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287화. 부름과 부름의 부름 (1)
“수고했다.”
오만함이라기보단.
자연스레 묻어나오는 하대.
이내.
“아. 더는 이럴 필요가 없지. 수고했어요.”
뒤편에 처박힌 거대한 머리통을 힐끔한 시문이 말을 수정하자.
[아, 아닙니다! 루시퍼님의 계승자신데.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타락 천사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난 원래 이게 편하다. 아니. 편해…… 하아.”
답하려던 시문이 두어 번 말을 더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여기 일도 거의 끝나가니. 음욕의 죄종을 회수하는 대로 합류할게요.”
[예! 차질 없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기합이 가득한 타락 천사의 대답.
이내 타락 천사와의 연결을 끊은 시문은 실소를 머금었다.
“이거 참…….”
그리곤 손가락을 들어.
말캉.
머리를 휘감은 투명한 투구.
“보기보다 위험하네. 이거.”
타른헬름을 콕 찔렀다.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정말 종 자체를 바꿔버리기라도 한 건가?’
자신이 딱히 예를 차리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하지 않은 이들에겐 오히려 존대가 거리감이 느껴져 더 편했었는데.
어쩌다 반말을 넘어, 하대가 편하게 되어버린 건지.
‘진짜 타락 천사가 되어가는 기분이네.’
고개를 절레 젓는 시문의 귓가로.
-딱히 타른헬름이 아니더라도. 형은 이미 타락 천사나 다름없다고. 아니, 그보다 더 악하지!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마제도 아니고 신성 찬탈자인 이 루시퍼의 악기를 이어받았잖아?
흔한 타락 천사들처럼.
-그러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막 저질러 버려! 원래 타락은 모든 걸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이라고.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부심이 그득한 루시퍼의 목소리에.
“그럼 너부터 확 치워버려도 되는 거냐?”
시문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말했고.
-이, 이것 봐! 타른헬름 때문이 아니라, 형 본질이 딱 타락 천사라니까?!
이를 확인할 수 없는 루시퍼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렇게.
-이게 형의 본질이야! 맨날 사람 좋게 웃고 있어도, 까보면 나랑 동류라고!
“아, 예예~.”
-이씨! 저 약 올리는 태도까지 아주 마족 뺨치는…….
잔뜩 약이 오른 루시퍼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여하튼. 역시 진짜 신화급은 다르다 이거구나.’
한 번 더 말캉거리는 타른헬름을 콕 찌른 시문은.
‘악기를 제대로 다루는 법도 어느 정도 익혔겠다, 얼른 이번 아레나를 끝내고 벗어야겠어.’
화륵.
손에 악기로 이루어진 화염을 쥐었다 펴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우우우…….
음울한 이명을 흘리는 음욕의 죄종 앞에 도달한 시문.
하나 곧바로 음욕의 죄종을 향해 손을 뻗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들 저 팔에 신경을 썼었지?’
아까 메두사와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루시퍼는 물론이고.
성좌들마저 뜨거운 반응을 보내온 것이 있지 않던가?
시문의 시선이 음욕의 죄종을 쥔 팔을 향한다.
꼭 미스릴로 만들어진 것처럼.
시커멓게 물든 몸체 사이로 희미하게 백은색이 비치는 검은 팔.
신기하긴 해도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거늘.
‘나도 아까 가만 보다가, 절로 손을 뻗었었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던 기억을 떠올린 시문은.
‘우선 정보창부터 확인하자.’
혹시 모를 상황에 정신을 집중하며, 검은 팔을 바라봤다.
그러자.
[망가진 은팔]
등급 : ?
여러모로 망가진 은팔.
음욕의 죄종을 떠받들고 있었다기엔.
무척이나 초라한 정보창이 떠오른다.
‘이게 끝이야?’
너무나 짧은 내용에 실소를 머금은 시문.
그러나 이 짧은 내용으로서도.
얻는 것이 없진 않았다.
‘일단 갤럭시 아레나와 연관된 물건이긴 한가 보네.’
저번 대륙성의 부길마.
종완지가 주었던 DS도 그러했지만.
정보창을 지니고 있다는 건, 갤럭시 아레나와도 최소한의 접점은 있다는 것.
또한.
[성좌 검은 염소가 ‘하! 저걸 저따위로 사용하다니. 파충류 새끼들답네.’ 실소를 머금습니다.]
[성좌 라가 ‘거인족이 얻은 걸 용족이 사용한다라……. (정말 무식하고 더러운 연합이라니까.)’ 한숨을 내쉽니다.]
[성좌 제우스, 천마, 바알, 오딘이 고개를 젓습니다.]
성좌들의 반응과.
[성좌 XXX가 망가진 은팔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메두사 라비가 진상했던 두 천족.
그들을 봤을 때부터 나타났던 이름 모를 성좌까지 반응해 오지 않는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고.
