍색의 브레스도.
거대했던 브리트라의 진신도.
그리고 온갖 향락과 타락으로 가득했던 세상도.
미카엘이 베어 낸 방향 그대로 두 동강이 났고.
무언가가 새어 나간다는 듯.
[안…… 내 신성……!]
유일하게 움직이는 두 팔과 두 개의 머리칼로.
절단된 제 상반신을 감싸려는 브리트라.
그것을 끝으로.
화라라라라라락!!
모든 것이 백색의 불길에 잠겼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시문 역시 진즉 역소환을 시작한 상태.
그렇게.
소환의 빛에 휘감기는 시문의 오른팔이 갑자기.
두근!
거세게 박동한다.
‘뭐야? 무슨…….’
그에 시문이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스윽.
시문의 오른팔을 저 멀리서 쓰러지는 브리트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내.
치이익!
“크윽!”
뜨거운 불길을 쥔 듯한 열감이 손아귀로 작렬함과 동시에.
“갑자기 어딜 가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요.”
펄럭.
익숙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으음, 성흔에 그 팔이라면…… 뭐, 그리 큰 문제는 없겠지요.”
이어.
“그럼 김시문? 다시 조우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영문 모를 미카엘의 인사를 끝으로.
파앗!
시문의 전신이 소환 빛에 휘감겨 사라졌다.
* * *
[아레나 ‘향락의 요람’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30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25 상승했습니다.]
아레나의 끝을 알리는 메시지들.
그것들이 촬영하던 카메라가 쓰러지듯.
바닥으로 처박힌다.
이유는 간단했다.
“으으!”
역소환 되기 전.
무언가를 움켜쥐었던 오른팔.
그곳에서.
치이이이익!
어마어마한 작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통증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우드득.
본능적으로 드래고노이드를 활성화했음에도.
“크아아악!”
시문은 회귀 후.
난생처음으로 비명이란 것을 질렀다.
그에.
-오, 오빠!!
“아빠!”
뀨우!!
마침 연구실에 있었던 것일까?
현자의 돌을 포함한 시현이와 뀨웅이가 달려온다.
하지만.
“오지 마!!”
오른팔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다가오는 것을 제지하는 시문.
이내.
눈앞에 떠오른 아레나 보상 메시지들을 뚫고.
[‘망가진 은팔’이 노출된 신성을 흡수합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망가진 은팔’이 노출된 신성을 흡수합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
반복되는 메시지들이 소낙비처럼 시문의 시야를 가린다.
안 그래도 전신에 땀이 줄줄 흐르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통증이거늘.
시야까지 어지럽히는 메시지창이라니?
그러나 시문은 짜증 내지 않았다.
단순히 비명 말곤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이 지독한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하였으나.
‘자격…….’
눈앞을 어지럽히는 시스템의 한 단어.
‘자격’이라는 문구 덕에 이 사태를 해결할 방안이 떠오른 것이다.
‘아까 미카엘도…… 분명 성흔이라고…….’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시문은 곧장 가슴 정중앙.
우웅.
현자의 돌이 위치한 그곳의 또 다른 힘.
특성 성흔의 힘을 끌어올렸고.
[‘망가진 은팔’이 노출된 신성을 흡수합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
[‘망가진 은팔’이 특성 성흔에 반응합니다.]
[자격이 확인되었습니다.]
눈앞을 어지럽히던 메시지가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이내.
꾸득.
영문 모를 파육음.
그러나.
[‘망가진 은팔’이 성흔을 받아들입니다.]
[이전의 성흔과 다른 성흔입니다.]
[신화 스탯 악기와 용신의 인자가 확인되었습니다.]
[격이 만족되었습니다.]
우드득!
까득.
당사자인 시문이 결코 모를 수 없는 파육음이 쉴 새 없이 울리더니.
[‘망가진 은팔’이 새로운 귀속 절차에 들어갑니다.]
일련의 메시지와 함께.
“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암전되는 시문의 시야로.
……두두두두!
진동하는 말발굽.
그리고.
“쏴라!”
“물러나지 마라!”
“포모르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격한 함성들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