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277화. 적합자 (2)
칠흑의 세상.
“…….”
“…….”
불길함이 가득한 그곳에 어울리는 침묵이 감돈다.
무리도 아니었다.
온 세상이 악기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이.
스아아아…….
한쪽으로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그곳은 모래사막의 한 영역을 통째로 퍼낸 것마냥.
쉬지 않고 칠흑의 기운으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낸 인간.
-야 이 멍청아! 그렇게 대놓고 밀어 버리면 어떻게 해!
시문의 머릿속은 다급한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하나 정작 당사자인 시문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지.
‘왜? 네가 악기를 움직일 수 있다며.’
놀랍도록 태연한 목소리로 물을 따름이었다.
-당연히 내 악기의 계승잔데 움직일 수야 있지! 근데 이렇게 차원을 찢어놓으란 적은 없다고!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
루시퍼는 연신 목소리를 높이며 펄펄 뛰었고.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찢은 거 아닌데? 난 그냥 살짝 밀었을 뿐이야.’
아까의 손짓부터가 그러했지만.
시문은 부드러운 천 조각이라도 만지듯.
정말 조심스럽게 이 악기의 잔재라는 것을 슬쩍 민 것 아니던가?
실제로.
‘무슨 고운 모래를 미는 느낌이었다고.’
사막의 모래.
혹은 밀가루처럼.
색만 검었지, 너무나 부드러운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각까지 똑똑히 느껴졌었다.
한데 세상을 찢었다니?
하지만 그런 시문의 말에도.
-아니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일까?
-이 차원 자체가 전부 악기의 잔재로 이루어져 있다고. 당연히 내 악기의 계승자인 네가 살살 민다 한들…….
다급한 목소리로 연신 말을 잇던 그는.
쿠그그그그그!
점점 강해지는 세상의 진동에.
-으아아아! 이러다 차원이 소멸하겠다! 일단 찢어놓은 거 복구부터 시켜! 얼른!
얼른 말을 끊고, 차원의 복구를 재촉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문의 말에.
‘어떻게 하는 건데?’
-아…….
뒷목을 턱 하고 잡을 수밖에 없었다.
시문은 눈을 깜빡이며, 아까처럼 손을 내밀었다.
‘뭐 반대로 다시 밀면 되는 거야?’
-아, 아니! 절대…….
그리곤 루시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윽.
다시 아까와 반대 방향으로 손을 젓는 시문.
드래고노이드가 활성화된 덕분일까?
아까 움직였던 거리를 정확하게 맞춰 움직이는 시문의 손.
그 사이로 부드러운 가루 같은 촉감이 다시 시문의 손을 간질였으나 그뿐.
그로 인해 일어난 결과는 전혀 달랐다.
쿠콰쾅!!
머리가 띵할 정도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콰그그그그그!
한층 더 거세게 진동하는 칠흑의 세상.
순수한 악기의 잔재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시문에겐 흔들림 말곤 큰 영향이 없었으나.
“크아아악!”
“차, 차원이!”
선계의 존재들에겐 이야기가 달랐다.
“원시천존이시여!”
두 팔을 황급히 휘두르며, 여러 형태를 그려가는 종리권.
그의 중심으로 하얀빛이 어린 구체가 펼쳐졌고.
“어서 팔선께 모여라!”
세계의 진동에 휘청이던 여덟 신장은 얼른 종리권이 펼친 백색의 결계로 숨어들었다.
이내.
양팔을 쫙 펼치며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종리권.
“으음…….”
그에게서 작은 침음성이 흘러나온다.
‘아무리 적합자로 강신했다곤 하나, 최소로 펼친 결계이거늘…….’
분신체보다 약한 것이 적합자로 인한 영향력 행사라지만.
현재의 결계는 최소의 크기로 그 효율을 최대한 높인 상태 아니던가?
한데도.
콰가가각!
‘이리 힘이 들 줄이야……!’
결계를 펼친 두 팔이 욱신거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에.
‘과연 7마제의 악기도다! 죽어서도 이리 지독하다니!’
종리권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그뿐.
“아니 그러니까.”
정작 이러한 선계의 존재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알아듣게 좀 제대로 설명을 해.”
이 현상의 원인인 시문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 설명은 다 해줬잖아! 일단 차원의 구성을 파악한 다음…….
머릿속의 루시퍼가 주절주절 떠들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이다.
시문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있잖아. 난 성좌가 아니거든? 차원의 구성이니 뭐니, 그런 거 파악하지도 못해.’
