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290화. 부름과 부름의 부름 (4)
시간이 멈춘 듯.
살아남은 이들부터 이곳을 구성하는 작은 원소.
그리고 성좌까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멈춰 있다.
그들의 시선은 끝없는 향락과 사기, 분노 등, 이곳의 모든 삿된 것들을 가르는 단 하나의 빛줄기로 향했다.
그 빛줄기가 내리쬐는 하늘.
정확히는.
펄럭.
그 빛 속에서 펄럭이는 백금의 존재를 바라봤다.
제 키보다 배 이상은 큰 8장의 거대한 날개.
태양을 녹여 만든 듯한 백금발의 머리칼과 첫눈보다도 하얀 피부.
그 순결함을 한층 더 돋보이면서도.
묘한 위엄과 위압감을 존재하는 푸른 눈까지.
천족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빛줄기를 길 삼아.
펄럭.
하강하는 저 존재의 모습은 가히 초월적인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
“…….”
하나 단순히 결코 잊을 수 없는 외형과 존재감 때문에.
모든 이들이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진신을 드러낸 브리트라.
분신체이긴 하나, 태초신의 힘을 빌린 케찰코아틀.
그의 힘으로 종복이 된 퀴클롭스와 드래곤.
그리고 작금의 존재를 불러낸 시문과 타락 천사들까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버, 범접할 수가…… 없어.’
보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것이 정화될 것만 같은 저 독보적인 존재가 이 대지와 가까워질 때마다.
쿠우우우웅!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이 성좌를 막론하고 짓눌러 온다는 것을 말이다.
그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역설적인 존재감에서 해방된 이는 딱 하나.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천계의 신왕을 강림시킨 기도자 시문뿐이었다.
그런 시문의 앞으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펄럭.
8장의 날개가 하강의 끝을 알린다.
“또…… 당신을 지켜보기도 해왔지요.”
톡.
그의 하얀 발이 제단에 바쳐진 거울에 닿자.
“허, 허억!”
“꺼으으!”
이 성스러운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브리트라와 케찰코아틀의 전투에서 시문을 보호하던 타락 천사들이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주르륵.
눈과 코.
입과 귀까지.
소위 말하는 칠공(七孔)에서 검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음에도.
“처, 천사장께…….”
“예를 표…….”
환희인지, 비애인지 모를 얼굴로.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예를 표하려는 타락 천사들.
그 노력이 가상할 법도 하건만.
“…….”
그들을 말없이.
그리고 어떤 표정도 없이 슥 훑은 미카엘은.
“다음부턴, 본신으로 알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는 말을 내뱉었고.
“그래야 당신들을 완벽히 소멸시킬 수 있으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륵!
갑작스레 타오른 백금의 화염에.
파스스.
한 줌의 가루가 되어버리는 타락 천사들.
같은 타락 천사로 변신해 있기 때문일까?
시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고.
그런 시문의 왼쪽 눈으로.
-하! 저 미카 개자식은 여전히!
뜨거운 목소리가 울려온다.
꽤나 친한 사이였던 것일까?
-아무리 빛을 저버렸다 해도, 결국 천사라는 본질 자체는 똑같은데! 어떻게 저래!!
성을 토하는 루시퍼.
더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던 미카엘이.
“감히…….”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터억.
한 손으로 시문의 머리를 잡아 온 것이다.
그리고.
“분명 절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그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시문의 왼쪽 눈을 노려보며.
“그 멍청한 머리통은 도무지 기능이라는 걸 하지 못하는 겁니까?”
감정 섞인 말을 우르르 쏟아내는 미카엘.
-지X하네! 멍청한 머리통은 너겠지! 맨날 규율이니 뭐니, 꽉 막힌 소리만 하는 주제에!
그에 지지 않고.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첫 번째 자손이야? 아버지의 첫 번째 자손은 나 루시퍼라고! 이 망할 동생 놈아!!
루시퍼가 연신 언성을 높였으나 그뿐.
“……제가 실수를 했군요.”
잠시 눈을 감은 미카엘은 미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저따위 타락자와 말을 섞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시문의 얼굴을 잡은 손을 놓았다.
“본신도 아닌 자 따위에게…… 하긴, 앞선 타락자들도 그러했죠.”
작고 무미건조한 한숨.
그것을 내쉰 미카엘이 시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과드리죠.”
슬쩍 고개를 숙여오는 미카엘.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이라, 잠시 눈을 끔뻑이던 시문은.
“뭐, 사과할 것까지야. 물론 갑자기 손을 뻗어온 건 좀 놀라긴 했지만요.”
