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263화. 우호적인 신화 (3)
단 한마디에 멈춰 버린 세상.
특히나 이곳에 성좌라는 존재가 둘이나 있다는 걸 따져 본다면.
이는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성좌 이랑진군은 물론.
목소리의 성좌조차 한마디의 말도 내뱉지 못했다.
신기한 것은.
이 오행산의 구성원 중 가장 낮은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문은 정작 멀쩡하다는 것.
“당신은…….”
그런 시문의 물음에.
화아아아.
오행산의 하늘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든다.
이전 천계에서 태초신 야훼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그러나 그때와 같이 거룩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자애로운 빛이었다.
이내.
[과연.]
하늘을 물들인 빛처럼.
찬란함과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보자면.
누구에게나 그러할 테지만.
[닉스와 야훼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멈춰 버린 이랑진군과 목소리의 성좌는 알 수 있었다.
‘서, 석가여래께서 어찌 한낱 인간을!’
‘뭐야? 저 밍밍한 양반이 호의도 비칠 줄 알아?’
그의 목소리엔 유독 남다른 호의가 묻어 나오는 것을.
이내.
시문에게 시선이 집중되듯.
화아아아.
찬란하고 자애로운 빛무리가 햇살처럼 시문을 내리쬔다.
마치 아기를 쓰다듬듯.
시문의 전신을 부드럽게 스치는 빛무리.
[참으로 놀랍군……. 굴레의 역행은 우리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거늘……. 하긴. 그는 굴레 자체에서 벗어난 존재.]
그러곤.
[결국 이 또한 윤회일지니. 작금의 순간도 그의 안배인가? 그는 대체 어디까지 도달해, 무엇을 내다본 것일꼬…….]
정체 모를 말을 읊던 그는.
[호오라? 그대도 있었는가?]
뜬금없이 반가운 기색을 담아 물었다.
그에.
‘그대? 갑자기 누구를…….’
시문이 반가운 기색의 주인을 알아차릴 틈도 없이.
[그런 꼴이 되어서도, 같은 존재를 택했군. 아직도 그때의 번뇌를 저버리지 못했는가? 하긴, 그대는 유독 우리와 달랐지. 우리는 그것이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네.]
저 혼자 또다시 정체 모를 소리를 읊더니.
[그와 더불어 그대까지 있으니……. 닉스와 야훼가 그렇듯. 나 역시 믿을 수밖에 없군.]
저 혼자 말을 끝맺은 그의 목소리는.
[봉인 해제를 허하노라. 김시문. 부디 그대의 뜻대로 하시게.]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석가여래가 떠났다는 것 정도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스으으…….
찬란하고 자애롭던 금빛이 사라짐은 물론.
멈추었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당연하게도.
“이, 이게 무슨……!”
-봉인을 푸는 걸 허락한다고? 진짜로?!
멈춰 버렸던 성좌들 역시 목소리를 내었고.
곧바로.
“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시문을 향해 노성을 터뜨리는 이랑진군.
그는.
“석가께서 언급하신 그가 누구지? 대체 네놈이 무엇이길래! 저분께서 저리도 관심을 표하는 것이냐!”
처음 시문을 대면했을 때와 또 다른 흥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시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고.
“기고만장한! 감히 석가께서 관심을 주었다 하여! 네놈이 무엇이라도 된 것 같으냐!”
이랑진군은 더욱더 성을 내었으나 그뿐.
‘뭐 어쩌겠어. 석가여래가 왜 저러는지는 나도 정말 모르는데.’
작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시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했다.
‘그의 시선이라고 했던 것도 그렇고, 앞선 성좌들이나 닉스나 야훼 때를 따져 본다면…….’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의 주인공.
아마 자신의 회귀를 이루어낸 연성물의 창조주이자.
‘저편 그 자체’라고 언급된 존재일 테니까.
다만.
‘뒤에 언급한 그대는 누구지?’
석가여래가 언급한 존재는 저편의 존재 하나가 아니지 않는가?
시문의 시선은 왼쪽을 힐끔 했다.
‘설마 마안에 숨어 있는 루시퍼를 알아차린 건가? 하긴. 태초신이니 모르는 게 이상하겠네.’
루시퍼.
대체 뭔 짓을 하던 놈인지는 몰라도.
그간의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면, 어지간히도 유명한 놈이었을 터.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런 시문의 가슴께에서.
-……오빠?
작은 이명이 들려온다.
“어. 현아야.”
현자의 돌이었다.
-석가여래가 허락까지 했으니까. 얼른 봉인 풀어 주고 돌아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인지.
현자의 돌은 웬일로 진중한 목소리로 귀환을 권유해 왔고.
“알았어.”
안 그래도 빨리 처리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던 시문은 즉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놈!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벼락같은 노성이 오행산 꼭대기로 내리친다.
하나 그뿐.
“말했잖아. 나도 잘 모른다고.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먹먹한 고막에 인상을 찌푸린 시문은.