-아니 방금 제 마음대로 차원을 주물러 놓고. 파악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진짠 걸 어쩌냐.’
시문의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는지.
-아오! 이놈의 필멸자들 진짜! 그냥 보기만 해도 구성을 볼 수 있는데! 왜 이걸 못해서는!
답답하다는 듯.
탄식을 내지르는 루시퍼.
-일단 뭐든 해봐! 이러다가 마몬의 무덤이 통째로 사라진다고!
‘무덤까지 챙겨 주는 사이였냐? 아까 말하는 걸 보면 마몬이랑 그리 친해 보이진 않는데?’
-당연하지! 그 좀생이 놈을 누가 좋아한다고! 난 그 좀생이가 혹시 유산이라도 남기지 않았나 싶어서 하는 소리지!
그 말에.
‘유산이라고?’
시문의 눈이 반짝이더니.
-그래. 그놈이 왜 여기서 소멸했는지는 몰라도, 어쩌면 솔로몬에 대한 정보를 남겨놨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쯧. 그런 유산이라면야…….’
대번에 식어 버린다.
그에.
-아니! 무슨 남 일처럼 반응할 때냐! 이 차원이 소멸하면 너도 같이 소멸행이라고!!
루시퍼는 곧장 윽박질렀고.
‘그거야 상관없어.’
시문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차원을 소멸하는 것보다, 저쪽이 죽는 게 먼저인 거 같거든.’
정면을 턱짓하는 시문.
그곳엔.
“크으으으!”
“파, 팔선이시여!”
팔선 종리권을 비롯한 선계의 신장들이 무너지는 악기의 차원에 대항하고 있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지만. 갤럭시 아레나에서 아무 제재를 하지 않는 거면, 이동 자체를 기술로 치는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
‘그럼 어차피 나나 종리권,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텐데. 내 소멸을 걱정할 이유가 없잖아.’
-…….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는 루시퍼.
시문의 말이 사실인 것이다.
이내.
침묵하는 루시퍼를 의식한 시문이.
‘뭐…… 그래도 그 유산이라는 게 끌리긴 하네. 정보 말고 다른 게 있을 수도 있으니.’
슬며시 운을 떼자.
-그, 그렇지? 아마 다른 보물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어! 아니! 틀림없어! 마몬 그놈은 알아주는 좀생이니까!
루시퍼는 얼른 활기를 되찾았고.
그런 녀석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림도 잠시.
“근데…… 이걸 어떻게 되돌리지?”
시문은 조금 심각한 얼굴로 진동하는 세상을 슥 훑었다.
어딜 봐도 시커먼 칠흑만 보일 뿐.
‘알려 준 것들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루시퍼가 알려 주었던 방법들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오빠. 내가 도와줄게.
가슴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울린다.
현자의 돌이었다.
“현아 네가?”
시문의 시선이 그곳을 향하자.
-응. 오빠는 성좌가 아니라서, 저 머저리의 설명 방법은 이해하기 힘들 수밖에 없거든.
현자의 돌이 답을 해온다.
그에.
-누구더러 머저리라는 거야!
루시퍼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참에 잘 됐다! 현자의 돌이라고 했냐? 여태 나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안 그래도 짜증…… 어?
호기롭게 외치던 루시퍼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점차 사그라든다.
이내.
-아, 아니. 당시……?!
사그라든 루시퍼의 말이 이어지려던 찰나.
-뭐? 내가 여기 있는 게 꼽냐?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현자의 돌.
-이 새끼가 잘생겼다고 들어오는 거 가만 봐주니까! 꼬우면 덤비던가. 앙?!
평소와 같은 괴랄한 행실 때문일까?
-아, 아니 그게…… 아니! 님이 왜…….
횡설수설하며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루시퍼.
“그만하고.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시문은 왠지 모르게 기가 눌린 루시퍼를 구해주고자 물었고.
-간단해. 일종의 링크라고 해야 하나? 나한테 잠시 오빠의 감각만 공유해 주면 돼.
‘감각 공유? 그건 평소에도 하고 있잖아.’
-아니. 그거랑 달라. 오빠가 사용하는 악기까지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 깊게 공유하자는 거지.
“아.”
짧게 탄성을 흘리는 시문.
확실히 현자의 돌과 사소한 감각은 공유하지만 그뿐.
실제로 천마신공 등 기술을 사용할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았으니까.
“좋아. 편하게 해.”
시문은 흔쾌히 현자의 돌의 링크를 허락했다.
애당초 함께 회귀까지 해온,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 아니던가?