피식 웃음을 흘릴 따름이었고.
어째서인지.
그런 시문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카엘은 물었다.
“제가 두렵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뜬금없다고 볼 수 있는 물음.
하나.
‘아아, 루시퍼 때문인가? 뭐, 미카엘의 성격은 전생에도 유명했으니…….’
미카엘이 묻고자 하는 게 뭔지 파악한 시문은.
“딱히요?”
어깨를 으쓱하며 제 왼쪽 눈을 가리켰다.
“어차피 미카엘 당신의 말대로, 여기 있는 루시퍼는 본신도 아니잖아요?”
처음 루시퍼의 존재를 다른 신왕급 성좌들이 알아차렸을 때도 그랬다.
특히 성좌 바알.
루시퍼와 깊은 접점이 있어 보이는 그는 루시퍼의 이름에 언급 불가의 저주까지 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거늘.
정작 마안에 숨어든 루시퍼를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진 않았으니까.
‘물론 나 때문인 것도 있는 것 같지만…….’
설령 관심을 주고 있는 자신을 배제하더라도.
루시퍼에 대해 딱히 제재를 가하지 않는 건.
어차피 본신이 아닌 이상, 손을 써 봐야 의미가 없다는 계산 것이고.
이를 바알과 같은 신왕급 성좌인 미카엘이 모를 리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가까이서 보니 더욱 색다르군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카엘.
‘어? 방금…….’
착각일까?
미카엘의 무미건조한 입꼬리가 미약하게나마.
살짝 올라간 느낌이 들었으나.
“당신의 말대로입니다. 본신을 소멸시키지 않는 이상, 저 타락자는 끝없이 증식하겠지요.”
더러운 벌레를 본 것처럼.
다시 싸늘한 얼굴로 읊조리는 미카엘.
그에.
-저 망할 놈이 누구보고 벌레래! 야 미카! 너 형한테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다?
루시퍼는 곧바로 성을 토했으나 그뿐.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절 불렀다간. 본신이고 뭐고, 숨어든 마안 자체를 태워 버리겠습니다.”
-미친놈! 이거 뭔지 몰라? 레메게톤이야! 아르스 테우르기아라고!
“그래서요?”
분명 레메게톤의 주인인 성좌 바알도 이 상황을 보고 있을진대.
“어차피 더러운 악마의 지식이 담긴 물건 아닙니까?”
거침없이 레메게톤을 까 내리며.
“본래대로라면 강림한 즉시, 정화시켰을 겁니다.”
레메게톤의 소멸까지 언급하는 미카엘.
하나.
[성좌 바알이 ‘으음.’ 입꼬리를 끌어올립니다.]
정작 당사자인 바알은 입꼬리만을 끌어올릴 따름이었다.
이는 미카엘 역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침음만 흘리는군요. 하긴, 그러니 타락자와 함께 어울린 거겠지요.”
시문의 앞에 떠오른 바알의 반응을 흘낏하곤.
작게 코웃음을 치는 미카엘.
이내.
“어쨌건, 이곳의 타락자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이제 저들을 정화해야겠습니다.”
몸을 돌린 그는 긴장한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는 거대한 두 성좌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난 타락자가 아닙니까?”
시문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미카엘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펄럭.
보란 듯.
흑염의 날개를 펼친 시문은 전신으로 악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미카엘.
어째서일까?
드높은 창공처럼 푸른 그의 눈이 시리도록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영혼까지 해체하듯.
시문의 전신을 훑는다.
이내.
“그 모습을 제하더라도, 분명 당신은 마기와 악기를 지닌 존재입니다.”
석상 같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그 본질을 보노라면…….”
말끝을 흐리는 미카엘.
고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시문을 응시하던 그는.
“제가 나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해서.
“이는 아버지께서도…… 직접 확인하신 부분이니까요.”
시문은 미카엘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을 뿐.
조금이지만 휘어버린 그의 눈과 입가는 볼 수 없었다.
* * *
존재감만으로 대기를 일렁이게 만드는 존재.
[이게 대체…….]
하늘까지 치솟은 거체의 주인공.
브리트라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당연했다.
‘미카엘이라니?!’
천사장 미카엘.
천계의 신왕급 성좌이자, 일말의 타협도 없는 그의 성격은 이미 전 차원적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한데 그런 그가 하필.
향락의 끝을 달리는 이곳에 강림하다니?
물론 앞서 강림한 케찰코아틀이 그 많은 향락을 모조리 죽음으로 물들였다지만.
‘저 미친놈이 여길 그냥 넘어갈 리 없는데…….’
성좌급되는 이들이라면.