당연히.
‘이것도 챙겨가자.’
챙겨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용법이나 자세한 내용 같은 건, 연구실에서 확인하면 되니까.’
영 안 되겠으면 지금처럼 음욕의 죄종과 연계해서 사용해도 되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끝낸 시문이.
스윽.
검은 팔을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
두근!
몸속 어딘가에서 갑작스러운 반응과 함께.
[특성 성흔이 ‘망가진 은팔’에 반응합니다.]
일련의 메시지가 눈앞으로 떠올랐다.
“성흔? 성흔이 왜…….”
눈이 동그래진 시문이 사태를 파악할 틈도 없이.
뚜둑.
조각상처럼 음욕의 죄종을 바치고 있던 은색의 팔이.
정확히는 그 손가락들이 삐걱거리더니 아주 무심하게.
휙.
손바닥에 놓여 있던 음욕의 죄종을 옆으로 떨어뜨렸고.
“엇!”
깜짝 놀란 시문이 떨어지는 음욕의 죄종을 향해 팔을 내뻗는 순간.
뚝.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손가락들은.
쩌억!
어느 괴수의 아가리처럼.
한결 거대해진 채, 시문의 팔을 덮쳐왔다.
“이런!”
펄럭!
시문은 급히 날개를 펄럭인다.
그 반동으로 몸까지 뒤로 누이며, 손아귀의 사정거리를 벗어나려는 시문.
하나.
쩌어어억!
그 움직임까지 계산한 것일까?
어느새 몇 배로 더 커진 망가진 은팔의 손아귀는 순식간에 물러나는 시문을 따라잡았고.
덥석!
곧바로 시문의 오른팔을 집어삼켰다.
그에.
“읏!”
시문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으나 그뿐.
이는 갑작스런 상황으로 인한 자연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아무렇지도…… 않잖아?’
예상했던 고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꾸물.
일종의 슬라임.
혹은 그러한 종류의 액체들처럼.
팔에 달라붙어 꿈틀거리며.
스르륵.
서서히 팔로 흡수되고 있을 뿐.
신기하게도.
‘이물감은 느껴지는데. 불편함은 전혀 없네.’
팔에 무언가가 스며들었다는 느낌은 분명하게 있는데도.
조금의 불편함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드래고노이드를 사용했을 때처럼. 뭔가 한 겹 덧씌워진 느낌이야.’
오른팔 내부로 맞춤 제작한 보호구를 착용한 느낌이었다.
본디 몸에 작은 이물질만 생겨도.
통증까지 느끼는 생물이 인간임을 따져본다면.
참으로 신기한 현상.
그러나 이는 시문만의 생각인 것일까?
-아, 아니 저게 왜 일로 들어오는 거야?!
왼쪽 눈에서 루시퍼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 철없는 반항아야. 너도 한 몸이니 알 거 아냐? 오빠의 성흔에 반응했으니까 그런 거지.
가슴 중앙에선 현자의 돌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성좌 제우스가 ‘성흔이라…….’ 침음을 흘립니다.]
[성좌 오딘이 ‘이상할 것도 없잖아. 본 주인은 신성까지 잃었으니.’ 어깨를 으쓱합니다.]
[성좌 천마가 ‘이미 티아메트의 유지까지 받지 않았나? 연자에게 이끌리는 건 마땅하네.’ 수염을 쓰다듬습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하긴. 거기다 뭐, 당장은 정착만 한 거 같으니까.’ 고개를 까딱입니다.]
[성좌 라와 바알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들의 반응까지 줄줄이 떠오른다.
시문은 그중.
‘당장은 정착만 했다고?’
검은 염소가 말에 시선이 갔다.
성흔이 어쩌고 하는 건.
이미 앞선 메시지창과 특성 성흔의 반응을 몸소 겪었으니 알겠다만.
‘그럼 이렇게 한 몸처럼 느껴져도, 결국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잖아?’
결국 망가진 은팔이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망가진 은팔이 스며든 오른팔을 힐끔하는 시문.
이내.
-시문 님? 슬슬 제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머릿속으로 타락 천사의 목소리가 오자.
“아. 적당한 위치에 설치해주세요. 곧 갈게요.”
-알겠습니다.
적당히 답해준 시문은 짧은 한숨을 픽 내쉬며.
‘뭐, 당장은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까. 일단 이쪽 일부터 먼저 처리하자.’
우우우…….
음울한 이명을 흘리는 음욕의 죄종까지 수거하고는.
“이것도 돌아가서 확인해보고.”
처음 들어왔던 거울로 몸을 돌렸다.
* * *
[아앗!]
“조, 좋아!”
-그흐흑!
“꺄하핫!”
온갖 종류의 목소리로 어우러진 신음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 요란하고 난잡한 쾌락이 한데 내려다보이는 곳.
향락의 요람에서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위치한 타락 천사들은.