그런 시문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봤냐? 야훼의 아들놈아? 오빠랑 내가 이런 관계니까.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예.
-짜식. 얼굴만 아니었어도 확 그냥! 오빠 몸에 들어온 순간 즉시 내 아래로 귀속행이었어. 딱 알아만 둬라.
현자의 돌은 곧바로 루시퍼를 갈궜고.
루시퍼는 악명 높던 과거와 달리.
-며,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어딘지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으나 거기까지.
-그럼 시작할게.
곧바로 링크를 걸어오는 그 감각에.
“읏!”
시문은 의문 대신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키이잉!
왼쪽의 오딘의 눈이 최대치로 활성화되며.
‘이, 이건……!’
칠흑 같았던 세상이 점멸하다 못해, 환하게 비치지 않는가?
선과 점, 그리고 면.
그 너머의 수많은 요소까지.
어느 컴퓨터 속 데이터 덩어리도 이토록 복잡하진 않을진대.
‘윽!’
아까 종리권의 호리병에 빨려 들 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거대한 정보의 파도가 오딘의 눈으로 밀려들던 찰나.
슥.
독자적인 자아가 있는 것마냥.
시문의 손이 허공을 부드럽게 젓는다.
아니.
짐승의 털을 만지듯.
‘막대한 정보가 이룬 결’대로 부드럽게 쓸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
그러자 놀랍게도.
뚝.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들끓던 세상이 순식간에 멈춘다.
하나 정작 당사자인 시문은 다른 부분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 감각은 대체……!’
너무나 부드럽게 허공을 쓸었던 단 한 번의 움직임.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건만.
그곳에 담겨 있는 묘리.
아니,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는 가히 정신이 전율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
‘전능…….’
지난날.
페어리 드래곤을 탄생시켰던 그 날처럼.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어떤 거대한 영역에 손을 쓴 느낌이었다.
이내.
‘근데 현자의 돌은 어떻게 이런 걸 아는 거지?’
이 놀라운 경외감이 의문으로 돌아서려던 순간.
토옹.
수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지듯.
맑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간 무너진 차원으로 인해.
스으으으으.
바닥인지 바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바닥이 솟아올랐고.
그 위로 꼭 레메게톤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칠흑 같은 연기가 풀풀 흐르는 열쇠 하나가 떠올랐다.
이어.
-그렇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 좀생이가 그냥 죽을 리 없지!!
루시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칠흑의 열쇠는 시문이 손을 뻗지도 않았음에도.
스르륵.
시문의 왼쪽 눈.
정확히 레메게톤으로 인한 마안으로 스며들었고.
[‘만마전의 열쇠 반쪽 (1/2)’을 획득합니다.]
[히든 연계 퀘스트 ‘판데모니움’을 획득합니다.]
메시지들이 시문의 앞으로 떠올랐다.
꽤나 놀라운 물건인지.
[성좌 천마가 ‘아니! 저것은!’ 두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바알이 ‘으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성좌 라가 ‘저걸 반 토막 내 놓다니…… 이러니 아무도 못 찾죠. (워낙 탐욕으로 유명한 놈이니까.)’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제우스와 오딘, 검은 염소가 흥미가 가득한 시선을 보냅니다.]
시문의 성좌들 역시 줄줄이 반응을 보내왔다.
더불어.
-어때 김시문? 아니 시문 형.
이젠 여유가 생긴 것일까?
-내 말 듣길 잘했지? 그거 꽤 귀한 거라고.
어느새 본래의 톤으로 돌아와, 능글거리는 루시퍼.
그에.
‘음. 그래 보이네.’
시문은 큰 감정 변화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반응이 왜 그래? 저거 진짜 좋은 물건이라고. 판데모니움으로 갈 수 있는 열쇠라니까?
루시퍼는 볼멘 목소리로 툴툴거렸으나 거기까지.
‘미안한데. 난 판데모니움이 뭐 하는 곳인지 몰라.’
판데모니움은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 없던 이름이었기에.
시문은 작게 고개를 저었고.
-맞다. 저긴 내가 이 꼴이 되기 전부터 닫혔지.
스스로도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시퍼는.
-후우. 좋아!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저놈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 힘 빠지는 감정을 풀어낼 먹잇감을 찾은 듯.
루시퍼가 깃든 왼쪽 눈이 얼이 빠진 채 늘어져 있는 종리권을 향했다.
아까의 결계에서 힘을 모두 소비한 것일까?
“으으…….”
종리권은 탈진한 듯.
희미한 구름 위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고.
그가 소환했던 여덟 명의 신장은 어느새 모습을 감추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