특히나 미카엘과 같이 이러한 것들에 민감한 존재라면.
이곳에서 벌어진 향락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을 터.
하나 온갖 생각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단 하나.
‘미카엘이 어떻게 이곳에 강림한 거지?’
바로 미카엘의 강림이었다.
그녀가 직접 창조해, 발급한 초대장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입장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향락의 요람이다.
고로 이 차원의 위치는 성좌조차 알 수 없었거늘.
‘설마…… 저 타락 천사가?’
브리트라의 눈이 미카엘의 뒤편에 있는 타락 천사를 향한다.
그 말에 신빙성을 더하듯.
주변 모든 타락 천사들을 쓸어 버렸음에도.
저 타락 천사만은 가만히 두지 않는가?
이는 미카엘의 성격을 따져보자면 불가능한 일.
당최 어찌 된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저 타락 천사가 미카엘을 강림시켰어.’
그리고.
‘그 인과는 라비가 은밀히 구했다던 천족 노예들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 대가는 7마제의 소멸 이후.
다소 느슨해진 천족의 경계를 비집고 잡아낸, 천족 노예들일 터.
그들이라면 신왕급인 미카엘이 강림하기에 충분한 인과를 제공할 테니 말이다.
펄럭.
8장의 날개를 펄럭이며, 점차 가까워지는 미카엘에.
‘망할…….’
브리트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족 노예로 강림한 것이라면…… 자신의 격을 거의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을 텐데…….’
신왕급 성좌.
어떤 제약도 없이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한다면.
아무리 제 영역에서 진신까지 드러낸 그녀라 한들.
‘그럼 절대 이길 수 없어.’
신왕급에겐 상대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하나 브리트라는 달아나지 않았다.
‘내가 라비에게 보고받았던 천족은 딱 둘이었지.’
천계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포획했던 천족들.
관리자 라비의 보고론 분명 ‘단둘’이라고 했었다.
그 말은 즉.
‘인과의 성립으로 격 자체는 온전히 발휘하되. 그 양은 얼마 되지 못할 거야.’
쉽게 말해 질은 높으나.
그 양은 무척이나 적다는 것.
고로.
‘놈의 공격을 몇 차례만 피해 낸다면…….’
미카엘에게 주어진 인과의 ‘양’만 소모시킬 수 있다면.
승기는 결국 그녀에게 기운다는 뜻.
하나 브리트라는 더 이상 계산을 이어갈 수 없었다.
[……오랜만이군. 미카엘.]
육신이 반쯤 소멸한 케찰코아틀.
하나 꼿꼿이 성좌로서의 위엄을 유지하고 있는 그가 미카엘을 맞이했고.
인사를 건네는 케찰코아틀과.
그, 그어…….
크롸아…….
“…….”
그의 곁에서 몸을 떠는 두 종복을 말없이 바라보는 미카엘.
이내.
“신격을 강등당하더니, 한층 더 추잡스러워졌습니다. 케찰코아틀.”
대놓고 까 내리는 말과 함께.
화르륵!
그의 두 종복인 퀴클롭스와 드래곤을 백금색의 화염.
즉 성화(聖火)로 불살라 버린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놈! 상황을 모르나! 난 너와 같은…….]
케찰코아틀이 말을 다 이을 틈도 없이.
“닥치십시오. 제 귀가 더러워지니.”
펄럭.
케찰코아틀을 향해 8장의 날개를 가볍게 펄럭이는 미카엘.
그러자.
화르륵.
남아 있던 케찰코아틀의 반신이 순식간에 성화에 휘감긴다.
[이런 미치…….]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케찰코아틀.
그 한 줌의 재조차 성화로 불타 버리자.
“이제 당신 하나 남았군요.”
미카엘의 시선이 브리트라를 향한다.
단순한 체급의 차이만 놓고 보자면.
성층권까지 도달한 브리트라가 미카엘을 압도했건만.
[……정녕 날 칠 셈이야?]
위험한 것을 대면하듯.
슬쩍 몸을 물린 그녀는 경계하는 짐승처럼.
[난 지금 진신이다. 미카엘.]
미카엘을 노려보며.
[여기 네가 날 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너도 모르진 않겠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스아아아아!
그런 그녀의 뜻을 알리듯.
성층권까지 도달한 거체에서 검분홍빛의 기운이 산불처럼 타오른다.
하나.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미카엘은.
“의미라…….”
시리도록 차가운 청안으로 브리트라를 바라보며 가리킬 뿐이었고.
“제가 알아야 합니까?”
그 말을 끝으로.
화라라라라라락!!
세상이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