“쓰읍…… 나도 즐기고 싶다…….”
“그러게 말이다. 이만한 향락을 맛볼 수조차 없다니.”
“지금이라도 몰래 갔다 올까?”
등에 있는 검은 날개를 부르르 떨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고.
“좋은 생각이야. 일단 나부터 갈 테니 교대로…….”
그중 한 명이 기어코 눈을 번뜩이며, 날개를 펼치려는 순간.
우웅.
뒤편에 있던 거울에서 작은 이명이 울렸다.
그에.
“헉!”
펄럭.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타락 천사는 다급히 날개를 펄럭이며 뒤로 물러났고.
입맛을 다시던 타락 천사들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오셨습니까? 시문 님.”
절제된 자세로 거울 속에서 나타나는 타락 천사.
시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 오래 기다렸죠?”
시문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걸 챙기느라, 좀 늦어졌어요.”
시문은 옆에 끼고 있던 거울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시문 님의 명이라면 천 년도! 만 년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기합이 가득한 목소리로 답하는 타락 천사들.
이젠 누가 보는 눈도 없는데.
‘뭐야? 갑자기 왜들 저래?’
이전보다 더욱 예를 차리는 타락 천사들에 잠시 눈을 끔뻑인 시문은.
-아앙!
“더! 더!!”
“아흣!”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신음을 듣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아, 저거 때문이었나.’
이내.
“향락이라면 마계에도 있잖아요. 거기서 즐기세요.”
고개를 슬쩍 저은 시문은 그렇게 말하곤.
옥상의 중앙을 향했다.
타락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곳엔.
온갖 종족의 것으로 이루어진 뼈가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데구르르.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굴러떨어지는 해골을 힐끔한 시문은.
“생각보다 많이 구했네요?”
곧 타락 천사들을 바라보며 물었고.
“타고난 종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쾌락에 몸을 던진 말로지요.”
“이곳의 향락은 아레나 최상위 종도 위험한 것들이 즐비한지라…….”
“아아. 하긴, 그렇겠네요.”
타락천사들의 답에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도 마약이니 뭐니. 쾌락에 목숨까지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니까.’
쾌락에 몸을 던지다 죽는 이들은 지구에서도 꽤나 많지 않던가?
하물며 성좌마저 들린다는 이 향락의 요람이 주는 쾌락이라면야.
생명 따윈 가볍게 바스러뜨릴 것들이 가득하겠지.
어쨌건.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제단으로서 손색은 없으니 문제는 없겠네요.”
타락 천사들이 준비한 뼈 무더기.
즉 임시 제단은 의식의 진행하는 데엔 별문제가 없었기에.
시문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그의 손에 잡혀 나온 아이템.
“아, 아니?!”
“그것은!”
‘타르타로스의 조각’을 알아본 것일까?
“저 귀한 것을 어찌…….”
“과연…… 범접할 수 없는 분이셨군요.”
“역시 계승자님이십니다!”
감탄을 터뜨린 타락 천사들은 몇 걸음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외 어린 예를 표했다.
그에.
‘성좌가 아닌데도 타르타로스의 조각을 아나 보네.’
멋쩍은 듯.
볼을 슬쩍 긁은 시문은 곧 정신을 차리곤.
뼈 무더기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
따악.
뼈 무더기를 향해 손가락을 튕기자.
으드득.
파골음과 함께 삽시간 각지고 깔끔한 제단으로 빗어진다.
‘대충 이만하면 만족하겠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시문이 타르타로스의 조각을 제단으로 내민다.
스탯 사기의 힘을 끌어올리자.
사아아아.
죽음 특유의 음산한 기운이 타르타로스의 조각을 중심으로 흘러나왔다.
“지난날의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니…….”
연기처럼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그것을 제단에 집중시키고.
“오라. 깃털 달린 뱀신이여.”
나지막이 읊조리자.
음산함을 넘어.
[흐흐…… 드디어…….]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섬뜩함이 귓속으로 파고든다.
이어.
쿠우우우우웅!
건물 하나를 통째로 등에 진 것처럼.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제단의 일대로 내리꽂혔고.
“크, 크윽!”
“읏!”
예를 표하고 있던 타락 천사들이 일제히 휘청거렸으나 그뿐.
일대를 짓누르던 존재감은 곧, 제단에 놓인 넘실거리는 사기로 집중되었다.
이내.
우우웅!
당장이라도 터질 듯.
넘실거리던 사기가 일점으로 뭉치는 순간.
솨아아아아아!
응축되었던 사기가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친다.
진녹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기의 기둥.
그것을 타고.
곳곳에 요란한 색의 깃털이 달린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서서히 기어 내려왔다.
전생의 체르노젬을 죽음의 대지로 만들고.
일전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같은 일을 자행하려던 존재.
[마침내 이날이 도래했구나!]
죽음의 성좌 케찰코아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