“거기다 석가여래께서 직접 허락했는데. 자꾸 이렇게 윽박질러 대는 건, 석가여래의 판단에 불복하겠다는 뜻인가?”
석가여래를 들먹이며 받아쳤고.
효과가 상당했는지.
“무, 무, 무슨 소리를!”
대경실색을 하는 이랑진군.
“내, 내가 언제 석가께서 하신 판단에 불복했다는 것이냐!”
그러나.
저벅.
자신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거대한 봉인 부적으로 향하는 시문을 보곤.
“이놈이…… 감히 날 우롱해……?”
치욕에 잘게 몸을 떨며,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그뿐.
‘석가께서 허락과 관심을 표하신 것은 사실. 여기서 저놈을 내 뜻대로 해 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시문에게 어떤 해를 가한다는 것은.
시문의 말대로 석가여래의 명에 불복하는 행동밖에 되지 않았기에.
‘분하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은 내 치욕을 갚는 것보다, 상제께 이 일을 고하는 것이 먼저야.’
빠르게 냉정을 되찾은 이랑진군은 몸을 돌려.
“……네놈을 기억하겠다. 하계의 인간. 아니, 김시문.”
이름까지 언급하며 낮게 으르렁거리곤.
파아앗.
빛에 휘감겨 사라졌다.
시문밖에 남지 않아서일까?
오행산은 처음 입장했을 때처럼 평온한 침묵이 감돌았고.
“그럼 시작한다.”
-엉! 부탁한다고!
거대한 부적에 도착한 시문은 눈을 감았다.
딱히 주문을 외운다거나 하는 여타의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샤르릉.
청명한 이명을 흘리는 삼장.
그것이 환한 옥빛으로 변해, 알아서 봉인 부적으로 스며들었으니까.
그리하여.
삼장이 스며든 지점을 기점으로.
스르르르.
눈 녹듯.
옥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부적.
이내 완전히 드러난 오행산의 꼭대기엔.
온갖 문양으로 점철된 둥근 석조물이 나타났고.
-드디어!
머릿속에서 울리는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콰강!
사방으로 터져 버리는 둥근 석조물.
그리고 그 속에선.
“드디어 풀려났다아아아!!!”
머릿속으로만 들리던 목소리가 육성으로 터져 나오며.
쿠르르르르르.
오행산을 마구 뒤흔들었다.
신기한 것은 오행산을 뒤흔들 만큼 강렬한 외침임에도.
‘목청 한번 좋네.’
시문의 고막은 멀쩡하다는 것.
이내.
“캬! 직접 움직이니까 날아갈 것 같구만! 그럼 당장 선계로 가서 옥가 놈부터 그냥!”
신이 난 목소리로 펄펄 뛰던 그는.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쿵!
제 머리를 땅이 울릴 정도로 강하게 쥐어박더니.
“짜식! 고맙다! 덕분에 예언보다 일찍 풀려났어.”
순식간에 시문의 앞으로 나타나.
“난 제천대성. 달리 손오공이라 불러도 돼.”
씩 웃으며 손을 내미는 성좌.
시문은 그가 내민 손을.
정확히는 손을 내민 성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게…… 원숭이라고?’
드래고노이드를 한 자신과 같은 2미터대의 키.
그러나 그 큰 키가 무색하게.
완벽한 신체 비율을 자랑해, 실제로 옆에 서 보지 않으면 그리 크다는 느낌은 들지도 않았고.
모로 봐도 원숭이가 아닌, 젊은 인간으로만 보였으니까.
그것도.
-어머나! 저 미소 좀 봐! 나 얼굴 빨개졌어!
요 눈 높은 현자의 돌이 한껏 두근댈 정도의 활기찬 미청년으로 말이다.
‘제천대성인 건 진즉 눈치챘지만. 미후왕과 같은 원숭이인 줄 알았는데…….’
설마 이 정도로 완벽한 사람의 모습일 줄이야?
그런 시문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뭐야? 왜 그리 물끄러미 봐?”
의문을 담은 눈을 끔뻑이는 성좌.
그에.
“아니. 다들 원숭이, 원숭이 하길래. 난 그쪽이 진짜 원숭인 줄 알았거든.”
시문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고.
“엥? 나 원숭이 맞는데?”
제 얼굴을 검지로 가리킨 손오공은.
“봐 봐. 여기 꼬리가 있잖아.”
시문의 드래고노이드처럼.
뒤편에 있는 기다란 꼬리를 팔랑거렸다.
앞선 미후왕이나 원숭이 요괴들과 흡사한 모양새.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
그의 머리칼처럼 꼬리 역시 환한 금색이라는 것.
“이 꼬리가 원숭이 요괴의 상징이거든.”
손오공은 보란 듯 꼬리를 흔들며, 제 근본을 알려 왔다.
“그러네.”
그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그럼 봉인도 풀렸으니. 보상 이야기를 해 볼까?”
봉인도 풀렸겠다.
손오공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바로 본론을 꺼내는 시문.
그에.
“캬핫! 처음 볼 때부터 그랬지만, 참 단도직입적이고 시원시원하다니까? 마음에 들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맞잡은 손을 신나게 위아래로 흔드는 손오공.
“어쨌든. 뭘 줘야 하나 나름 고민을 했었는데…….”
다소 활발한 악수를 끝낸 그는 시문의 왼쪽 눈을 가리켰다.
“보니까 오딘의 눈까지 지니고 있더라고? 참 정체가 궁금한 녀석이라니까.”
그 말과 함께.
“어쨌거나. 덕분에 너한테도 별 부담 없이 내 능력을 줄 수 있겠더라. 대신…….”
지이잉.
왼쪽 눈을 가리킨 손오공의 검지가 금색의 빛으로 타올랐고.
“내가 얻었을 때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쪼끔 뜨거울 수도 있다?”
그의 경고가 끝나자마자.
치이이.
시문의 왼쪽 눈이 일렁거렸고.
“윽!”
시문은 작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호오? 제법 잘 버티는데? 괜히 석가여래께서 관심을 준 게 아니야?”
손오공이 감탄을 흘리는 것도 잠시.
화륵.
눈에 일렁이던 열기는 한차례 거세게 타오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신화급 특성 ‘화안금정(火眼金睛)’을 획득합니다.]
[‘화안금정(火眼金睛)’이 특성 오딘의 눈으로 귀속됩니다.]
[특성 오딘의 눈에 귀속됨에 따라, ‘화안금정(火眼金睛)’의 한계치가 조정됩니다.]
[한계치는 언제든 해제가 가능합니다.]
성공적으로 획득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시문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이어.
[업적 ‘성좌의 직접 후원’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0점을 획득합니다.]
추가적인 업적 보상까지.
그러나 화안금정을 얻을 때의 통증 때문인지.
“이거 엄청 뜨겁네.”
메시지창을 치운 시문은 다소 진이 빠진 목소리로 움츠렸던 몸을 폈고.
“크핫! 그래도 상상 이상으로 잘 버텼어. 난 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바닥이라도 나뒹굴 줄 알았거든.”
손오공은 허리에 척 손을 올리며 장난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네가 처음 화안금정을 얻었을 때처럼 말이지?”
“고럼! 그때 팔괘로에서 평생에 흘릴 눈물을 전부……. 야이 씨!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이어지는 시문의 반격에 곧바로 언성을 높였지만 말이다.
이내.
“여하튼. 그건 내 주력기 중 하나니까. 써 보면 만족스러울 거야.”
다소 턱을 들며 말하는 손오공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애 같아 보여도, 나름 이름을 날린 성좌니까.’
그런 이의 주력기라면 성능은 볼 것도 없을 터.
“그럼 난 이만 간다.”
이제 보상도 얻었겠다.
작별을 고한 시문이 귀환하려던 순간.
“잠깐.”
시문의 어깨를 붙잡는 손오공.
그는 활기차고 장난스럽던 이전까지와 달리.
“이봐, 김시문. 나 하나만 더 부탁 좀 하자.”
무척이나 진중했다.
* * *
파앗.
소환 빛과 함께 작업실로 돌아온 시문.
그의 앞으로.
[아레나 ‘화과산의 멸망’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홀로 멸망을 저지하였습니다.]
[활약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35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25 상승했습니다.]
메시지창이 주르륵 떠오른다.
이어.
[지구 최초로 ‘차원 멸망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 10,000점을 획득합니다.]
최초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 1만 점까지.
“휘이~.”
시문은 절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전 메인 아레나 때도 30 업을 했는데. 35레벨이나 업하다니!’
지난 아레나였던 메인 아레나 네메아의 골짜기.
그것을 클리어했을 때도 30레벨업을 했었는데.
이번엔 무려 35레벨업이라는 폭업을 했다.
이는.
‘경험치 버프 중첩에다, 종목이 차원 멸망전이라서 그런 거겠지.’
총 80%에 달하는 추가 경험치 버프와 더불어.
공성전과 마찬가지로 차원 멸망전이라는 경험치가 짭짤한 아레나 종목이기 때문일 터.
어쨌거나.
“경험치 버프 진짜 달달하네.”
경험치까지 두둑이 챙긴 시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나저나…….’
시문은 무슨 왕좌처럼 꾸며진 연구실의 중앙.
‘저 녀석. 왜 이렇게 조용해?’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을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엔 25레벨이 올랐다고 펄펄 뛰어다니더니.’
지난 메인 아레나로 인한 폭업으로 좋다고 뛰어다니지 않았던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레나 역시 25레벨업이라는 폭업을 했거늘.
현자의 돌은 차분하다 못해, 고요한 수준이었다.
‘저번이랑 같은 수치라서 그러나?’
고개를 갸웃한 시문이 그런 현자의 돌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익일. 국가 미국 시각 23:59분을 기준으로 ‘임시 정규 아레나’를 종료합니다.]
[이후 국가 미국 시각 00:00분부터 NO. 274 지구는 ‘정규 아레나’로 편입됩니다.]
“뭐?!”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떠올랐다.